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런 봉투에 손으로 쓴 글씨로 내 이름이 적힌 소위 '원고 청탁서'를 받았다.

시잡지사에서 원고를 청탁하는 이 오래된 방식은 지금도 여전히

거의 모든 시잡지사에서 사용되고 있다.

 

나는 바야흐로 지금이 아날로그의 전성시대라고 생각한다.

아날로그적인 텍스트들이 큰 감동을 준다.

그건 귀하고, 비싸지고, 희귀해지고, 정성스러우며, 인간적이다.

 

e-mail 조차도 귀찮아서 쓰지 않고,

어쩌다 내가 친구에게 e-mail을 보내면 "e-mail 받기 정말 오랜만이다!"라고

반기는 세상에서 여전히 원고 청탁서를 우편으로 보내고

우표에 찍힌 소인을 통해 어느 우체국에서 몇 월 몇 날에 모아졌는지를

알 수 있는 이 귀한 것은 한 마디로

"인터넷 쇼핑을 통해 구입할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너무나 오랜만에 원고청탁을 받아서

이것이 더 희귀하게 보이는 지도 모르겠지만, 암튼

 

 

아래의 시들이 내가 원고로 보낸 것들이다.

 

 

 

 

 

 

 

 

 

 

 

 

2007 103

 

 

 

2007 10 3

천 원짜리 치즈버거를 사러 가다

떨어져 죽은 시체를 보았다

배고픈 비둘기처럼 쓰러진 남자는

아직 젊어서 일어 날 줄을 몰랐다

좀 더 개운하게 웃고

개운하게 립서비스를 하며

먹을 것 주워먹는 법을 몰랐다

컨버스화가 오른쪽 벗겨져서

한층 더 가볍게 부러져있었고

머리는 안으로 부서져

피는 많이 퍼지지 않았다

피부는 하얀 김치에 파란 곰팡이 생긴 듯

먹지 못할 것을 바라보는 듯한

식상한 기분이 들었다

세상의 모든 비둘기들을 파랗게 염색하여

날려보내면

하늘에 내내 그려져 있을 것만 같은데

염색 덜 된 청바지가 빨랫줄에서 떨어지듯

철푸덕 떨어져 쓰레기가 된 사나이

나는 놀라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도 놀라지 않아

천 원짜리 치즈버거 사러 들어갔는데

11가 되어야 햄버거는 판매가 된다고 한다

11도 되기 전에 죽은 사내처럼

배고파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땡그랑 땡그랑 동전 떨어지듯 밖으로 굴러 나왔다

다시 시체를 지나 회사로 가는 길

집에서 죽으면 시체 같아도

길에서 죽으면 비둘기 같다는 걸

저 남자도 알고 있었던 걸까

배고프지 않아도 밥을 먹고

사랑하지 않아도 사랑하고

목이 매여도 자유로운 세상을 즈려밟고

회사로 간다

회사에선 개천절 휴일에도 일하라 한다

 

 

 

 

 

 

 

 

 

 

 

 

 

 

 

 

 

 

 

 

 

 

 

 

 

 

 

 

 

 

 

 

대낮에 향수를 뿌리고

 

 

 

장롱 위에 흰 먼지 속에서

향수 한 병을 발견했다

몇 번 뿌리지도 않았는데

냄새가 추억처럼 들러붙어

급하게 거리로 나왔다

 

너는 왜 여자향수를 뿌리고 다니는 거야, 라 묻는다면

향수가 있길래 뿌려봤더니

돌아가신 어머니 향수더라고 말해야지

라 생각하며 걷는데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다

 

보석 같은 향수, 물약 같은 향수, 항암제 같은 향수

는 아이들 손에서 멀리 떨어뜨려 두어야 한다

마셔버릴지도 모르니까

특히나 어머니를

일찍 잃은 아이라면 말이다

 

가끔씩 비가 멎는다

하루 네 번쯤 더러워진 안경을 닦고

이십 만 번쯤 눈을 깜빡이면서

어둠과 빛이 교차하는 하루를

대낮이라 부르는 것이 신기했다

 

 

 

 

 

 

 

 

 

 옳은 팔

 

 

내 동생은 착한 아이였다

변비가 심했던 할머니를 위해

관장약을 할머니 똥구멍에 넣어드리곤 했다

그때는 좌약이 없었는지

작은 물총 같은 걸 찔러 넣고

쭈욱쭈욱 약물을 집어 넣었었다

나는 아마 몇 가지 이유로

늙고 엉덩이가 너무 커서

할머니 성기를 보게 될까 봐

냄새가 난다거나 냄새가 나는 이유로

할머니의 부름을 피해 다녔다

 

동생이 손을 다섯 바늘 꿰매고 술에 취해 잠들어 있다

어느새 나이 서른

열대야 속에 선풍기를 알약처럼 틀어놓고

화장실 타일처럼 추억을 흘리며

땀이라도 닦아주고 싶었으나

집을 나와 길을 걷는다

어지간한 혹성(惑星)만큼 무거운 기계 다루는 일을

동생은 이제 막 2년 째 해치우고 있다

 

내 팔은 어디선가 옳았던 적이 있다

그리고 분명, 저 깜빡이는 별들도

어디선가 옳은 일을 하겠지

화성(火星) 빛을 닮은 세탁소 간판을 지나

빗소리 고여있는 하수구를 지나

내 팔이 옳았던 때를 찾아가본다

이 땅을 얼마나 파 들어가야 발굴될까

오래 묵은 방귀처럼 한숨이 새어 나온다

 

 

 

 

 

 

 

 

 

 

 

 

 

 

 

 

 

 

 

 

 

 

 

 

'some' 카테고리의 다른 글

TTL존의 30대  (0) 2008.03.03
진한 쑥스러움  (0) 2008.03.02
빛은 서른살까지 오지 않는가?  (0) 2008.02.11
클로버필드의 유일한 장점은  (0) 2008.01.28
그렇다면 나는 ... 몇 호기에 탈까?  (0) 2008.01.2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