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 문태준, 창비, 2004

 

 

 

 

 

 

짧은 낮잠

 

 

낮잠에서 깨어나면

나는 꽃을 보내고 남은 나무가 된다

 

(魂)이 이렇게 하루에도 몇번

낯선 곳에 혼자 남겨질 때가 있으니

 

오늘도 뒷걸음 뒷걸음치는 겁 많은 노루꿈을 꾸었다

 

꿈은, 멀어져가는 낮꿈은

친정 왔다 돌아가는 눈물 많은 누이 같다

 

낮잠에서 깨어나 나는 찬물로 입을 한번 헹구고

주먹을 꼭 쥐어보며 아득히 먼 넝쿨에 산다는 산꿩 우는 소리 듣는다

 

오후는 속이 빈 나무처럼 서 있다

 

 

 

 

맨발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저녁에 섬을 보다

 

 

저녁에

물결의 혀를 빌려 조금씩 고운 모래톱을 바깥으로 밀어내놓은 작은 섬을 바라본다

외부에서 보는 섬은

새뜰로 가는 길에 있던 돌비석이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 같기도 하고

뒷마당에서 시득시득 말라가다 천천히 무너져내리는 나뭇동 같기도 한데

저녁에

조금씩 바깥으로 흘려보내는 것들을 보는 일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잠자다 깬 새벽에

아픈 어머니 생각이 절박하다

 

내 어릴 적

눈에 검불이 들어갔을 때

찬물로 입을 헹궈

내 눈동자를

내 혼을

가장 부드러운 살로

혀로

핥아주시던

 

붉은 아궁이 앞에서

조속조속 졸 때에도

구들에서 굴뚝까지

당신의 눈에

불이 지나가고

 

칠석이면

두 손으로 곱게 빌던

그 돌부처가

이제는 당신의 눈동자로

들어앉아서

 

어느 생애에

내가 당신에게

목숨을 받지 않아서

무정한 참빗이라도 될까

 

어느 생애에야

내 혀가

그 돌 같은

눈동자를 다 쓸어낼까

 

목을 빼고 천천히

울고, 울어서

젖은 아침

 

 

 

 

 

 

 

묵언(默言)

 

 

절마당에 모란이 화사히 피어나고 있었다

누가 저 꽃의 문을 열고 있나

 

꽃이 꽃잎을 여는 것은 묵언

 

피어나는 꽃잎에 아침 나절 내내 비가 들이치고 있었다

말하려는 순간 혀를 끊는

 

 

 

 

 

뻘 같은 그리움

 

 

그립다는 것은 당신이 조개처럼 아주 천천히 뻘흙을 토해내고 있다는 말

 

그립다는 것은 당신이 언젠가 돌로 풀을 눌러놓았었다는 얘기

 

그 풀들이 돌을 슬쩍슬쩍 밀어올리고 있다는 얘기

 

풀들이 물컹물컹하게 자라나고 있다는 얘기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