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신춘문예 당선 시집, 문학세계사, 2008(초판 1)

 

 

 

 

 

 

 

 

 

 

 

 

 

 

나비의 꿈

 

                 문정

 

 

삼겹살집 앞에 장애인용 전동 휠체어가 시동을 접습니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눈으로 구워내는 우둘투둘한 연기

안구건조증까지 있는 그녀와 그가 안으로

팔과 다리와 얼굴을 이리저리 비틀고 흔들며 비집고 들어가

한가운데 자리에 앉습니다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는 냄새에 불을 붙이고

그녀가 셀프서비스 길 따라 뒤뚱뒤뚱 푸른 상추를 따옵니다

그가 삼겹살처럼 오그라들며 삼겹살을 굽습니다

옆 테이블 사람들이 눈을 흘깃흘깃

그녀가 상추를 펴 고기 한 점 올려놓고 그 위에 마늘 한 쪽 고추 한 조각 집어 올려 그에게 건네다가

  두 눈에서 눈물이 와르르

  맛있게 모아놓은 기름지고 풋풋한 초점이 와장창 깨져버립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상추의 겉잎처럼 다닥다닥

  그가 비틀비틀 십 리도 넘는 비포장길을 눈물을 닦으며 걸어가

  상추의 속잎처럼 두 손을 파닥파닥

  그녀의 눈물을 닦아 냅니다, 그들이 다시 고기를 한 쌈씩 싸들고

  과속 방지턱을 떼어내듯 사람들의 시선을 뚝뚝 떼어내고

  전등불빛 뽀얗고 포근한 안에서,

  붉은 나비 두 마리 훨훨 날아다닙니다

 

 

 

 

 

 

 

창고大개방

 

                      방수진

 

 

1

 

 선전물이 붙는다 오늘 하루뿐이라는 창고大개방

 준비 없는 행인의 주머니를 들썩이게 만든다 간혹

 마음 급한 지폐들이 앞사람 발뒤꿈치를 따라 가고 몇몇은

 아예 선전물처럼 벽에 붙어버린다

 떨어진 상표딱지, 올 풀린 스웨터, 뜯어진 주머니, 비뚤거리는 바느질까지

 다들 제 몸에 상처 하나씩 지닌 것들이다

 습기 찬 창고에서 울먹이는 소리는 여간해선 지상으로 들리지 않는 법

 

2

 

 조금은 잦은 듯한 창고 개방이 우리집에도 열린다

 일 년에 다섯 번 혹은 예닐곱으로 늘어나기도 하는 그날엔

 아버지 몸에서 하나둘씩 튀어나오는 물건들을 받아내느라 힘들다

 하지만 나는

 집안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냄비며 플라스틱 용기들이

 조금씩 떨고 있는 것을 보았다

 때론, 손끝에서 퍼진 그 울먹임이 아내의 머리를 찢고

 다리에 멍울을 남기고 깨진 도자기에 발을 베게 만들지만

 아버지의 창고 그곳에서

 누구도 딸 수 없었던 창고의 자물쇠가 서서히 부서지고,

 서로 쓰다듬을 수 없어 곪아버린 물집들이

 밤이면 울렁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제 심장소리에도 아파하고 있을 것이다

 

 3

 

 아직, 연고 한 번 바르지 못한 상처들로 창고가 북적거린다

 창고의 문을 열어두는 이유는

 더는 그것들을 보관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서로 다리 한 쪽씩 걸치고 있는

 우리들의 절름발이 상처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몇 번의 딱지가 생기고 떨어졌어도

 한 번 베인 자리는 쳐다보기만 해도 울컥하는 법이지

 그래서 창고 개방하는 날

 거리에는 저마다의 창고에서 빠져나온

 우리들이,

 눈송이처럼 바닥을 치며 쌓여가고 있었다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유희경

 

 1.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이 안은 비좁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식탁 위에 고지서가 몇 장 놓여 있다

 어머니는 자신의 뒷모습을 설거지하고 있는 것이다

 한 쪽 부엌 벽에는 내가 장식되어 있다

 플라타너스 잎맥이 쪼그라드는 아침

 나는 나로부터 날카롭다 서너 토막이 난다

 이런 것을 너덜거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2.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면도를 하다가 그저께 벤 자리를 또 베였고

 아무리 닦아도 몸에선 털이 자란다

 타일은 오래되면 사람의 색을 닮는구나

 베란다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삼촌은

 두꺼운 국어사전을 닮았다

 얇은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간다

 뒷문이 지워졌다 당신이 찾아올 곳이 없어졌다

 

 3.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간밤 당신 꿈을 꾼 덕분에

 가슴 바깥으로 비죽하게 간판이 하나 걸려진다

 때절은 마룻바닥에선 못이 녹슨 머리를 박는 소리

 아버지를 한 벌의 수저와 묻었다

 내가 토닥토닥 두들기는 춥지 않은 당신의 무덤

 먼지들의 하얀 뒤꿈치가 사각거린다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경전(經典)

 

                                  이은규

 

 어느 날부터 그들은

 바람을 신으로 여기게 되었다

 바람은 형상을 거부하므로 우상이 아니다

 

 떠도는 피의 이름, 유목

 그 이름에는 바람을 찢고 날아야 하는

 새의 고단한 깃털 하나가 흩날리고 있을 것 같다

 

 유목민이 되지 못한 그는

 작은 침대를 초원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건기의 초원에 바람만이 자라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생은 건기를 맞아 바람 맞는 일이

 혹은 바람을 동경하는 일이, 일이 될 참이었다

 

 피가 흐른다는 것은

 불구의 기억들이 몸 안의 길을 따라 떠돈다는 것

 이미 유목의 피는 멈출 수 없다는 끝을 가진다

 

 오늘밤도 베개를 베지 않고 잠이 든 그

 유목민들은 멀리서의 말발굽 소리를 듣기 위해

 잠을 잘 때도 땅에 귀를 댄 채로 잠이 든다지

 생각난 듯 바람의 목소리만 길게 울린다지

 말발굽 소리는 길 위에 잠시 머무는 집마저

 허물고 말겠다는 불편한 소식을 싣고 온다지

 그러나 침대 위의 영혼에게 종종 닿는 소식이란

 불편이 끝내 불구의 기억이 되었다는

 몹쓸 예감의 확인일 때가 많았다

 

 ,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경전(經典)

 바람의 낮은 목소리만이 읊을 수 있다

 동경하는 것을 닮아갈 때

 피는 그 쪽으로 흐르고 그 쪽으로 떠돈다

 지명(地名)을 잊는다, 한 점 바람

 

 

 

 

 

 

 

 애 콩

 

                     이은규

 

 어느 마을에선 완두콩을 애콩이라 부른다

 덜 여문 것들에게선 왜 날비린내가 나는지

 푸른 날비린내가 나는 이름, 애콩

 생의 우기(雨期)를 건너다 눅눅해져 애를 태우는 것들

 

 엄마는 왜

 이 밤에 콩을 까실까, 콩을

 불도 안 켜고

 

 꼬투리를 세워 깍지를 열었는지

 텅 빈 시간 몇 알 후둑, 후두둑

 그릇 위로 떨어지는 소리 들린다

 잠시 한숨을 고르고

 알맹이들을 한쪽으로 쓸어 모으는 손길

 

 알맹이라 착각하고 싶은 둥근 시간들이

 꼬투리라는 최초의 집을 떠나면

 차오른 허공을 바라보며 허부렁해질 저 꼬투리

 

 열린 방문 사이로 말없이 묻는다

 엄마는 왜

 이 밤에 콩을 까, 콩을

 문틈의 빛줄기 너머로 말없이 들린다

 잠이 안 와서, 잠이

 

 철없는 애콩이

 꼬투리 잡힐 과오들을 푸르름이라 착각하며

 날비린내의 몸을 말아 둥글게 누워 있다

 

 최초의 몸이면서 집인 콩꼬투리

 덜 여문 날들을 다독이느라 푸른 물이 들었을 손

 그 손이 인기척도 없이 방문을 닫는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나는 닫힌다, 한 철

 

 

 

 

 

 

 ()에 살어리랏다

 

                       이은규

 

 이 한기(寒氣)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옛사람 이덕무*가 어느 겨울, 오두막에 앉아 있다 사람의 입김이라면 이렇게 귀신스러울 수 있을까 입김이 성에가 되어 이불깃에 뚝뚝, 등잔불의 심지만 키우며 곰곰하던 그가 무릎을 탁 친다 묘책이로다! 묘책이로세! 맵찬 허공 중에 매화 터지듯 터진 묘책이라는 게 쯧쯧, 허겁지겁 한서 한 질을 이불 위에 쭉 늘어놓기에 이른다 생의 한기를 책()으로 막으려 하다니

 

 그의 별호는 책 귀신이었다 굶어죽는 어미 곁에서도 문장(文章)을 탐했다는

 

 한서 한 질로 겨울을 나는구나 마음을 탁 놓았을 그인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 독한 바람에 얼굴을 쏘인다 오두막 모퉁이의 흙벽이 부서졌던 것, 탐독하던 논어 한 권을 뽑아 세워 바람을 막아보는 그, 책으로 막을 수 있는 바람은 어떤 목소리의 바람일까

 

 생의 평지풍파(平地風波)를 책으로 막을 수 있다는 그 믿음이 바로 한기(寒氣)

 

 오늘밤도 어리석은 자가 있다 어느 시()의 기막힌 비문이 피를 돌게 해 잠시 생의 한기를 다독이는 밤, 탐독의 병증은 생의 난독을 불러 온다지 이번 생도 귀신스럽게 추울 것

 

 

* 조선시대 실학자, 시문에 능했으나 서얼 신분으로 크게 등용되지 못한 인물.

 

 

 

 

 

 

 파 문

 

             이장근

 

 결혼을 코앞에 두고

 여자는 한강에 투신했다

 이유를 묻지 않았다, 물은

 여자를 결과로만 받아들였다

 

 파문을 일으키며 열리고 닫히는 문

 물은 떨어진 곳에 과녁을 만든다

 어디에 떨어져도 적중이고 무엇이 떨어져도 적중이다

 투신한 죽음도 다시 떠오른 삶도

 물은 과녁을 만들어 적중을 알렸다

 

 적중을 알리며 너는 왔다

 온몸에 파문처럼 돋던 소름

 빗나간 너의 말도 떨어지는 족족 적중했다

 사랑처럼 민감한 것이 또 있으랴

 이유 없이 떠나도 결과는 적중이었다

 

 이유 없이 너는 가고

 나는 안개 같은 거짓말로 너를

 미워했다, 그리워했다, 지웠다, 썼다

 사랑처럼 가벼운 것이 또 있으랴

 구름이 되어 제멋대로 문장을 만들다

 지치면 낱글자가 되어 떨어졌다

 

 지금도 비가 온다 몸에 소름이 돋는다

 네가 오고 있는 것이다

 이 밤 이 세상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랑이 투신할 것인가, 투신하는 족족

 파문을 일으키며 적중할 것인가

 

 

 

 

 

 

 �투

 

              이장근

 

 관장님께 권투는

 권투가 아니라 �투다

 20년 전과 바뀐 것 하나 없는 도장처럼

 발음도 80년대 그대로다

 가르침에도 변함이 없다

 �투는 훅도 어퍼컷도 아니라

 쨉이란다

 관중의 함성을 한데 모으는 KO

 쨉 때문이란다

 훅이나 어퍼컷을 맞고 쓰러진 것 같으나

 그 전에 이미 무수한 쨉을 맞고

 허물어진 상태다

 쨉을 무시하고

 큰 것 한 방만 노리면

 큰 선수가 되지 못한다며

 왼손을 쭉쭉 뻗어 보인다

 월세 내기에도 어려운 형편이지만

 20년 넘게 아침마다 도장 문을 여는 것도

 그가 생에 던지는 쨉이다

 멋없고 시시하게 툭툭

 생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도장 벽을 삥 둘러싼 챔피언 사진들

 그의 손을 거쳐 간 큰 선수들의 포즈도

 하나같이 쨉 던지기에 좋은 자세다

 

 

 

 

 

 

 

 하모니카를 불다가

 

                      이장근

 

 도레미파 부는 정도지만

 불면 불수록 까다로운 악기다

 를 불고 다음 음을 내려면

 급하게 자리 옮기지 말고

 같은 구멍에서 거꾸로 들이마셔야 한다

 불고 마시며 건너는 징검다리

 나는 지금 생의 어느 음에 와 있을까

 임종 전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높은 음을 내셨던 할머니

 다음 생으로 넘어가는 찰나에 내신 음은

 끝이자 시작인 였을 것이다

 호상(好喪)이었다

 언젠가 할머니 곁에서 잠든 날

 거친 숨을 들이마시며

 코 골아 내던 음은

 낮에 밭을 갈다 후- 내뱉던 음과 같은 자리였다

 어느 자리도 소홀히 건너뛴 적 없이

 한 음 한 음 밟고 가신 길

 관 속에 넣고 땅 속 깊이 묻어도

 땅을 뚫고 나오는 푸른 가락

 한 음도 놓칠 수 없다

 

 

 

 

 

 

 

 모자(母子)의 시간

 

                     이장근

 

 아내의 가슴이 울고 있다

 입고 있는 면티 젖꼭지 닿은 부분이

 흥건히 젖은 줄도 모르고

 잠을 자고 있는 아내

 때 맞춰

 젖먹이 아들이 잠에서 깬다

 

 저 모자(母子) 사이를 흐르는 시간에는

 때가 살아 있구나

 비워야 할 때와 채워야 할 때

 가슴이 부르고 배가 부르는 때

 세상의 그 어떤 시계와도

 사이클이 맞지 않는

 그들만의 간격으로 흐르는 시간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난 아내가

 아들의 입에 젖을 물린다

 쪽 쪽 쪽

 태엽 감는 소리가 힘차다

 

 

 

 

 

 

 

 

 

 

 

 

 

 

 

 

 

헤어질 때 더 다정한 쪽이 덜 사랑한 사람이다.

 

-         이제니,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옥수수 수프를 먹는 아침

 

                             이제니

 

 옥수수 수프를 먹는 아침

 탁자가 필요하고

 이왕이면 둥글고 따뜻한 탁자가 필요하고

 의자가 필요하고

 이왕이면 둥글고 따뜻한 의자가 필요하고

 그릇이 필요하고

 이왕이면 둥글고 따뜻한 의자가 필요하고

 누군가가 필요하고

 이왕이면 둥글고 따뜻한 누군가가 필요하고

 옥수수 알갱이는 노란색

 알갱이 알갱이 알갱이 수프 속에 둥둥둥 떠 있고

 알갱이마다 생각나는 얼굴 몇 개 죽었고 사라졌고 지워졌고

 이제는 없으니까 알갱이를 먹는 겁니다

 둥글고 따뜻한 알갱이를 먹는 겁니다

 국물도 있어요 국물도 맛있어요

 옥수수 알갱이는 노란색

 알갱이 알갱이 알갱이 흘리지 마세요 흘리면 슬퍼져요

 나는 알갱이처럼 말을 아끼는 사람

 지금도 아침이면 아껴야 할 알갱이들의 목록을 수첩에 적는다

 어째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알갱이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걸까

 알갱이 알갱이 당신이 알갱이를 볼 수 있는 건

 알갱이를 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알갱이 알갱이 알갱이 옥수수 알갱이는 노란색

 둥글고 따뜻한 알갱이 알갱이 알갱이

 어쩌면 언제든 볼 수 있다고 믿고 싶은

 조금은 그리운 알갱이 알갱이 알갱이

 

 

 

 

 

 

 

 

 

 

 

  차창 밖, 풍경의 빈 곳

 

                                정은기

 

 철길은 열려진 지퍼처럼 놓여 있다, 양 옆으로

 새벽마다 물안개를 뱉어내는 호수와

 <시골밥상>이니 <대청마루>니 하는 간판의 가든촌이

 연대가 다른 지층처럼 어긋나 있다

 등 뒤로 떨어지는 태양이 그림자로 가리키는 북동의 방향으로

 질주하는 춘천행 무궁화호 열차

 지퍼를 채우듯 튿어진 자리를 꿰매며 달려가는 것은 열차의 속도였다

 

 기차의 머리가 향하는 방향을 보여주는 것은 긴장을 잃고 곡선으로 휘어지는 구간에서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곳에 자리를 튼 마을이 호수에 기대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가정식 백반>의 가정을 찾아 속도에 몸을 싣고 거꾸로 달린다

 이곳에서는 두고 온 먼 곳의 시간을 추억하는 일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관람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고

 박물관을 찾는 일만큼이나 자본주의적이다

 직선의 끝에는 목적지가 있어

 마을은 머지않아 먼지의 전시관이 될 것이다

 곁길로 샐 수 없는 것이 슬프다는 것을 호수는 알고 있을까

 튿어진 굴곡을 따라 살을 드러낸 풍경의 허리를 휘감고

 돌아가는 기차, 가끔씩 창밖으로

 활처럼 휘어지는 기차의 곡선을 본다면

 퇴락을 거듭하는 호숫가 옆, 한 마을이 생각날 것이다

 

 

 

 

 

 

 

 선인장의 생존법

 

                      정은기

 

 여행에서 돌아와 보니

 집안의 선인장이 말라 비틀어져 있다

 차례차례 포기할 것의 목록을 작성하여

 뿌리로부터 가장 먼 곳의 잎사귀,

 가장자리부터 스스로 숨을 놓는 선인장

 그렇게 조금씩 죽음을 늦추고 있었다

 

 제 숨을 한 번에 들었다 놓지 못하는

 우유부단함이라 생각하다가도

 한꺼번에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생이 있을까

 

 내가 버릴 수 있는 것이라곤

 매일 조금씩 뽑혀 바닥에 뒹구는 머리칼과

 구겨 던진 쓰다 만 편지, 그리고

 어제 처음 만난 중국인 유학생에 대한 기억 정도

 그러나 내가 버릴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사소한 하나까지 가시를 세웠다

 

 조금씩 죽는 것이

 그만큼의 삶을 이어붙이고 있는 것임을 알지 못해

 선인장처럼 가시돋힌 불안을 껴안고

 균형을 잃을 때마다 가시에 찔렸다

 

 혼인비행을 마친 여왕개미는 스스로 날개를 꺾는다

 제일 먼 곳의 자신을 하나씩 지우는 삶의 규칙, 나는

 내 몸의 어느 한 부분을 잘라내야겠다

 천천히 오래도록 상처가 덧나게 하기 위하여

 환부 깊숙이 칼을 박고 도려내고 싶은 것이다

 

 

 

 

 

 

 

 예 의

 

          조연미

 

 손바닥으로 찬찬히 방을 쓸어본다

 어머니가 자식의 찬 바닥을 염려하듯

 옆집 여자가 울던 새벽

 고르지 못한

 그녀의 마음자리에

 귀 대고 바닥에 눕는다

 누군가는 화장실 물을 내리고

 누군가는 목이 마른지 방문을 연다

 무심무심 조용하지만

 숨길 수 없는 것들을

 예의처럼 모르는 척하는 일상

 아니다, 아니다 그러나

 아니더라도 어쩔 수 없다

 몸의 뜨거움으로

 어느 귀퉁이의 빙하가 녹는지

 창 너머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또 잊혀지는 것들이 생기는 것이다

 뻔하고 흔한

 세상의 신파들 사이를 질주하며

 이번에는 흥청망청 살고 싶어요 소리치며

 눈은 내리고

 가지런히 슬픔을 조율하며 우는

 벽 너머의 당신

 찬 바닥에 기대어

 누군가의 슬픔 하나로

 데워지는

 맨몸을 가만 안아본다

 

 

 

 

 

 

 

 기차 흐르는 밤

 

                     조연미

 

 겨울 진주역

 입석표를 손에 쥐고

 종착역으로 가는 사내의 짐은

 철 지난 옷이 가득한 가방과

 먼 친척에게 팔러 가는 오징어와

 아직은 무릎이 튼튼하다는 아이

 사내가 술을 병() 삼아 빈 좌석에 눕자

 아이는 짐을 끌고

 기차 출입구 사이에 선다

 밤이 깊어질수록

 기차 안은 사투리가 사라져

 아이는 불현듯 말투 하나로 고아가 되고

 거울에 비친 남의 얼굴 그리다

 깜박깜박 슬픈 꿈이라도 꾸는지

 호오 입김 불어 유리창에 말간 도화지 펼치는 밤

 창 너머 가로등

 낚시찌처럼 까닥거려

 별빛 물고기

 이마에 떨어질 것 같은 밤

 기차 찰박찰박 흔들거리고

 밤마다 같은 어둠 출렁거려 어딘가 흘러들고 싶은 밤

 가방 속에서 오랫동안 추웠던

 낡은 옷의 단추가 알알이 채워지고

 납작해진 오징어가 둥실 되살아나 춤추는 밤

 이제는 깊은 밤 자장

 자장 잘 자라고

 기차가 달리는 길목마다 목침(木枕)을 놓아두는

 아이의 잠 속으로 기차 흐르는 밤

 

 

 

 

 

 

 

 

 

         정상혁

 

 하고 무사처럼 차분히 발음하면

 입 안의 뼈들이 벼린 날처럼 번뜩이고

 사방은 시위 당겨져 끊어질 듯 팽팽하다

 

 가만히 입천장에 감겨오는 혀처럼

 부드럽게 긴장하는 단어의 마디마디

 매복한 자객단처럼 숨죽인 채 호젓하다

 

 쏠 준비를 하는 순간 모든 게 과녁이다

 호흡 없던 장면들을 노루처럼 달리게 하는

 활활활 타오르게 하는 날쌔고 깊은 울림

 

 허공의 누군가가 하고 발음했는지

 별빛이 벌써부터 새벽을 담 넘어가

 내일로 촉을 세운 채 쏜살같이 내달린다

 

 

 

 

 

 

 

 칡 소

 

          정상혁

 

 찬 없는 밥상에 겨울을 얹어놓고

 침묵을 수저질하며 배부른 눈 감으면

 멀리서 칡뿌리처럼 성긴 소리로 산이 운다

 

 온새미로 잦아드는 저물녘의 뒤척임도

 기웃기웃 바람마다 스미는 흙내음도

 속부터 벅차오르는 식물성 그리움

 

 밥상을 물리고 겨울을 돌아눕혀

 해 지는 마음으로 덥수룩 눈 감으면

 내 몸에 칡이 오른다 이번엔, 내가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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