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섬의 가능성, 미셸 우엘벡, 열린책들, 2007(초판 1쇄)
개를 키워서 좋은 점은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가능하다는 데에 있다.
<질 주변에 있는 비계를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아니.>
<여자.>
사람들은 죽음을 맞는 정황에 대해서는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다고 느낀다. 그건 확실하다. 그렇다면 세상에 태어나게 된 정황에 대해서는? 그것에 대해서도 책임감을 느낄까?
일반적으로 여자들에게는 유머가 부족하다. 그래서 그들은 유머를 남성적 자질의 하나로 여긴다.
아니, 그들을 기다리는 건 성숙이 아니라 노쇠였다. 길 끝에 있는 건 새로운 개화가 아니라, 처음에는 극히 미미했다가 곧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변해 버리고 마는 한 무더기의 욕구불만과 고통이었다. 그 모든 건 그리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다. 삶은 나이 50에 시작된다. 그건 맞다. 삶이 나이 마흔에 끝난다는 것만 빼놓고.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남자에게 불알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기만 하면 돼요. 남자에게 연장이 있다는 건 다들 알아요. 지나칠 정도로 잘. 남자들이 성적 대상이 되어 버린 이후로 여자들은 말 그대로 그들의 연장에 사로잡혀 있어요. 하지만 사랑을 나눌 때는 십중팔구 불알이 민감한 부위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죠. 자위든, 삽입이든, 오럴이든, 가끔씩 남자의 불알을 만져 줘야 해요. 스치듯 어루만지느냐 아니면 세게 압박하느냐는 불알의 딱딱한 정도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어요. 그게 다예요.」
그는 『롤리타』로 그 반대 현상을 노리고 있었지. <우리 표적은 열 살부터 시작돼……. 하지만 나이 상한선은 없어.> 그는 엄마들이 점점 더 딸들을 모방하려 들 거라는 데 승부를 걸었어.
삶은 사람을 비천하게 만든다고 앙리 드 레니에는 말했다. 무엇보다 삶은 사람을 마멸시킨다. 물론 몇몇 사람에게는 비천해지지 않는 핵이, 존재의 핵이 남기도 한다. 하지만 몸의 전반적인 마멸 앞에서 그 찌꺼기가 무슨 무게를 가지겠는가?
…<마리아의 보지에 붙은 사면바리>라는 재미있는 별명으로 불린 레바논 기독교인들을 무대에 올렸다.
인간이 웃는 것은, 인간이 동물계에서 안면의 끔찍한 변형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유일한 존재인 것은, 인간이 동물 본래의 이기주의를 넘어 <잔인성>의 최고 단계, 지옥의 단계에 도달한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결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한 익명의 작가가 어딘가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인류에 대한 당신의 마지막 환상을 떨쳐 버리고 싶다면, 빠른 시일 내에 거액을 벌어 보라. 그러면 당신은 그들, 위선적인 독수리들이 당신을 향해 몰려오는 걸 보게 될 것이다. 깨우침을 얻기 위해서는 그 거액을 <직접 버는> 것이 중요하다.
금기가 있는 것은 실제로 <문제>가 있기 때문이었다.
욕망을 견딜 수 없는 지경으로 끌어올리는 동시에 그것의 해소를 점점 더 어렵게 만드는 것, 서구 사회를 지탱시켜 주는 유일한 원칙은 그런 것이었다.
<자기 너머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쇼펜하우어는 지적 수준이 너무 다른 두 개인 사이에는 생각의 교환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이렇게 썼다.
가장 충격적인 이미지를 보여 준 것은 아마 극도로 간결하게 <늙은 몸에 젊은 욕망을 가득 담고 있다>고 자신을 묘사한 브뤼노1일 것이다.
부자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사는 걸 좋아한다. 그건 확실하다. 그래야 마음이 놓인다고나 할까.
『여학생을 위한 예절 교과서』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관계를 맺는 게 그리 쉽질 않은 것 같아…….」 내 생각을 짐작이라도 한 듯 그가 말했다. 「외출을 할 기회도, 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지지. 게다가 의례적으로 해야 하는 것들, 밟아야 하는 절차들…… 장보기, 청소, 해야 할 게 너무 많아. 건강을 챙기는 데, 몸을 정상 작동 상태에 가깝게 유지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게 돼.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삶은 무엇보다 행정적인 것으로 변하고 말아.」
나에게 쇼 비즈니스, 미디어 플래닝, 미시사회학에 대해 말한 사람은 많았지만 <예술>에 대해 말한 사람은 없었다. 나는 전혀 새로운 것, 아마 치명적으로 위험한 것을 보게 되리라는, 약간은 사랑의 경우처럼 얻을 것은 거의 없는 반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분야에 발을 들여놓고 있다는 예감에 사로잡혔다.
생존의 정서적 한계에 도달해 있는 그의 상황에서 물질적 문제들은 제한적인 무게밖에 가질 수 없다는 것이 명백했다.
「예술가를 두 개의 범주, 즉 혁명가와 장식가로 나누는 유명한 말이 있어…」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며 우리는 실론 승려들이 남긴 텍스트에 따르면 소송 불교 승려들이 추구했던 것으로 보이는 정신 상태에 도달했다. 소멸되는 순간 우리의 삶은 <입김으로 훅 불어 끄는 촛불과 같다>.
인생의 첫 번째 시기에 우리는 행복을 잃은 다음에야 그것을 깨닫는다. 이어 다른 시기, 행복을 느끼기 시작하는 순간에 이미 결국 그것을 잃게 되리라는 것을 아는 두 번째 시기가 온다.
벌레들이 벽들 사이를 오가며 부딪친다.
최악의 반복 외에는
어떠한 메시지도 담고 있지 않은
그 진절머리 나는 비행에 갇혀.
사랑은 사람을 약하게 만든다. 둘 중 약한 사람이 억압받고 고문당하다가 결국은 죽임을 당하고 만다.
우리는 개들을 통해 사랑에, 그 가능성에 경의를 표한다. <사랑하는 기계>가 아니라면 개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개에게 인간 존재를 제시하고 그를 사랑하라는 임무를 부여하면, 아무리 보기 흉하고, 사악하고, 기형적이고, 멍청해도 개는 그를 사랑한다.
예쁜 아가씨들 대부분이 그렇듯, 그녀는 자주 병치레를 했고, 입이 까다로운 편이었다.
남자의 성생활은 대개 두 시기로 나뉜다. 너무 일찍 사정하는 첫 번째 시기와 발기가 안 되는 두 번째 시기.
대부분의 배우들은 명성 때문에 사랑받는 걸 별 문제 없이, 명성도 그들 자신, 그들의 진정한 개성, 어쨌거나 그들이 선택한 개성에 속하기 때문에,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현대인은 스와핑 애호가, 양성애자, 성도착자, 동물성애자, SM, 뭐든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늙은이>가 되는 것만은 금기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몸들이니까. 우리는 우선, 주로, 그리고 오로지 몸들이니까.
성적 본능이 사라지는 건 삶의 알짜배기 핵이 모두 타버린 걸 뜻한다고 쇼펜하우어는 쓰고 있다. 끔찍할 정도로 격렬한 메타포를 통해 그는 지적한다 <인간의 삶은 살아 있는 배우들의 연기로 시작되어 같은 복장을 한 자동인형들의 연기로 끝나는 연극 공연과 흡사하다.>
만약 바다가 붉은색이었다면, 아마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다는 여전히, 절망적으로 푸르렀다.
「…인간의 개성, 즉 우리의 개인성과 기억을 구성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뉴런 하부 조직망과 연결 시냅스의 화학적 활성화와 확대를 통해 서서히 형성됩니다. 한마디로 말해 개인의 역사가 개인을 창조하는 겁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기독교도, 이슬람 교도 혹은 유대 교도와 토론을 벌일 때면 늘 그들의 신앙을 어느 정도 <이차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그들이 제시된 교리의 실재성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본래의 의미로 믿는 것이 아니라, 약간은 음악이나 게임 애호가들에게 그런지 음악이나 「둠 제너레이션」이 그런 것처럼, 신자들의 공동체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인식 기호, 일종의 패스워드로 여긴다는 느낌을 받았다.
체스 기사나 롤플레잉 게임에 몰입한 참가자에게 게임의 가상공간은 모든 점에서 심각하고 실제적인 어떤 것이다. 심지어 그에게는, 적어도 게임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는 수영복과 수건을 집고는 아무 말 없이 두 모래 둔덕 사이에 가 앉았다. 그는 그곳에서 하루를 보내야만 한다면 기꺼이 그럴 각오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랩 비디오 클립에 우연히 끼어든 사무엘 베케트처럼 그 해변의 소란 속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가 프랑스어로 말을 이었다. 「알겠나, 다니엘.」 놀랍게도 그는 슬픔을 꾸밈없이 드러냈다. 「인류의 유일한 계획은 번식을 해 종을 지속시키는 거라네. 정말 하찮은 목표지만 그래도 인류는 죽어라고 그것을 추구하지.」
내 나이가 되면 정자의 생산이 더디게 이루어진다. 반응 기간은 점점 더 길어질 것이고, 생명의 제안들은 점점 드물어졌다가 완전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 그리스도가 3일 만에 부활했을 때 최초의 신도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믿지 않았어. 그들은 그들 자신을 그러한 것으로 정의했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자들로 말이야.」
나는 나도 따라가고 싶다고, 거기서 같이 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할 뻔 했다. 하지만 그 말은 내뱉어지기 전에 내 안에서 죽어 버렸다.
니체에게 동정이 그렇듯, 사랑은 분명 약자들이 강자들에게 죄책감을 심어 주기 우해, 그들의 천성적인 자유와 잔혹함에 한계를 두기 위해 지어낸 허구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어두운 방들처럼 인접해 있는 내면의 영역들을 힘겹게 방황하고 있었다.
「… 오사카에서는 한 신도가 자신의 시신을 으깨 지름 20센티미터의 구체가 될 때까지 공업용 압축기로 압축한 다음, 투명한 실리콘 필름을 입혀 볼링 시합에 사용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생전에 볼링 애호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
한마디로 말해, 우리는 완벽한 평온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인 무관심의 자유에 도달해야만 한다.
<집 짓는 사람들이 골라내 버린 돌멩이…….> 나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나는 뱅상에게 질투도 부러움도 느끼지 않았다.
<실상 인간은 혼자 태어나, 혼자 살다가, 혼자 죽는다.>
<자위, 그것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누군가와 섹스를 하는 것이다.>
<사랑>에도 더는 기대를 걸지 말아야 했다. 나는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 내 세대 마지막 남자들 중 하나였다.
그녀에게 나는 지나간 이야기였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나 자신에게도 지나간 이야기였다.
이제 나는 내가 사랑을 경험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고통을 경험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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