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 2006

 

 

 

 

 

 

당신 눈동자 속의 물

 

                        김혜순

 

 

내가 아침에 일어나 슬픈 노래를 부르면

컵의 물도 슬퍼지고 변기의 물도 슬퍼지고

꽃 대궁 속으로 쿨럭거리며 올라가던 꽃병의 물도 슬퍼지고

목구멍 속에 물을 가득 품은 채 참고 있는

수도꼭지 속의 물도 슬퍼지고

 

창밖으로 날아가는 새들을 보고 날아오른다고

하지 마라 그건 내가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한없이 떨어지고만 있는 것이니

천공(天空) 만공(滿空)에 떨어질 줄밖에 모르는 대지를 타고 가는 것이니

 

흐르는 물은 흐르면서 몸을 씻지만

이렇게 슬픈 노래는 내 몸에 고여서

흘러나가지도 못하네 배수구 마개가 울고

그 아래 파이프가 우네

 

나는 흘러가려고 태어난 몸

흘러가 당신 몸속의 물이 되려고 태어난 몸

지평선 없어도 좋다 딛고 설 땅이 없어도 좋다

나는 오직 가기만 하면 돼

나는 당신 몸 깊은 곳에서 쉬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고

속삭이지도 않고 당신 눈동자 속의 물처럼

물끄러미 있으려고 태어난 몸

 

이 슬픈 노래는 어디서 흘러왔는가

내 썩는 몸 위로 왜 자꾸 오는가 어느 곳에 숨었다가

내 컵의 물을, 내 꽃병의 물을 울리는가

한강 고수부지에 물 가득 차올라

도로 표지판 하나 보이지 않고

그 아래, 그 강바닥 깊은 아래

땅속 동굴을 흐르는 차가운 물소리

 

천장이 흔들리고 기둥이 습기에 젖어들고

솥들이 녹스네 두 눈을 크게 뜨고 앞가슴을 내밀고

숨을 참고 나가야지 썩지 않으려면

나프탈렌이라도 먹어둬야 할까

열쇠를 찾아 이곳을 나가야지

 

 

 

 

 

 

 

 

트레인 스포팅

 

                       김혜순

 

 

통리역에 서 있으니

아무도 타지 않고 아무도 내리지 않는 간이역에

춤추는 빨간 구두 벗겨지지 않아 기찻길에 달겨들

이제는 은퇴한 그 여배우가 된 기분이다

 

급행열차가 지나갈 시간이면

파랑주의보에 떠는 고깃배처럼 간이역엔 소름이 돋고

석탄을 가득 뱉은 산들마저 진땀을 흘렸다

 

간이역도 말을 한다는 거

열이 나서 땀 흘리며 잠에서 깬다는 거

깊은 밤 철교 위로 산책도 한다는 거

어두운 나무 밑에 스러져 울기도 한다는 거

술집 구석자리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척한다는 거

전화를 해도 받지 않을 때가 있다는 거

맥주를 마실 땐 목을 젖히고 발 받침대에 발을 올린다는 거

약 먹고 죽으려 하면서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는 거

 

제 결혼역에 내려주실래요?

아니면 해마다 생일역에 안부라도

그것도 싫으시다면 내 장례역에라도 참석해주실 수 있을는지

여기서도 휴대폰은 쉴 새 없이 울리고

 

수백만 마리의 곤충 떼가 한꺼번에 지나가는 소리로 급행열차 또 지나가고

자고가고 울고가고 커피마시고가고 술마시고가고

심지어는 아기 버리는 미혼모처럼 기차 몇 량을 버리고 가고

그러다 같이 가! 부르면 아무도 돌아서지 않는다는 거

 

서랍이 많은 티켓 박스 속에서

서울로 강릉으로 가는 표들은 누렇게 녹슬어 있고

한 통의 편지도 오지 않지만 우편함은 매달려 있고

나는 또 무한정 키가 커버린 첼로처럼 푸르르 떨며 철길을 내다보고

화물기차가 내 늘어진 현을 당겼다 놓고 가버리면

내 얼굴엔 찬 별이 떠서 얼굴이 저려온다는 거

다시는 아무도 내게 머물게 하지 않으리

나는 쇠줄 두른 손목시계의 나사를 하나하나 풀 듯

숱한 그림자 타다 만 시체처럼 누워 있는

기찻길의 침목을 하나하나 눈동자 속으로 삼킨다는 거

 

 

 

 

 

 

 

 

 

 

대화(對話)

 

                나희덕

 

무당벌레와 나밖에 없다

추위를 피해 이 방에 숨어들기는 마찬가지다

 

방바닥을 하염없이 기어가다가

무료한 듯 몸을 뒤집고 버둥거리다가

펼쳐놓은 책갈피 위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갑자기 기억이라도 난 듯

뒤꽁무니에서 날개를 꺼내 위이잉 털기도 한다

 

작은 전기톱날처럼

마음 어딘가를 베고 가는 날개 소리,

창으로 든 겨울 햇살이 점박이 등을 비추고

그 등을 바라보는 눈가를 비추면

 

내 속의 자벌레가

네 속의 무당벌레에게 말을 건넨다

조금은 벌레인 우리가

주고받을 수 있는 대화는 어떤 것일까

 

냄새를 피우거나

서로의 주위를 맴돌며 붕붕거리는 것?

함께 뒤집혀 버둥거리는 것?

암술과 수술을 드나들며

꽃가루를 헛되이 일으키는 것?

 

어느 구석진 창틀에서 말라가기 전까지

조금은 벌레인 우리가

나눌 수 있는 온기는 어떤 것일까

 

노루꼬리처럼 짧은 겨울 햇살 한 줌

 

 

 

 

 

 

 

손바닥이 울리는 것은

 

                  나희덕

 

 

길에 거꾸로 처박힌 전봇대,

전선 몇 가닥이 헛뿌리처럼 드러나 있다

 

물과 양분 대신 전류를 실어 나르던

저 잿빛 나무는

서 있는 일에 얼마나 몰두했던지

곁가지 하나 내지 않고 제 생()을 다했다

 

종일 비가 내리고

처박힌 전봇대에 아직 전류가 흐르는지

손바닥이 징- - 울린다

 

네 비참(悲慘)보다도

네 비참을 바라보는 나의 비참(悲慘)을 견딜 수 없어

내리친 것이 너의 뺨이었다니!

 

손바닥이 울리는 것은

처박힌 전봇대 때문이 아니라

빗줄기 때문이 아니라

서 있는 일에만 몰두했던 나의 수직성 때문

 

그러나 저 잿빛 나무처럼

내가 실어 나르던 것은 사랑이 아니었으니!

 

 

 

 

 

 

 

 

 

독거(獨居)

 

               이문재

 

강 건너가 건너온다

누가 끌배를 끌고 있다

물안개의 끝이 물을 떠난다

봄이 봄의 안쪽으로 들어선다

나무 타는 단내가 봄볕으로 뛰어든다

내륙이 온통 환해지고 있다

황급히 속옷을 챙겨 입던

간밤 꿈이 생생하다

결국 내가 홀로서지 못해

내가 홀로 있는 것이다

냉이 씻어 고추장에 버무린다

물길 따라 달려가던 능선들이

문득 눈을 맞추며 멈춰 선 곳이다

바람결에 아라리를 배우는 곳이다

끌배가 끊어진 길을 싣고 있다

강의 이쪽을 끌며 건너오고 있다

외로워서 양치질을 자주 했다는

스님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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