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탐구,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책세상, 2006
“언어의 모든 낱말은 각각 어떤 것을 지칭한다”고 우리가 말할 때, 우리가 어떤 구별을 하기를 원하는지가 정확히 설명되지 않는다면, 그로써 당장은 아직 전혀 아무것도 말해진 것이 없다.
어떤 하나의 언어를 상상한다는 것은 어떤 하나의 삶의 형태를 상상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 이름을 가지고 이미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만이 유의미하게 이름을 물을 수 있다.
“이 대상은 복합적인가?”라고 묻는 것은, 언젠가 어떤 문장 예들 속의 동사들이 능동으로 사용되었는지 수동으로 사용되었는지를 진술해야 했던 한 소년이, 예컨대 “잠자다”란 동사가 능동적인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수동적인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를 놓고 골머리를 앓았던 일과 비슷한 것이다.
“언어의 이름들이 지칭하는 것은 파괴 불가능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파괴 가능한 모든 것이 파괴되어 있는 상태를 기술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술 속에는 낱말들이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그 낱말들에 대응하는 것은 파괴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그 낱말은 아무 의미도 가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앉아 있는 나뭇가지를 잘라 내서는 안 된다.
“붉은 어떤 것은 파괴될 수 있지만, 붉음은 파괴될 수 없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붉은’이란 낱말의 의미는 붉은 사물의 존재로부터 독립적이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아이들에게 놀이 하나를 보여 주라!”고 말한다. 나는 그들에게 돈 놓고 주사위 던지기를 가르친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나에게, “나는 그런 놀이를 뜻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가 나에게 그 명령을 했을 때, 그의 마음속에는 그 주사위놀이의 배제가 틀림없이 떠올랐을까?
“그러나 하나의 설명이 정말 최종적이 아니라면, 그것은 그렇다면 어떻게 내가 이해하도록 도와주는가? 그 경우 설명은 실로 결코 종결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까 나는 그가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를 아직도 여전히, 그리고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부정확하다”는 실제로는 하나의 비난이며, “정확하다”는 하나의 칭찬이다. 그리고 이것이 뜻하는 바는, 부정확한 것은 더 정확한 것만큼 완전하게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목적”이라고 부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우구스티누스(<고백>) : “그러므로 시간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나에게 묻지 않으면, 나는 안다 ; 그 물음을 설명하려 하면, 나는 알지 못한다.”
우리 언어의 모든 문장이 각각 ‘있는 그대로 정돈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즉, 우리가-마치 우리의 일상적인, 애매한 문장들은 전혀 결점이 없는 뜻을 아직 가지고 있지 않으며, 완전한 언어는 우리에 의해 비로소 구성되어야 한다는 듯이-어떤 이상을 얻고자 애쓰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또 한편으로는, 뜻이 있는 곳에는 완전한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그러므로 완전한 질서는 가장 애매한 문장 속에도 들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걸어가고자 원한다 ;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마찰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래-” 하고 나는 되풀이해서 중얼거린다. 만일 내가 나의 시선을 이 사실에다 그저 아주 명확하게 맞출 수만 있다면, 만일 이 사실에 초점 맞출 수만 있다면, 나는 틀림없이 사물의 본질을 파악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명제의 일반적 형식은 다음과 같다 : 사정이 이러이러하다.” – 이것이 우리들이 자신에게 무수히 되풀이하는 그런 종류의 문장이다. 우리들은 되풀이해서 사물의 본성을 뒤쫓고 있다고 믿지만, 우리들은 단지 사물의 본성을 고찰하는 형식을 따라서 가고 있을 뿐이다.
우리를 사로잡는 혼란들은 말하자면 언어가 일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헛돌고 있을 때 일어난다.
아무튼 이해를 ‘심리적인 과정’으로는 결코 생각조차 하지 말라! –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을 혼란시키는 말투이기 때문이다.
(4) 어제 나는 그 시를 외워 알고 있었다 ; 오늘 나는 더 이상 그것을 알지 못한다. “언제 나는 그것을 외워 알기를 그쳤는가?” 라는 물음은 어떤 경우에 뜻을 가지는가? (5) 누군가가 나에게 묻는다 ; “당신은 이 무게를 들어 올릴 수 있는가?” 나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그가 “해보라!”고 말한다 – 그때 나는 들어 올릴 수가 없다. “내가 ‘그렇다’고 대답했을 때는 나는 그걸 할 수 있었다, 단지 지금은 나는 그것을 할 수 없다”란 변명은 이런 상황들 속에서 인정 받게 될까?
기계는 – 나는 우선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작용 방식을 이미 자신 속에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것을 그에게 실제로 설명하는가? 당신은 그로 하여금 본질적인 것은 추측하도록 하지 않는가? 당신은 그에게 예들을 준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의 경향을, 그러니까 당신의 의도를 추측해야 한다.”
(우리는 때때로 설명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설명의 형식 때문에 설명들을 요구한다는 점을 기억하라. 우리의 요구는 건축술적인 것이다)
“하나의 수열은 우리에게는 하나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 그것은 오히려, 우리는 오직 규칙의 입만 바라보고 행하며, 더 이상의 안내를 호소하지 않음에 대한 표현이다.
그렇게 규칙을 따라 나아가는 동안, 그는 그 규칙이 마치 자신의 행위를 결정하는 듯 줄곧 그 규칙을 주시하여, 대단히 정확성을 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그 컴퍼스의 간격을 변화시킨다.
규칙이 마치 그것의 모든 귀결들을 미리 산출한 것처럼 나에게 보일 수 있으려면, 그것은 나에게 자명해야 한다.
왜 나의 오른손은 나의 왼손에게 돈을 증여할 수 없는가?
“나는 초록색이 나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안다”
철학에서 당신의 목적은 무엇인가? – 파리에게 파리통에서 빠져나갈 출구를 보여 주는 것.
생각 없이 하는 말과 생각을 하면서 하는 말은 음악 작품을 생각 없이 연주하는 것과 생각하면서 연주하는 것에 비교될 수 있다.
“시계는 우리에게 시간을 가리킨다. 무엇이 시간이냐는 아직 결정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우리들이 시간을 들여다보느냐-이 문제는 여기서 적절하지 않다.”
‘고통’이란 개념을 당신은 언어와 함께 배웠다.
어떤 풍경화 하나를, 상상의 풍경과 그 속에 들어 있는 어떤 집을 생각해 보라. 그리고 누군가가 “그 집은 누구의 것인가?”라고 물었다고 해보자. – 그런데 그에 대한 대답은, “그 집 앞 벤치에 앉아 있는 농부의 것”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이 농부는 자기 집에 예컨대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
자, ‘나’는 고통스럽다고 내가 말하도록 결정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전혀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장미는 암흑 속에서도 붉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암흑 속의 이 붉음을 당신 앞에서 또렷하게 본다고.
당신은 이런 경우를 기억하는가? 우리들이 토론에서 긴급히 한마디 하려고 할 때, 이의를 제기하고자 할 때, 우리들은 입을 열고 숨을 들이마신 채 멈추는일이 자주 있다 ; 그러고 나서 우리들이 그 이의 제기를 단념하기로 결정하면, 우리들은 숨을 내수니다.
철학에서는 결론들이 내려지지 않는다. “사정은 실로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철학의 명제가 아니다. 철학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을 확인할 뿐이다.
커피의 향기를 기술하라! – 어째서 안 되는가? 우리에게 낱말들이 결여되어 있는가? 그리고 그것들은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결여되어 있는가? – 그러나 그와 같은 기술이 어쨌든 가능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오는가? 언젠가 당신은 그와 같은 표현의 결여를 느낀 적이 있는가? 당신이 커피 향기를 기술하려 시도했는데, 성공하지 못했는가?
“의욕도 하나의 경험일 뿐이다”
나는 예컨대 내 팔의 움직임에 관해서는, 그것은 그것이 올 때 온다는 따위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어떤 것이 단순히 우리에게 일어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행한다고 말하는 것이 뜻을 가지는 영역이 있다. “나는 내 팔이 올라갈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 나는 내 팔을 들어 올릴 수 있다.”
“나는 의욕한다, 그러나 내 몸이 나를 따르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의지가 나를 따르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내가 내 팔을 들어 올릴 때, 대개 나는 그걸 들어 올리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동물이 성내고, 두려워하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깜짝 놀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희망하는 것은? 그리고 왜 못하는가?
개는 자기 주인이 문간에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개는 자기 주인이 모레 올 것이라고도 믿을 수 있는가? – 그런데 개는 무엇을 할 수 없는가?
인간 신체는 인간 영혼의 가장 좋은 그림이다.
‘만일에’라는 느낌은 “만일에”라는 낱말에 동반되는 느낌이 아니다.
자신의 고뇌를 관찰하는 사람은 어떤 감각 기관으로 그것을 관찰하는가? 특별한 감각 기관으로? 즉 그 고뇌를 느끼는 감각 기관으로?
문제는 이것이다 : 왜 우리들은 그렇게 말하고 싶어 하는가?
“내가 실제로 보는 것은 아무튼 대상의 작용에 의해 내 속에서 성립하는 것이어야 한다.”
어린아이가 배우는 원초적 언어놀이는 정당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 정당화의 시도들은 거부될 필요가 있다.
이제 다음과 같은 문제가 일어난다. 즉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서 볼 수 있는 능력이 떠나 버린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은 어떤 상태일까? 그것은 어떤 결과들을 가질까?
“말이 내 혀끝에서 맴돈다.”
… 이에 관해서 제임스는 실제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자 한다 : “얼마나 이상한 체험인가! 말이 아직 거기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어떤 뜻에서는 이미 거기에 있다. 또는, 오직 이 말로 자라날 수 있는 어떤 것이 거기에 있다.”
낱말들의 사용이 그 의미를 당신에게 가르치게 하라! (비슷하게, 우리들은 수학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 무엇이 증명되었는가는 증명이 당신에게 가르치게 하라.)
이것은 예컨대 “지구는 수백만 년 동안 존재해 왔다”란 명제가 “지구는 최근 5분 동안 존재해 왔다”란 명제보다 더 명료한 뜻을 가지고 있다는 점과 연관된다.
사자가 말할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몽블랑의 높이는 그것을 어떻게 오르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다.
내가 “반 시간 전에 그는 여기 있었다”고- 즉 기억에 의해서-말한다면, 이는 현재적 체험의 기술(記述)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 연보
… 가을에 린츠 국립실업고등학교에 입학하다. (같은 학교에 그와 동갑인 히틀러가 1년 후에 입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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