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전집, 기형도 전집 편집위원회 엮음, 문학과 지성사, 2006

 

 

 

 

 

조치원 중(中)

 

간이역에서 속도를 늦추는 열차의 작은 진동에도

소스라쳐 깨어나는 사람들. 소지품마냥 펼쳐보이는

의심 많은 눈빛이 다시 감기고

좀더 편안한 생을 차지하기 위하여

사투리처럼 몸을 뒤척이는 남자들.

청년들은 톱밥같이 쓸쓸해 보인다.

 

 

 

 

 

오후 4시의 희망 중(中)

 

나는 침묵이 두렵다

침묵은 그러나 얼마나 믿음직한 수표인가

내 나이를 지나간 사람들이 내게 그걸 가르쳤다

아주 얌전히 명함이나 타이프 용지처럼

햇빛 한 장이 들어온다, 김은 블라인드 쪽으로 다가간다

 

 

 

 

 

 

진눈깨비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 했다, 진눈깨비

 

 

 

 

 

 

흔해빠진 독서

 

휴일의 대부분은 죽은 자들에 대한 추억에 바쳐진다

죽은 자들은 모두가 겸손하며, 그 생애는 이해하기 쉽다

나 역시 여태껏 수많은 사람들을 허용했지만

때로는 죽은 자들에게 나를 빌려주고 싶을 때가 있다

수북한 턱수염이 매력적인 이 두꺼운 책의 저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불행한 생을 보냈다, 위대한 작가들이란

대부분 비슷한 삶을 살다 갔다, 그들이 선택할 삶은 이제 없다

몇 개의 도회지를 방랑하며 청춘을 탕진한 작가는

엎질러진 것이 가난뿐인 거리에서 일자리를 찾는 중이다

그는 분명 그 누구보다 인생의 고통을 잘 이해하게 되겠지만 종잇장만 바스락거릴뿐, 틀림없이 나에게 관심이 없다

그럴 때마다 내 손가락들은 까닭 없이 성급해지는 것이다

휴일이 지나가면 그뿐, 그 누가 나를 빌려가겠는가

나는 분명 감동적인 충고를 늘어놓을 저 자를 눕혀두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저녁의 거리로 나간다

휴일의 행인들은 하나같이 곧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

그러면 종종 묻고 싶어진다, 내 무시무시한 생애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이 거추장스러운 마음을 망치기 위해

가엾게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흙탕물 주위를 나는 기웃거렸던가!

그러면 그대들은 말한다, 당신 같은 사람은 너무 많이 읽었다고

대부분 쓸모 없는 죽은 자들을 당신이 좀 덜어가달라고

 

 

 

 

 

 

가는 비 온다 중(中)

 

이 거리 끝에는 커다란 전당포가 있다, 주인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간을 빌리러 뒤뚱뒤뚱 그곳에 간다

누구도 죽음에게 쉽사리 자수하지 않는다

 

 

 

 

 

 

기억할 만한 지나침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서기(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이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바람은 그대 쪽으로 중(中)

 

.. 아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 중(中)

 

푸른 간유리 같은 대기 속에서 지친 별들 서둘러 제 빛을 끌어모으고 고단한 달도 야윈 낫의 형상으로 공중 빈 밭에 힘없이 걸려 있다.

 

 

 

 

 

 

 

포도밭 묘지1 중(中)

 

희망도 내게는 너무나 거추장스러웠네. 기억한다. 그해 가을 주인은 떠나 없고 그리움이 몇 개 그릇처럼 아무렇게나 사용될 때 나는 떨리는 손으로 짧은 촛불들을 태우곤 했다.

 

 

 

 

 

 

 

 

그 집 앞 중(中)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삼촌의 죽음

-         겨울 판화(版畵) 4 중(中)

 

한낮의 눈보라는 자꾸만 가난 주위로 뭉쳤지만 밤이면 공중 여기저기에 빛나는 얼음 조각들이 박혀 있었다. 어른들은 입을 벌리고 잠을 잤다. 아이들은 있는 힘 다해 높은음자리로 뛰어올라가고 그날 밤 삼촌의 마른기침은 가장 낮은 음계로 가라앉아 다시는 악보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폭풍의 언덕 중(中)

 

구부러진 핀처럼 웃으며

빨랫줄에서 힘없이 떨어지는 아버지의 러닝 셔츠

칼국수처럼 풀어지는 어둠!...

 

 

 

 

 

 

 

 

종이달 중(中)

 

잃어버린 것은 찾지 않네. 그럴 만큼 시간은 여유가 없어.

잃어버려야 할 것들을 점검중이지. 그럴 만큼의 시간만 있으니까.

사람들은 조금씩 빨라진다.

속도가 두려움을 만날 때까지. 그러나

 

 

 

 

 

 

 

봄날은 간다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열풍(熱風)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이며

2시착(時着) 시외버스도 떠난 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신작로 위에는 흙먼지, 더러운 비닐들

빈 들판에 꽂혀 있는 저 희미한 연기들은

어느 쓸쓸한 풀잎의 자손들일까

밤마다 숱한 나무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기고

사내들은 화투패마냥 모여들어 또 그렇게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간다

여자가 속옷을 헹구는 시냇가엔

하룻밤새 없어져버린 풀꽃들

다시 흘러들어온 것들의 인사(人事)

흐린 알전구 아래 엉망으로 취한 군인은

몇 해 전 누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자는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다

몇 번인가 아이를 지울 때 그랬듯이

습관적으로 주르르 눈물을 흘릴 뿐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서

추억은 내용물 없이 떠오르고

소읍(小邑)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하다, 누구일까

세숫대야 속에 삶은 달걀처럼 잠긴 얼굴은

봄날이 가면 그뿐

숙취(宿醉)는 몇 장 지전(紙錢) 속에서 구겨지는데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저 흙먼지들은

굳은 땅 속으로 하나둘 섞여들는지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388번 종점

 

 

구겨진 불빛을 펴며

막차는 떠났다.

 

적막(寂寞)으로 무성해진 가슴 한켠 공지(空地)에서

캄캄하게 울고 있는 몇 점 불씨

가만히

그 스위치를 끄고 있는 한 사내의 쓸쓸한 손놀림.

 

 

 

 

 

 

 

레코오드판에서 바늘이 튀어오르듯이

 

 

그것은 어느 늦은 겨울날 저녁

조그만 카페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누구를 기다리기로 작정한 것도 아니었다

부르기 싫은 노래를 억지로 부르듯

흑인(黑人) 가수의 노래가 천천히

탁자에는 시든 꽃 푸른 꽃 위에는 램프

어두웠다 벽면에 긴 팽이모자를 쓴

붉고 푸른 가면들이 춤추며

액자 때문은 아니었다

예감이라도 했던들 누군가

나를 귀찮게 했던들 그 일이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나는 대학생(大學生)이었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래서 더욱 무서웠다

가끔씩 어떤 홀연한 계기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전청춘(全淸春)이

한꺼번에 허물어져버린 것 같은

슬픔을 맛볼 때가 있듯이

레코오드판에서 바늘이 튀어오르듯이

그것은 어느 늦은 겨울날 저녁

조그만 카페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마른 나뭇가지처럼 힘없이

천천히 탁자 아래로 쓰러졌다.

 

 

 

 

 

 

 

귀가(歸家)

 

 

당신(當身)이 세수(洗手)하신 물에선

항상 짠 냄새가 나요

가끔은 몇 개씩

조개껍질이 둥둥 떠 있어요

고양이털이 가늘게 부드러워

새벽에 흘린 코피가 아직까지 젖어 있고

집은 멀기만 한데

신발 끈이 자꾸만 풀어져요.

당신을 잊고 있는 밤이면, 어머니

우주비행사(宇宙飛行士)가 잃어버린

장갑 한 짝이

우리집 꽃밭에 소리없이

별똥처럼 내려앉을 것입니다.

 

 

 

 

 

 

 

겨울의 끝 중(中)

 

그의 손에 냉수 한 그릇과 엊저녁 읽다 만 석간 신문 한 장이 집혀졌다. 윤국은 몸을 뒤집고 엎드려서 한 그릇의 추위를 마시기 시작했다.

눈을 좋아하십니까?

좋아하고 싫어하는 문제가 아니에요. 아아! 눈이 오면 온통 거리가 없어져요.

 

 

 

 

 

 

환상일지 중(中)

 

나는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걷는다. 여자가 끌려오듯이 붙어 있다. 여자가 두른 팔에 힘이 빠진다. 종이 봉지가 찢어지며 새빨간 사과 두어 알과 소주 한 병이 눈 속에 파묻힌다. 나는 천천히 그것들을 끄집어내어 품속에 안는다. 그것들이 떨어졌던 자리에 생긴 깊은 구멍 몇 개가 하얀 눈을 뜨고 잠시 나를 바라다본다.

 

 

 

 

 

미로 중(中)

 

육중한 유리문을 열다 말고 나는 물에 흠뻑 젖어 있는 것처럼 유리 속에 미끈미끈하게 갇혀 있는 내 모습을 보고 갑자기 심한 갈증을 느꼈다.

 

 

 

 

 

 

 

 

짧은 여행의 기록 중(中)

 

나는 본래 뚱둥한 여자들을 쫓아다닌 적이 없었고 그래서 그녀와의 해후는 준비되지 않았다.

버릇인데, 글을 쓰려고 하면 너무 많은 생각들이 떠올라 나는 공포에 질리곤 한다. 한 가지 생각만이 주어진다면 나는 그것에 대해서 아주 분석적이고 통찰력이 가득 찬 문장으로 쓸 자신이 있다. 그러나 내 정신은 너무 얇고 힘이 없어 떠오르는 생각들을 허겁지겁 따라가기만 하는 것이다.

시는 어쨌든 욕망이었다

장정일은 책은 지문 묻을까봐 손을 씻은 뒤 읽으며, 초판만 읽지 재판은 읽지 않으며, 책에는 볼펜 자국을 남기지 않으며, 한번 본 시들은 모두 외우다시피 한다고 내게 이야기했다.

끓는 물에 적셨다 꺼낸 종이처럼 옷들이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 누구도 나에게 경배하러 오지 않았다. 오히려 내 육체에 물을 묻히고 녹이 슬기를 기다렸다

 

 

 

 

 

 

 

 

 

참회록 중(中)

 

그저께 응춘군 집에 가면서 내가 절실하게 느낀 것은 내가 외로움을 무서워한다는 사실이다. 아닌데, 외로움은 잘 견디는 이다. 이로움 속에 있을 때는 오히려 나는 외로움을 방해하려는 요인을 배격하는 편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 외로움의 상태로까지 가는 과정을 두려워한다는 결론이다.그건 사실이다.

원재길군에게서 내가 자주 느끼듯이 나의 생활, 앞으로의 생활을, (재길군이나 나는) 문학을 위한 직접적 접촉을 통한 경험, 즉 단적으로 말해 소재로서 여기고 있다는 점을 나는 부인할 수 없다.

나는 문득문득 내가 다분히 여성적 사랑관(통념상으로)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에리히 프롬의 말대로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며 익히려고도 하지 않으며 다만 사랑받기 위한 본능적인 치장(이것은 심리적으로 정신적 미화와 통할 것 같다)만 갖추려는 사람인지 모른다

엄마가 방금 잠에서 손 안 가득 개구리가 쥐어 있었다고 묘한 아포리즘적 묘사를 하시곤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잠들었다

먼 훗날 당신의 첫 남자가 깨끗한 추억으로 서 있기를……당신의 성숙기에 한 개의 방향 표지처럼 서 있는 나를 기억해달라고 했다

옷 주셔야죠?

, 그렇군요. 너무 따스해서 나는 내 살인 줄 알았어요.

1시. 시는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우문(愚問)이다. 구원할 수 있다 혹은 없다의 구분은 이미 시에 기능이나 효용의 틀을 뒤집어씌운다. 따라서 어떠한 예술 장르가 최초에 성립되었을 때 본연적으로 갖는 기능이란 두말할 필요 없이 있음에 귀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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