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에반게리온 - 서>를 보고 왔다.

나는 이전의 에반게리온 애니메이션을 전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 이 애니메이션을 보는 중에 내내 많은 사람들이 내가 부러울 거라고 생각했다.

 

그건 내가 너무 재밌는 책을 읽어버리고 말았을 때 느끼던 감정일 테니까.

이를테면 난 슬램덩크를 처음 읽고 나서 이런 생각을 했다.

 

"아, 이렇게 좋은 걸 이미 읽어버렸으니 앞으로는

처음 슬램덩크를 보는 경험을 못하고 말겠구나.

정말이지 아직 슬램덩크를 안 본 사람들이 너무 부럽다.

그들에겐 아직 이 기분을 느낄 기회가 남아 있으니..."

 

이런 경험은 살면서 몇 번 할 수가 없다.

별로 와 닿지 않는 예를 들자면, 첫 취업? 첫 섹스?

그러나 이건 정말 부적절한 예인 것 같다.

첫 취업이나 첫 섹스가 좋지 않은 기억일 수도 있고

섹스 같은 경우 이후로 몇 번을 해도 첫 섹스만큼 좋기 때문이다.

 

어릴 적 내가 섬세한 감정의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나이가 들면서 이것이 점차 까다로움과 예민함, 신경질 적으로 변해가는 것 같다.

영화 보는 중에 누가 핸드폰을 꺼내서 그 불빛이 어둠 속에 뻗쳐 내 시야를 침투하면

그 핸드폰을 그 사람 위나 대장이나 불알, 그런 데다 집어넣고 꿰매버리고 싶어진다.

 

영화 보는 중에 누가 말시키는 게 싫은 나는

오늘도 혼자 <에반게리온 - 서>를 보러가서

핸드폰 불빛에 시야를 침식당하지 않도록 비교적 앞자리에 앉았는데

불행히도 옆자리에 남자 중학생 정도 되보이는 것들이 두 명 앉아서

영화 보는 간간이 대화를 주고 받는 것이다.

 

의식이 그들 쪽으로 촉수를 뻗치는 걸 참고 참으며

영화를 끝까지 보아가는 즈음

문득 나는 대체 이들이 무슨 대화를 하는 건지나 좀 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깜짝 놀랐다.

 

"너가 에바에 탄다면..."으로 시작되는 말.

그 뒤는 자세히 못들었지만

그 대화는 다분히 공상적이고 낭만적인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니까 내가

접해본 지 너무 오래된 그런 것.

슬램덩크를 본 후 운동장에 나가 풋내기 슛이나

정대만의 불꽃슛을 던지던 옛날의 내가 떠오르며

너무 오랫동안 잊고 지낸 감정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영화 한 편을 보더라도 그저 "재밌다..."고 하면 무시당하는 세상을

살아왔던 건지

영화 한 편을 보더라도 감독이며 그 감독의 필모그라피며

연기며 연출이며 톤과 마케팅까지 점점이 파악하려는 내심 자랑하고픈 습성이

부끄러워졌다.

(그렇더라도 영화관에서 한 마디의 말이라도 꺼내는 것을 용납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굳이 어색하게

내가 에바에 탄다면... 이라는 생각을 시도했다.

시도했는데. 잘 안 됐다.

몽상이라고 하나, 그걸 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 같다.

이건 정말 큰일이다.

다음 영화를 보러가야 겠다.

 

30분 뒤에 <클로버필드>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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