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미, 문태준, 문학과지성사, 2007
수련
작은 독에 더 작은 수련을 심고 며칠을 보냈네
얼음이 얼 듯 수련은 누웠네
오오 내가 사랑하는 이 평면의 힘!
골똘히 들여다보니
커다란 바퀴가 물 위를 굴러가네
노모(老母)
반쯤 감긴 눈가로 콧잔등으로 골짜기가 몰려드는 이 있지만
나를 이 세상으로 처음 데려온 그는 입가 사방에 골짜기가 몰려들었다
오물오물 밥을 씹을 때 그 입가는 골짜기는 참 아름답다
그는 골짜기에 사는 산새 소리와 꽃과 나물을 다 받아먹는다
맑은 샘물과 구름 그림자와 산뽕나무와 으름덩굴을 다 받아먹는다
서울 백반집에 마주 앉아 밥을 먹을 때 그는 골짜기를 다 데려와
오물오물 밥을 씹으며 참 아름다운 입가를 골짜기를 나에게 보여준다
바깥
장대비 속을
멧새 한 마리가 날아간다
탄환(彈丸)처럼 빠르다
너무 빠른 것은 슬프다
갈 곳이 멀리
마음이 멀리에 있기 때문이다
하얀 참깨꽃 핀 한 가지에서
도무지 틈이 없는
빗속으로
소용돌이쳐 뚫고 날아가는
멧새 한 마리
저 전속력(全速力)의 힘
그리움의 힘으로
멧새는 어디에 가 닿을까
집으로?
오동잎같이 넓고 고요한 집으로?
중심(中心)으로?
아,
다시 생각해도
나는
너무 먼
바깥까지 왔다
가재미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아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가재미 2
꽃잎, 꽃상여
그녀를 위해 마지막으로 한 벌의 옷을 장만했다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옷, 꽃상여
그녀의 몸은 얼었지만 꽃잎처럼 화려한 옷을 입고 있다
두꺼운 땅거죽을 열고 독 같은 고요 속으로 천천히
그녀가 걸어 들어가 유서처럼 눕는다
울지 마라, 나의 아이야, 울지 마라
꽃상여는 하늘로 불타오른다
그녀의 몸에서 더 이상 그림자가 나오지 않는다
붉은 흙 물고기
상두꾼들이 그녀의 무덤을 등 둥근 물고기로 만들어주었다
세상의 모든 무덤은 붉은 흙 물고기이니
물 없는 하늘을 헤엄쳐 그녀는 어디로든 갈 것이다
개를 데려오다
석양 아래 묶인 한 마리 개가 늦가을 억새 같다
털갈이를 하느라 작은 몸이 더 파리하다
석양 아래 빛이 바뀌고 있다
그녀가 정붙이고 살던 개를 데리고 골목을 지나 내 집으로 돌아오다
가재미 3
- 아궁이의 재를 끌어내다
그녀의 함석집 귀퉁배기에는 늙은 고욤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방고래에 불 들어가듯 고욤나무 한 그루에 눈보라가 며칠째 밀리며 밀리며 몰아치는 오후
그녀는 없다, 나는 그녀의 빈집에 홀로 들어선다
물은 얼어 끊어지고, 숯검댕이 아궁이는 퀭하다
저 먼 나라에는 춥지 않은 그녀의 방이 있는지 모른다
이제 그녀를 위해 나는 그녀의 집 아궁이의 재를 끌어낸다
이 세상 저물 때 그녀는 바람벽처럼 서럽도록 추웠으므로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식은 재를 끌어내 그녀가 불의 감각을 잊도록 하는 것
저 먼 나라에는 눈보라조차 메밀꽃처럼 따뜻한 그녀의 방이 있는지 모른다
저 먼 나라에서 그녀는 오늘처럼 밖이 추운 날 방으로 들어서며 맨 처음 맨손바닥으로 방바닥을 쓸어볼지 모르지만, 습관처럼 그럴 줄 모르지만
이제 그녀를 위해 나는 그녀의 집 아궁이의 재를 모두 끌어낸다
그녀는 나로부터도 자유로이 빈집이 되었다
젖 물리는 개
어미 개가 다섯 마리의 강아지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서서 젖을 물리고 있다
강아지들 몸이 제법 굵다 젖이 마를 때이다 그러나
서서 젖을 물리고 있다 마른 젖을 물리고 있는지 모른다
처음으로 정을 뗄 때가 되었다
저 풍경 바깥으로 나오면
저 풍경 속으로는
누구도 다시 돌아갈 수 없다
강대나무를 노래함
빛이 있고 꽃이 있는 동안에도 깊은 산속 강대나무*를 생각한다
허리를 잡고 웃고 푸지게 말을 늘어놓다가도 나는 불쑥 강대나무를 화제 삼는다
비좁은 방에서 손톱 발톱을 깎는 일요일 오후에도 나는 강대나무를 생각한다
몸이 검푸르게 굳은 한 꿰미 생선을 사 집으로 돌아갈 때에도 강대나무를 생각한다
회사의 회전의자가 간수의 방처럼 느껴질 때에도 강대나무를 떠올린다
강대나무를 생각하는 일은 내 작은 화단에서 죽은 화초를 내다 버리는 일
마음에 벼린 절벽을 세워두듯 강대나무를 생각하면 가난한 생활이 비로소 견디어진다
던져두었다 다시 집어 읽는 시집처럼 슬픔이 때때로 찾아왔으므로
우편함에서 매일 이별을 알리는 당신의 눈썹 같은 엽서를 꺼내 읽었으므로
마른 갯벌의 소금밭을 걷듯 하루하루를 건너 사라졌으므로
건둥건둥 귀도 입도 마음도 잃어 서서히 말라죽어 갔으므로
나는 초혼처럼 강대나무를 소리내어 떠올려 내 누추한 생활의 무릎으로 삼는 것이다
내가 나를 부르듯 저 깊은 산속 강대나무를 서럽게 불러 내 곁에 세워두는 것이다.
* 강대나무: 선 채로 말라죽은 나무
바닥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산 밑 뒤뜰에 가랑잎 지는 걸 보고 있다
우수수 떨어지는 가랑잎
바람이 있고 나는 눈을 감는다
떨어지는 가랑잎이
아직 매달린 가랑잎에게
그대가 나에게
몸이 몸을 만질 때
숨결이 숨결을 스칠 때
스쳐서 비로소 생겨나는 소리
그대가 나를 받아주었듯
누군가 받아주어서 생겨나는 소리
가랑잎이 지는데
땅바닥이 받아주는 굵은 빗소리 같다
후두둑 후두둑 듣는 빗소리가
공중에 무수히 생겨난다
저 소리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 옛일이 되었다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
한 마리 멧새
소복하게 내린 첫눈 위에
찍어놓은
한 마리 멧새 발자국
첫잎 같다
발자국이 흔들린 것 보니
그 자리서 깔깔 웃다 가셨다
뒤란이 궁금해 그곳까지 다녀가셨다
가늘은 발뒤꿈치를 들어 찍은
그 발자국을 그러모아
두 귀에 부었다
맑은 수액 같다
귀에 넣고
이리저리 흔들어대니
졸졸 우신다
좁쌀 같은 소리들
귀가 시원하다
발자국을 따라가니
멧새 한 마리
시골집 울에 내려와
가늘은 발목을 얹어 앉아
붉은 맨발로
마른 목욕을 즐기신다
간밤에 다녀간 그분 같은데
밤새 소골집을 다 돌아보고선
능청을 떨고
빈 마루를 들여다보고 계신다
아, 24일
이 지구에서 가장 높이 자란 저 먼 나라 삼나무는 뿌리에서 잎까지 물이 올라가는 데 꼬박 24일이 걸린다 한다
나는 24일이라는 말에 그 삼나무가 그립고 하루가 아프다
나의 하루에는 쏙독새가 울고 나비가 너울너울 날고 꽃이 피는데
달이 반달을 지나 보름을 지나 그믐의 흙덩이로 서서히 되돌아가는 그 24일
우리가 숭벗이 눕고 일어서고 울고 웃다 지치는 그 24일이 늙은 삼나무에게는 오롯이
하나의 소천(小天)이라니! 한 동이의 물이라니!
나는 또 하루를 천둥 치듯 벼락 내리듯 살아왔고
산그림자를 제 몸 안에 거두어 묻으며 서서히 먼 산이 저무는데
저 먼 산에는 물항아리를 이고 산고개를 넘어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는 샘물 같은 산골 아이가 있을 것만 같다
바람이 나에게
한때는 바람 한 점 없는 날 맑은 날 좋았는데
오늘 바람 많은 평야에 홀로 서 있네
수많은 까마귀 떼가 땅 끝으로 십 리를 가는 하늘
나는 십 리를 가는 꿈도 잃고 나귀처럼 긴 귀를 가진 바람을 보네
다급한 목숨이 있다면 늙은 어머니는 이런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까
들판을 재우며 부르는 이 거칠은 바람의 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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