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인디언의 방식으로 세상을 사는 법), 류시화, 김영사, 2003(12)

 

 

 

 

 

 

 

 

 

 

 

 봄에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조심조심 걸으라. 어머니 대지가 아이를 배고 있으니까.

 

 

 

 땅을 개인 소유로 못박고 주인 혼자서만 사용해야 한다는 유럽 인들의 관념을 인디언들은 아무리 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백인들 역시 땅은 모두가 함께 사용해야 한다는 인디언들의 철학을 이해하지 못했다.

 

 

 

 마침내 존 메이슨 대장이 이끄는 청교도들이 갑자기 신비주의자의 강(미스틱 러버)이라고 이름붙은 샛강 하구에 사는 피쿼트 족 마을을 공격했다. 그들은 마을에 불을 지르고, 불길을 피해 달아나는 마을 주민 7백 명 대부분을 학살했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공격의 대열에 참가했던 코튼 매더 목사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인디언들은 불에 구워졌으며, 흐르는 피의 강물이 마침내 그 불길을 껐다. 고약한 냄새가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그 승리는 달콤한 희생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찬양하는 기도를 올렸다.

 

 

 

 인디언들이 전투하러 나갈 때 완전한 복장을 갖추는 것은 전투를 더 잘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신에게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내 상황의 주인이다.

 

 

 

 서부 개척의 산 증인이었던 화가 프레데릭 레밍턴은 말했다.

 늙은 인디언들과 만남을 갖다 보면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위엄 때문에 마치 한겨울의 숲 속을 산책하는 기분이 들곤 한다.

 

 

 

 우리 얼굴 붉은 사람들의 종교를 얼굴 흰 사람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인디언들은 이런 심오한 문제에 대해선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말보다는 믿음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 속에는 인디언들의 사상과 매우 비슷한 것들이 많다. 부와 부자들에 대해 예수가 한 말들은 특히 우리 인디언들이 충분히 공감하는 내용들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많은 설교를 늘어놓으면서 한편으로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는 선교사들과 그 신도들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의 종교에 대해 냉담한 마음을 갖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자신을 과시하고, 권력을 추구하며, 무조건 남을 개종시키려 들고, 자기 종교를 제외하고는 다른 종교를 드러내 놓고 무시한다.

 우리가 보기엔 직업적인 목사들, 돈을 받고 하는 설교, 물질을 모으기에 급급한 교회들은 영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인디언 아이들은 문명 세계의 아이들이 법률가나 대통령이 되기를 희망하듯이 용기 있는 인간이 되기를 희망했다.

 

 

 

 정말로 얼굴 흰 사람들의 철학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은 자부심과 위엄을 간직한 채 수세기 동안 서 있어 온 숲들을 넘어뜨리고, 어머니 대지의 가슴을 마구 파헤치며, 은빛 물줄기들을 더러운 시궁창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신의 그림들과 걸작품들을 가차없이 파괴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작은 사각의 종이에 수많은 물감을 발라 그것을 걸작품이라 찬양한다!

 

 

 

 나는 그 예수라는 사람이 인디언이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물질을 손에 넣는 것, 나아가 많은 소유물을 갖는 것에 반대했다. 그리고 평화에 이끌렸다. 그는 인디언들과 마찬가지로 계산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사랑으로 일한 것에 대해 아무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얼굴 흰 사람들의 문명은 그런 원리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 인디언들은 예수가 말한 그 단순한 원리들을 늘 지키며 살아 왔다. 그가 인디언이 아니라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인디언들은 그리스도교 자체에 대해선 비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의 가르침과 인디언들의 사상이 일치한다고 여겼다. 그들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설교와는 정반대로 행동하는 선교사들과 그 신도들의 위선적인 행동이었다.

 

 

 

 난 무엇을 믿어야 할 지 모르겠다. 몇 해 전, 선하게 생긴 백인 하나가 우리를 찾아왔다. 그는 내게 낡은 믿음을 버리라고 설득했다. 나 같은 무지한 인디언보다 그가 그 문제에 대해 더 잘 아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나는 그의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감리교 신자가 되었다. 얼마 후 그는 다른 곳으로 가버리고, 다른 백인이 와서 설득하는 바람에 나는 침례교인이 되었다. 그러다가 또다른 백인이 와서 설교를 했고, 나는 장로교인이 되었다. 이번에는 또다른 사람이 와서 나더러 성공회 신자가 되라고 설득하고 있다.

 

 

 

 50년 전만 해도 미국 교과서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베링 해협을 건너온 것은 불과 2천 년 전이라고 가르쳤다.인디언들의 장구한 역사를 무시하고, 그 대륙에 조금 늦게 도착한 유럽 인들과 별 차이가 없는 이주민임을 강조하려는 의도였다.

오늘날 고고학자들은 인디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등장한 것은 약 4만 년 전의 일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그 연대는 계속해서 바뀌고 있는 중이다.

 

 

 

 당신들은 겉으로는 위대한 장군이고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지만, 사실은 날품팔이 일꾼이고 하인이며 시종이고 노예들에 불과하다.

 

 

 

 다른 대륙의 원주민들 역시 얼굴 흰 문명인들에 의해 오염되기 전까지는 인디언들과 마찬가지의 가치관을 지니고 있었다. 한 예로 히말라야의 작은 왕국 부탄에서는 원하다라는 단어와 필요하다라는 단어가 같다. 어떤 것을 원한다면,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필요하지도 않는데 원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이다.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이 동의어인 세상, 그것이 다름아닌 인디언들의 세상이었다.

 

 

 

 인디언들은 가난한 삶을 가장 기품있는 삶으로 여겼으며, 조금도 그것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유를 주장하는 삶이 인디언들에게는 하나의 수치였다.

 

 

 

 그대의 가슴속에 죽음이 들어올 수 없는 삶을 살라. 다른 사람의 종교에 대해 논쟁하지 말고, 그들의 시각을 존중하라. 그리고 그들 역시 그대의 시각을 존중하게 하라.

 

 

 

  엘라웨어 족 전사 파치간칠힐라스가 모라비아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로 개종한 인디언들에게 한 경고, 이 연설이 있은 후 정확히 11개월 뒤, 연설이 행해진 그 자리에서 그 인디언 기독교인 96명이 백인들에 의해 전부 학살당했다. 그 중 60명이 여자와 아이들이었다.

 

 

 

 자기가 걸어다니는 땅을 팔아먹을 미친 인디언은 세상에 없다.

 

 

 

 술 파는 자들과 장사꾼들로부터 단호하게 등을 돌리라. 그리고 예수를 파는 선교사들의 말에도 절대 귀 기울이지 말라.

 

 

 

 그들 사회에는 거짓, 허위, 배신, 탐욕, 시기, 욕설을 의미하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백인들의 총과 칼과 십자가에 희생된 인디언 숫자보다 그들이 옮긴 병 때문에 목숨을 잃은 인디언의 수가 훨씬 많다. 대개는 얼굴 흰 자들과의 일시적인 접촉만으로도 인디언 부족 전체에 물결처럼 죽음의 경련이 퍼져 나갔다. 말하자면 악수에 의한 대량학살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것을 콜럼부스의 악수라고 부른다.

 

 

 

 히스파니올라 섬(하이티와 도미니카 섬)의 추장 하투아이 역시 가족들을 데리고 쿠바로 피신하다가 스페인 병사들에게 붙잡혔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를 거부했다는 로 그는 화형에 처해졌다. 화형대 위에 섰을 때 그에게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다. 프란치스코 교단의 사제가 그에게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하면 영생을 보장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져 온갖 고문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사제는 대답을 기다렸다.

 하투아이는 차분한 어조로 그럼 천국에도 스페인 사람들이 있는가? 하고 물었다. 사제가 물론 그렇다고 대답하자, 하투아이는 말했다. 그 잔인무도한 종족이 한 명이라도 살고 있는 곳에는 난 결코 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는 기꺼이 화형대의 연기로 사라졌다.

 

 

 

 영국 관리들은 인디언 부족들에게 천연두균이 묻은 담요들을 의도적으로 배급했다. 그 결과 밍고 족, 델라웨어 족, 쇼니 족과 오하이오 강 연안의 또다른 인디언 백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미국 정부의 병사들도 평원 인디언들에게 똑 같은 방법을 사용해 비슷한 성공을 거뒀다. 천연두는 1616년 뉴잉글랜드 해안에 거주하는 거의 모든 인디언들을 전멸시켰고, 1837년에는 평원 인디언들을 강타했다.

 포와탄 족이 천연두에 걸려 거의 전멸 위기에 놓이자 플리머스 식민지의 통치자 윌리엄 브랫포드는 원주민들을 천연두로 쓰러뜨림으로써 하느님은 우리가 소유한 것의 정당성을 인정하셨다.고 말했다. 백인 이주자들은 자신들이 들여온 전염병으로 원주민들이 죽어가는 것을 비극으로 여기기보다는 하느님이 정한 운명으로 여겼다.

 

 

 

 라코타 족 아이들은 공부를 잘했다고 보상을 하거나 메달을 목에 걸어 주는 일이 없었다. 최선을 다하라고 물질로 격려하거나 상을 주는 법도 없었다. 누구도 아이에게 이것을 잘하면 상을 주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어떤 것을 잘 해내는 것 자체가 큰 보상이며, 물질로 그것을 대신하려는 것은 아이의 마음속에 불건전한 생각을 심어 주는 일에 다름아니다.

 

 

 

 인디언들이 유익하다고 여긴 풀들도 그들에게는 잡초일 뿐이었다. 라코타 족으 언어에는 그런 의미를 가진 단어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인디언들이 결코 한 적이 없는 일 중 하나가 동물의 몸에 쇠붙이로 낙인을 찍는 일이다. 얼굴 흰 사람들은 자기의 소유라는 걸 밝히기 위해 그렇게 한다. 처음으로 낙인 찍는 광경을 보았을 때 우리 인디언들은 역겨움을 참을 수 없었다.

 

 

 

  그 인류학자는 약간 성질이 급한 사람이었다. 그는 말했다.

 당신 부족들이 부르는 노래는 온통 물에 대한 것뿐인가요?

그러자 그 인디언 노인이 말했다.

 그렇소, 우리는 수천 년에 걸쳐 이곳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웠소.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물이기 때문에 우리의 노래는 물에 대한 것일 수밖에 없소. 그런데 당신들 미국인들의 음악을 들으면 전부 사랑 노래뿐이오. 그건 왜 그렇소? 당신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사랑이기 때문이 아니오?

 

 

 

 그들은 계절에 맞지도 않는 곡식들을 생산하라고 땅을 윽박지르며, 땅이 힘을 잃었는데도 계속해서 약을 뿌리며 생산을 강요한다. 이 얼마나 벌 받을 짓들인가.

 

 

 

 바람이 자유롭게 불고 아무것도 햇빛 줄기를 부러뜨리지 않는 그곳 평원에서 나는 태어났다…”

 

 

 

 그 이누이트 족이 선교사에게 물었다.

 만일 내가 하느님과 원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면 난 지옥에 가는가?

 선교사가 말했다.

 꼭 그런 건 아니다.

 그러자 그 이누이트 족이 진지하게 물었다.

 그럼 대체 왜 나한테 그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는가?

 

 

 

 남자는 꿈을 갖고 있지만, 여자는 아이를 갖고 있다.

 

 

 

 나는 늙은 에스키모 여인들이 옷을 다 벗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눈 속으로 걸어나가 얼어죽은 이야기를 듣곤 했다. 겨울에는 먹을 것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들은 먹을 입을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 그렇게 자신을 희생했던 것이다.

 

 

 

 비를 유난히도 좋아한 어느 인디언은 빗속을 달려(러닝 인더 레인)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고, 그는 늘 비만 오면 소리를 지르며 평원을 내달리곤 했다. 그래서 우리는 천막 안에 앉아서도 그 비명소리를 듣고 밖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름이 그러하듯, 사람은 저마다 영혼을 갖고 있으며 그 삶의 길 역시 각자 다르다는 것이 인디언들의 믿음이다. 당신들은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똑 같은 길을 걸으라고 하고, 똑 같은 기도문을 외라고 한다. 당신들의 교회에 가보면 그걸 알 수 있다. 당신들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 준 똑 같은 기도문을 왼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저마다 영적인 길이 따로 있기 때문에 각자 자신의 기도를 말한다. 스스로 자신의 기도문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평화롭게 살아가던 인디언들에게는 침략자, 살인마와 같은 단어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백인 군대를 핏발 선 곰에 비유해 요세미티!하고 외쳤던 것이다.

 

 

 

 오늘 나는 나의 집으로 돌아간다. 우리 부족이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당신들이 보내 주기를 나는 희망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보내진 말라. 어떻게 된 것이 당신들은 온통 가난한 사람들만 우리에게 보내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를 보자마자 자신들의 주머니를 채울 생각만 한다.

 

 

 

 당신들은 스스로를 그리스도교인이라 부르는가? 그렇다면 당신들이 구세주라고 부르는 그 사람이 당신들의 정신에 영감을 주고 당신들의 삶을 인도하는가? 내가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기록에 의하면 그 사람은 상한 갈대 하나 꺾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당신들 자신을 그리스도교인이라고 부르지 말라. 당신들의 위선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몰라도. 또한 다른 나라 사람들을 더 이상 야만인이라고 부르지 말라. 당신들은 열 배나 더 잔인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공해의 원인은 원래 인간의 마음에 있다.

 

 

 

 꽃 향기를 맡으면 그 영혼이 올 거요.

 

 

 

 우리의 어린 자식들을 백인들 학교에 보냈더니, 영어로 이야기하면서 돌아왔다. 그런데 서로에게 욕을 해대는 것이었다. 인디언의 언어에는 욕설이 없다.

 

 

 

 내가 흘린 눈물만 모아도 가뭄은 없다.

 

 

 

 두려워할 때 당신은 그것을 죽이게 된다.

 

 

 

 미국의 달러 지폐에는 우리는 하느님을 신뢰한다 IN GOD WE TRUST라고 적혀 있다. 인디언들은 그것에 대해 실수로 한 글자가 빠진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황금을 신뢰한다 IN GOLD WE TRUST라고 고쳐야 백인들의 정신에 어울린다는 것이다.

 

 

 

 이들 부족들은 자신들이 사는 아메리카 대륙을 아베나키어로 느다키나라고 불렀다. 그것은 우리의 땅이라는 뜻이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소유한 땅이 아니라 우리를 소유하고 있는 땅이란 뜻이다.

 

 

 

 인간이 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발언은 옳지 않다. 인간뿐만 아니라 사슴과 곰, 독수리, 물고기 모두가 똑같이 신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다.

 

 

 

 1638년 처음으로 청교도들에 의해 코네티컷 주 새로운 천국(뉴헤븐)에 인디언 보호 구역이 생겨난 이래 1890년 운디드니 대학살을 끝으로 북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 부족들은 모두 농사조차 지을 수 없는 황폐한 땅에 위치한 집단 수용 시설 안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민주주의는 같음이 아니라 다름을 의미한다. 우리가 당신들의 특성을 인정하듯이 당신들도 우리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영적으로 빈곤하다고 느끼는 백인들이 많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인 스승을 찾아 전세계로 돌아다닌다. 그러자 인디언을 닮고 싶어하는 사이비 명상가들이 생겨나 샤머니즘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을 샤머니즘이 아니라 쇼머니즘이라고 부른다.

 

 

 

 최근 캐나다 장로교 협회는 위니펙 정기 총회에서 <우리의 고백>이라는, 인디언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선언문을 채택했다. 다음은 그 선언문의 전문이다.

 성경을 통해 성경 속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부름을 받아 캐나다 장로 교회는 고백한다. 이 고백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이다. 우리는 원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우리의 선교 활동과 성직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1.       우리 120차 캐나다 장로교 전체 회의는 하느님의 영이 우리를 안내하기를 간절히 원하며, 우리 자신이 지은 죄와 잘못들에 대해 인정하면서 우리가 사랑하는 교회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의 과거를 새롭게 이해했기 때문이지, 우리 자신이 우리보다 앞선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보다 더 우월하거나 우리라면 같은 상황에서 다르게 행동했으리라고 여기기 때문이 아니다.

2.       우리는 캐나다 정부의 공인된 정책이 원주민들을 백인들의 문화에 강제로 동화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며, 캐나다 장로 교회가 그 정책에 협조했음을 인정한다. 우리가 원주민들에게 끼친 피해의 근원은 서구유럽 인들이 가진 식민주의 정책의 자세와 가치관에 있었으며, 우리의 모습대로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발견해서 무조건 착취해야 한다는 가정에 있었음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 정책의 일부로서 우리는 다른 교회들과 함께 정부가 원주민들이 창조주 하느님 앞에서 경험했던 몇 가지 중요한 영적인 의식들을 추방하는 데 힘을 보냈다. 그 정책에 교회가 공범이 된 것에 대해 우리는 용서를 구한다.

3.       우리는 캐나다 장로 교회 안에 선한 믿음을 갖고 자신들의 원주민 형제들과 누이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갖고 있던 많은 회원들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그들의 헌신을 인정하며 그들이 한 일에 찬사를 보낸다. 예언자적인 통찰력을 갖고, 이 땅에서 행해지고 있는 파괴력을 자각하고 항의했던 몇몇 사람들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좌절되었다. 우리는 그들의 통찰력을 인정한다. 그들을 적절히 지원하지도 않았고 정의를 외치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은 것에 대해 우리는 용서를 구한다.

4.       우리는 캐나다 장로 교회가 삶에 무엇이 필요한가를 원주민들보다 더 잘 안다고 가정했음을 고백한다. 교회는 우리의 원주민 형제 자매들에 대해 말했다. 만일 그들이 우리처럼 될 수 있다면, 만일 그들이 우리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예배드리고, 노래하고, 일할 수 있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아는 것처럼 그들도 하느님을 알 것이고, 그들의 삶도 풍요로워질 것이다. 우리의 문화에 대한 이러한 오만함 때문에 우리는 복음서에 대한 우리 자신의 이해가 문화적으로 조건지워진 것임을 알지 못했으며, 나아가 토착 문화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우리는 복음서가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주민들에게 요구했다. 그럼으로써 자비롭고 고통스런 사랑으로 자신을 통해 모든 사람이 하느님에게로 올 수 있도록 모든 인간을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잘못 소개했다. 교회가 그렇게 추정한 것에 대해 우리는 용서를 구한다.

5.       캐나다 정부를 격려하고 도와주고자 캐나다 장로 교회는 원주민 아이들을 그들의 집과 고향에서 강제로 데려와 기숙사 학교에 집어넣은 것을 인정한다. 그 학교들에서 아이들은 전통적인 방식을 박탈당했으며, 그것들은 동화의 과정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유럽의 문화로 대체되었다. 그 과정을 수행하기 위해 캐나다 장로 교회는 원주민들에게 낯선 규칙과 훈련을 적용시켰으며, 보살핌과 규율에 대해 기독교적인 원칙을 뛰어넘어 신체적이고 심리적인 처벌을 가하고 공개적으로 탄압했다. 복종과 묵인의 분위기 속에서 성적으로 학대할 기화가 있었으며, 몇몇 아이들은 실제로 성적 학대를 당했다. 이 모든 것의 영향으로 원주민들은 문화적인 정체성을 상실하고, 자신에 대한 안전한 확신을 잃었다. 교회의 그러한 무감각에 대해 우리는 용서를 구한다.

6.       우리는 캐나다 장로 교회의 선교 활동과 목사들에 의해 삶에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참회한다. 교회를 대신해 우리는 하느님의 용서를 구한다. 우리가 그들의 상처를 치료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은총의 하느님께서 자비로운 길로 우리를 인도해주시기를 기도한다.

7.       우리는 또한 원주민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들어온 모든 것들이 사실임을 우리는 인정한다. 말로써 그들에게 너무 깊은 상처를 준 사람들도 우리가 인정하는 바를 받아들이기를 희망한다.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우리의 교회는 다 같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치료와 온전함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기 위해 원주민들과 함께 걸어갈 것이다.

 

 

 

 두려움은 당신이 두려워하는 그 일을 할 때 비로서 없어진다.

 

 

 

 전쟁은 땅을 소유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땅이 인간을 소유한다. 누가 감히 땅을 소유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는 땅 속에 묻히지 않는단 말인가?

 

 

 

 때로는 깨어 있는 것보다 꿈이 더 현명할 때가 있다.

 

 

 

그대가 한때 자유로웠음을 기억하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은 그대가 한때 자유로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일이다.

 

 

 

내가 특히 반대하는 것은 대기 오염이다. 나에게 눈이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을 때, 나는 세상이 투명하다는 걸 알았다.

 

 

 

  이 선언문으로 우리는 파괴와 부정으로 얼룩진 미국 역사 2백 년을 축하하는 바이다.

 

 

 

 미국 사회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 속에 큰 약점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나라는 폭력을 기초로 세워져 있다. 폭력을 숭배하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폭력적으로 살아갈 것이다.

 

 

 

 미국이 이룬 평화가 있으면 말해 보라. 승리는 있지만, 이 나라는 한 번도 성공적인 평화를 이룬 적이 없다.

 

 

 

 얼굴 흰 사람들이 대륙에서 대륙으로 건너다니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죽어서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인디언들은 이곳이 천국임을 안다.

 

 

 

 죽음을 탄생과 마찬가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이 죽는 것은 한 개의 문이 닫히고 다른 문이 열리는 것과 같다.

 

 

 

 야생이란 없다, 다만 자유가 있을 뿐.

 

 

 

 하지만 즉각적으로 정복의 과정이 시작되었다. 콜럼부스는 말했다. 이 원주민들은 좋은 노예가 될 것이라고. 그것이 그가 자기 나라의 여왕에게 보낸 첫번째 편지의 내용이었다.

 

 

 

 인디언의 언어에는 야생이라는 말 자체가 없다. 우리가 가진 단어 중 그것에 가장 가깡누 것은 자유. 야생의 삶이 아니라 자유로운 삶이 있었을 뿐이다. 동물들은 우리 인간 존재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눈에 눈물이 없으면 그 영혼에는 무지개가 없다고 세네카 족 격언은 말한다.

 

 

 

 이름의 연금술사들답게 인디언들은 친구를 나의 슬픔을 지고 가는 사람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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