시안, 2007 여름
촉각은 거리가 없는 감각이랄 수 있다.
엄마 걱정
기형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장막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병(病)
기형도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주어(主語)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
반 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
단단한 몸통 위에,
사람아, 사람아 단풍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든다.
강 같은 평화
유재영
첫 알을 낳은 물오리가 갈대숲을 차고 날아오르자 펄 속에서 기어 나와 느긋이 해바라기를 즐기던 달랑게 가족들이 놀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때 가장 느린 속도로 전력을 다해 달려가는 어린 게가 있었다. 조금 전 어미 등에 업혔던 한 쪽 다리가 잘린 녀석이었다. 급한 나머지 온 힘을 다해 갯고랑으로 몸을 던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보드라운 물살들이 다가와 가만히 품어 주었다. 한순간 바다가 기우뚱 했다.
가령, 김언은 여기다 이런 말을 보태는 것이다.
“가장 빨리 사라지는 것 같지만 가장 오래 남는 것이 소리(음악)예요. 소리는 흩어지고 날아가버리는 것 같지만, 그것이 퍼져올라가 어떻게 움직이고 엉키는지를 알 수 없을 뿐이죠. 가령, 오늘 우리가 나눴던 대화는 상공에 올라가서 계속 엉키고 있고 흩어졌다가 또 만날 수도 있는 것이죠.”
시에서 ‘우리들’이라고 호명할 때도 그런 느낌 속에서 쓰는 경우가 많아요. 내 속의 다른 ‘나들’을 발견하면 할수록 너와 닮는 느낌이 있어요. 너와 내가 같아서가 아니라, 내 안에 너무 많은 것들이 들어있고 또 네 안에도 너무 많은 것들이 들어있어서, 그래서 같아지는 느낌인 거죠. 그렇게 우리는 분별이 흐릿해지면서 덩어리가 되는 거죠.
“ ‘당신에게 얘기한다’를 ‘당시 있는 곳에 얘기한다’로 말할 수 있겠죠. ‘우리는 사랑에 빠진다’, 이건 공간 이야기에요. ‘우울증에서 벗어난다.’ ‘수위를 조절해가면서.’ 이런 문장도 마찬가지죠. ‘아내’라는 호칭도 그렇죠. 고대부터, 말이 활용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자기 생각을 표현할 때 항상 공간에 기대왔던 거예요. 그걸 의식하니까, 이상하게 낯설어요.
심심해
심언주
심심해
저수지에 갈대는 없고 갈대 깃털만 있고, 갈대 깃털은 없고 “예.” “예.” 끄덕임만 있고, 끄덕임은 없고 사각사각 칼 가는 오리만 있고
저수지에 오리는 없고 오리가 가르는 물주름만 있고, 물주름은 없고 산만하게 흩어지는 물비늘만 있고, 물 메아리는 돌아오다 길이나 잃고
일요일은 일요일
거꾸로 가도 일요일, 바로 가도 일요일
저수지에는 강냉이만 받아먹는 오리가 있고, 받아먹기만 하는 구름이 있고
저수지 저편 날아오르지도 내려앉지도 못하는 솟대 같은 십자가가 있고, 골똘히 명상에 잠겨 있기나 하고
심심해
저수지에 돌을 던지면 꽥꽥 달아나는 오리가 있고, 찢어지는 구름이 있고, 일그러지는 딸아이 얼굴이 있고, 십자가는 미간을 찌푸린 채 서 있기나 하고 있고 없고 없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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