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립자, 미셸 우엘벡, 열린책들, 2003
이튿날 그는 7시쯤에 일어났다. 그러고 나서 서가에서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자서전 <부분과 전체>를 꺼내어 들고, 에펠 탑 앞의 샹 드 마르스 쪽으로 산책을 나갔다. 아침 공기가 맑고 삽상했다.
어떤 물고기가 공기를 들이마시기 위해 이따금 물 밖으로 머리를 내민다고 할 때, 그 물고기는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몇 초 동안 무엇을 보게 될까?
같은 날 밤에 미셸은 샤르니 초등학교 시절에 찍은 사진 한 장을 다시 보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사진 속의 아이는 책상 앞에 앉아서 한 손에 교과서를 펼쳐 들고 있었다. 아이는 즐겁고 씩씩한 표정으로 카메라 쪽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아이가 자라서 오늘날의 그가 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옛날의 나는 지금의 나인가 아닌가?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그녀는 샤르트르의 저작에는 그다지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지만, 장애에 가까울 정도로 못생긴 그 철학자의 외모에는 큰 충격을 받았다.
차분하고 사실적이면서도 깊은 절망이 감도는 그 장면들을 보면서 흑자는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들을 떠올리기도 했다. 자기가 만나는 유명 인사들에 대한 그의 시선은 덤덤했다. 그는 오징어나 가재를 카메라에 담을 때와 똑 같은 마음가짐으로 바르도나 사강을 찍었다.
순수한 도덕은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결정하며, 무엇에 의해 조건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조건을 부여한다. 요컨대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관찰할 수 있는 도덕은 순수한 도덕의 요소들과 다른 요소들이 다양한 비율로 혼합된 것이다. 이 다른 요소들이 어디에서 온 것인가는 다소 불분명하지만, 대개는 종교에서 온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야생의 자연은 너무나 추악해서 그저 혐오감을 줄 뿐이다. 야생의 자연은 파괴와 학살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그래서 인간은 어쩌면 그 학살을 완수하는 것이 자신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가을날 오후, 유아원 여교사는 남자아이들에게 나뭇잎으로 목걸이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여자아이들은 그 나이에 벌써 여성에게 강요되는 멍청한 인종(忍從)의 몸가짐을 보이며 비탈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브뤼노는 또다시 죽음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번에도 아이는 죽음이라는 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이는 여러 해가 지난 뒤에도 국어 숙제나 역사 작문을 잘해서 상을 받게 되면, 그것에 대해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하리라고 마음을 먹곤 했다. 물론 그러고 나면 즉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동물 사회는 거의 모두가 어떤 지배 체제를 바탕으로 운용된다. 이 지배 체제는 구성원들간에 힘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과 결합되어 있고, 엄격한 위계 질서를 특징으로 삼고 있다. 집단 내에서 가장 힘이 센 수컷은 <알파 수컷>이라 불린다. 두 번째로 힘이 센 <베타 수컷>이 그 뒤를 잇는다. 이런 식으로 해서 가장 힘이 약한 <오메가 수컷>까지 서열이 매겨진다.
그 무렵에 미셸은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온건하고 보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는 행복에 대해 진정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의 생각이라는 것이 결국은 할머니의 생각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할머니는 가톨릭 신자였고 우파인 드골에게 투표를 하는 사람이었다.
브뤼노가 카롤린 예세얀의 허벅지에 손을 얹었을 때, 그는 거의 청혼하는 심정으로 그런 행위를 한 것이었다.
한 남자와 사귄다는 게 정확하게 무슨 뜻일까? 입맞춤 정도를 한다는 걸까? 아니면 페팅이나 딥 페팅, 나아가서는 엄밀한 뜻으로 말하는 성 관계를 가진다는 걸까?
이 세계는 느리고 차가웠다. 그래도 따뜻한 것이 있기는 했다. 여자들의 두 다리 사이에 있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도달할 수 없었다.
하지만 브뤼노는 자기가 그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느끼고 있었다. 한 개인의 정체성과 그의 주된 특성에는 변하지 않는 핵이 있다는 가정이 그에게는 아주 자명한 것으로 보였다.
「나도 자아가 하나의 환상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그래서 고통이 사라질 수 있다면 좋겠어. 하지만 자아가 환상이라 해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인걸…….」
과거를 회상하다 보면, 모든 게 다 그렇게 되도록 예정되어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기 수비다. 십중팔구는 틀린 생각인데도 말이다.
그 불빛을 보자 울컥 눈물이 솟았다. 1974년 7월의 어느 날 밤, 아나벨은 바로 그런 정황에서 자신의 하나의 개별적 존재하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깨달았다. 인간이 하나의 동물로서 자신의 개별적인 삶을 자각하는 것은 먼저 고통을 통해서다. 하지만 사회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개별적인 삶을 완전하게 자각하는 것은 <거짓말>을 매개로 할 때이다. 개별적인 삶은 사실상 이 거짓말과 혼동될 수 있다.
이어서 천둥 소리가 잦아들고 비가 후드득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빗방울들이 텐트의 천을 투덕투덕 때리고 있었다. 얼굴 바로 위에서 소리가 들리는데, 그의 몸에는 빗방울이 닿지 않았다. 문득 자기 인생이 그 상황과 비슷하리라는 예감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앞으로 인간의 다양한 감정들 사이로 지나가게 될 것이다. 때로는 그것들이 아주 가까이에 있을 수도 있으리라. 다른 사람들은 행복을 느끼기도 하고 불행을 느끼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 감정들 가운데 어떤 것도 나에게 닿거나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리라.
초기 조건이 주어지고 초기 상호작용의 네트워크에 매개 변수가 정해지면, 사건들은 인간의 마음과 무관한 텅 빈 공간에서 전개된다. 이 사건들이 결정론적인 성격을 띠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다. 이미 일어난 일은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일이다. 그 밖의 가능성은 없었다. 그 일에 대해서 누구도 책임질 수 없었다.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밤이었다. 시간이 10분쯤 흘렀다. 아나벨은 초인종을 눌러 미셸을 만날 수도 있었고, 그냥 돌아갈 수도 있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자유>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쨌거나 그 10분은 혹독한 시련의 시간이었고, 그 시간을 겪은 뒤로 그녀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될 터였다.
파란 하늘에 작은 구름들이 떠가고 있었다. 브뤼노는 그 구름들을 보면서 정액이 튀어서 하늘에 여기저기 묻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미셸은 청소년기에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 더욱 존엄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는 자기가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을 존엄하게 만드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텔레비전이었다.
「…여자는 어떤 나이가 되면, 남자의 성기에 자기 몸을 비빌 수는 있어도 남자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는 없어. 남자들이 원래 그런 족속이거든.」
「바닷물이 달빛에 반짝이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여느 때와 달리 아주 분명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어. 나와 이 세계 사이에 아무 관계도 없다는 느낌 말이야.」
만일 어떤 종교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서구 사회는 얼마나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을까?
<미셸 제르진스키의 천재적인 특성 중 하나는 자신의 첫 직관에 매이지 않고 그것을 넘어섰다는 점이다…>
거짓말은 그것이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을 때에만 쓸모가 있다. 변화가 실패로 돌아가면, 남는 건 거짓말에 대한 의식과 씁쓸한 뒷맛뿐이다.
제대로 산다는 건 남의 시선이 있을 때에 비로소 가능해지는 거야.
안느는 언제나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은 생각을 하고 싶어했어. 나는 우리가 파리로 돌아가는 것은 사실상 시끄럽지 않게 이혼하기 위한 것임을 아주 잘 알고 있었어.
늙는다는 게 바로 그런 걸 거야. 감정의 반응은 무뎌지고 원한도 기쁨도 별로 간직하지 않게 돼. 그 대신 몸 여기저기에 이상은 없는지, 기관들의 균형이 무너져 있지는 않은지에 주로 관심을 갖게 되지.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에 의존하기만 할 뿐, 사회에는 거의 쓸모가 없어. 내가 할 줄 아는 거라곤 낡아빠진 문화적 대상에 대한 모호한 해석을 생산하는 것뿐이야. 그런데도 나는 봉급을 받아. 그것도 평균을 훨씬 웃도는 짭짤한 봉급을 받지. 내 주위 사람들은 대부분 나와 비슷해.
그러고는 자기가 나폴레옹과 친척 관계에 있다고 상상했지. 새벽에 전선을 둘러보다가, 팔다리가 잘리고 배가 갈라진 채 쓰러져 있는 수천 구의 시체를 바라보면서, <까짓거…… 파리의 남녀들이 하룻밤만 자고 나면, 이 모든 피해를 다 복구할 수 있어>라고 말했다던 그 독재자와 말이야.
사람들은 저마다 자아 도취적 만족감이 포함되어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나름의 쾌락을 얻기 위한 다양한 전략들을 채택하고, 그것들을 인생이라 부르고 있었다.
마르주노의 가설에 따르면, 개인의 의식은 힐베르트 공간들의 총합으로 정의되는 포크 공간 속의 확률장(確率場)과 비슷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죽음이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인간은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 죽음에 관한 이미지를 만들게 마련이지만, 그것은 언제나 마지못해 하는 일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인생의 어느 시기에 데이트를 하고 삶을 즐기고 나면 곧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기 시작한다고 생각해.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 늙는 걸 두려워했어. 끊임없이 자기들의 나이에 대해서 생각했지. 늙은 것에 대한 그 강박관념은 아주 일찍부터 시작돼. 스물다섯 살밖에 안 된 사람들이 그러는 것도 봤어. 일단 그런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기 시작하면 갈수록 심해지지. 나는 그런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어. 그런 판에서 벗어나고 싶었지.
그는 죽은 남자의 뇌를 보았다. 그 뇌는 공간의 부분이면서 공간을 포함하고 있었다.
현대인들 각자의 머릿속에는 미래에 대한 한 가지 단순한 전망이 들어 있다. 자기의 남아 있는 삶에서 기대할 수 있는 육체적 쾌락의 총량이 고통의 총량을 밑도는 때가 오리라는 전망 말이다(요컨대, 현대인들은 자기들 마음속에서 계량기가 돌아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이 계량기는 언제나 같은 방향으로 돈다). 사람에 따라 이르거나 늦거나 하는 차이는 있지만, 현대인들은 누구나 자기에게 남아 있는 쾌락과 고통의 양을 비교하는 때를 맞게 된다.
어떤 존재들은 우리가 그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우리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들 중에는 우리 인생에 완전히 새로운 방향을 부여함으로써 우리 인생을 그들이 있기 전과 후로 확연히 나누어 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저 멍청한 히피들은 종교가 명상이나 구도 등에 바탕을 둔 개인적인 행위라고 확신하고 있어. 종교는 오히려 계약과 전례(典禮)와 규범과 예식에 바탕을 둔 순전히 사회적인 행위인데, 그걸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거지. 오귀스트 콩트의 말에 따르면, 종교의 역할은 딱 하나야. 인류를 완벽한 통일 상태로 이끌어 가는 것이지.」
어떤 사람들을 몇 년 동안, 때로는 몇 십 년 동안 자주 만나다 보면, 개인적인 문제나 정말 중요한 화제를 회피하는 것이 서서히 버릇처럼 되어 간다. 그러면서도 언젠가 더 좋은 기회가 오면 그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어떤 종교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그 종교를 바탕으로 형성될 수 있는 도덕의 성격이다.>
물론 그리스도조차도 윤리의 보편적인 기준에 따라 심판되어야 한다는 칸트의 주장은 옳아. 하지만 나는 종교란 다른 무엇이기에 앞서 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시도라고 생각하게 되었어.
「굉장한 생각이야……. 인생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아이를 낳겠다니, 정말 굉장해.」
사정하기 직전에 그는 생식 세포들이 결합하고 곧이어 최초의 세포 분열이 일어나는 장면을 머릿속에 그렸다. 앞으로 도피하기, 혹은 작은 자살의 뜻이 담긴 아주 또렷한 이미지였다. 의식의 파동 하나가 그의 성기를 따라 거슬러 올라왔다. 그는 정액이 몸 밖으로 분출하는 것을 느꼈다. 아나벨도 그것을 느끼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강둑의 풀은 햇살을 받아 거의 하얗게 보였다. 너도밤나무들의 가지 아래로 짙은 녹색 강물이 남실거리며 끝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외부 세계에는 그 나름의 법칙들이 있다. 그 법칙들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인생은 고약한 장난, 용서할 수 없는 농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용서할 수 있든 없든 그녀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게 인생이었다.
그런 결혼이 행복할 리 없다(행복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가져다 주는 융합적이고 퇴행적인 상태에 빠질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요모조모 따지며 실리를 챙기는 사람은 이런 상태에 빠질 수 없다).
우리는 인간의 형상으로는
별로 사랑하지 않았어.
아마도 태양과 우리 무덤에 내리는 비가,
바람과 서리가
우리의 고통에 종지부를 찍어 주겠지.
강철과 콘크리트로 된 하얀 건물, 할머니가 돌아가셨던 바로 그 장소에서, 제르진스키는 다시금 무(無)의 힘을 느꼈다.
그는 일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갑자기 몇 줄기 빛살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자기가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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