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 2008년 여름
(여기 나… 있다)
벌교에 들러
언제 시골 가는 길에 벌교에 들러
꼬막 정식 한 번 먹어야겠다
삶은 꼬막에 꼬막무침에 꼬막전까지
온통 꼬막으로 시장기를 달래고 싶다
벌교역, 역전앞 골목 어디쯤
‘벌교 꼬막 정식’이란 허름한 간판이
양철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진작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냅다 낡은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면
드르륵, 드르륵 꼬막 씻는 소리가,
꼬막과 꼬막이 부딪혀 서로의 몸에 묻은
뻘을 씻어내는 소리가 시끄러울 것이다
인고의 세월 견뎌온 패인 골마다
한 소쿠리의 따뜻한 음식이 될 것이다
들그르륵 들그르륵 꼬막 삶는 소리에
부용산 산벚꽃도 피어날 것이다
검붉은 아침 해가 저녁으로 저녁으로만
고집하여 가듯이 주걱을 되게 잡고
한 쪽 방향으로만 저어야 탱탱한
뻘밭의 속살을 볼 수 있다고 하던가?
된통 푸짐한 한 상 남도의 향연을
맛볼 수 있다고 하던가? 언제가 됐든
노모 혼자 사는 시골 가는 길에 왠지
슬그머니 꼬막 벌어지는 느낌이 드는
벌교, 벌교읍에 들러 꼭 한 번
꼬막 정식을 먹어봐야겠다
나무의 필법
끝물 이파리 몇 장 모두 떨어져 나간 나무는
y로 총총 엮인 거꾸로 선 싸리비
구름 몇 점 떨어진 하늘을 쓸어낼 듯 서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Y로 매달려 세상의 고통을 업듯
수많은 y를 업고 있는 나무를 읽다가
y에 다시 y를 업느라 휘어진 획을 읽다가
빈 집 같은 내 등을 읽는다
맨 처음 내가 기댄 곳은 어머니의 등이다
어머니는 등 기울여 나를 업어 키웠고
등이 휘도록 지게를 업은 아버지 덕분에
식구들이 먹고 살았다
기울여야 업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y의 필법
평평한 내 등에도
누군가 배꽃 같은 슬픔을 기대어 온 적 있다
휘면 무너질까 등 돌린 적 있다
그때 나를 기울여 업어주었더라면
폭설도 가볍게 견뎌냈을 거라고 나무가 말해주었다
앓다가 터득한 나무의 필법을 따라 쓰는데
등에 누가 업힌다
막 눈 뜨기 시작하는 생장점
y의 순(筍)이 온 몸에 번지고 있다
심금(心琴)
1
너는 몸이 아프고 나는 마음이 아프니 너와 내가 결의하면 환(幻)의 제국을 세우겠구나
2
필 줄 모르는 울안의 꽃나무가 가여우니 백사산 성벽 아래 도화 희게 피거든 한 가지 꺾어들고 그대 온다 했지
그 봄 다 지고 봄 속의 봄이 지네 기약도 없이 한 잠 자고 나면 예까지 밀려와 발등을 깨치는 꽃 비린내 태양 없이 꽃도 없이 젖어드는 울울한 이파리들
후드득 후드득 독(毒)이 찬 이파리 한 줌 훑어 푸른 독물 봄내 들인 화살촉을 빚었지 옹이 품은 가지로 매끈하니 활을 매고 아홉 개의 홍등을 밟으며 꿈인 듯 그대 곁으로 스밀 것이니
그대여 부디 활그림잔지 꽃그림잔지 창에 어리기 전 지지 않을 꽃시절로 후드득 후드득 떠나시길
3
오래된 골목 외등이 비추는 한 뼘의 환함 속에 물기 다 빠진 연탄재 흰 가루 더욱 희게 날리는 봄밤, 낡은 루핑 지붕이 펄럭 펄럭 지형이네 국수 집 불도 꺼지고 옛날 영화라도 보나 봉창에 불빛만 파래졌다 붉어졌다
눅눅한 마음을 말리고 싶었지, 지난 봄 당도한 빛의 도시에서 내게 주어진 방은 북향이었으므로, 나는 햇살이 창궐하는 태양의 레일을 따라 정처 없었는지도, 그 봄 빛이 되어준 건 알제리 이민자가 말아주던 한 그릇의 국수, 눅눅한 침대에 걸터앉아 한 병의 흑맥주와 먹으면 어쩌면 빛인 듯 어쩌면 빛일 듯 은잎아카시아 만발했던 식당의 국수
그러므로 기억의 봉창 너머 은닢아카시아 이파리가 펄펄 날리누나, 한 모금의 흑맥주가 엎질러진 것뿐인데, 흔전만전 한기에 취해 실없는 노래나 부르며 환하게도 지누나 환(幻)의 나날들
매미
수피아
어느 쪽으로 가야 생각의 끝인가
도꼬마리 이파리 뒤를 보면
가보지 않은 잎맥의 길이 여러 갈래다
당신 두고 지나온 길 끝에서
내가 나에게 가지 말라고 한 다른 길들을
한없이 돌아보고 있다
감추어진 공중의 길이 흔들린다
기억들, 바람에 살짝살짝 뒤집히는
이파리의 뒤편은
오후 햇살에 닿아 그늘을 드리운다
간경화 말기인 당신, 생(生)의 집착 같은
이파리 뒤편에 허물을 벗어두고
골수에 울리도록 허무하다고 울고 또 울 것이다
곧 가을이 오고, 이파리가 쪼그라들고
나뭇가지는 바람을 핑계로
이파리의 생(生)을 툭 끊어낼지라도
허물을 거뜬히 비워내고 날아간
당신을 나, 죽어도 그리워하지 않기로 한다
(수피아, 산문 중)
그러다 2006년 봄 두 번째 애인이 통쾌하게 나를 차버리고 저승으로 갔다. 두 번째 애인이 떠나가던 마지막 날 밤을 기억한다. ‘일어나고 싶어’ 애원하는 애인에게 나는 ‘조금만 참으세요’ 라며 애인의 두 손을 꼭 쥐고 죽을힘을 다해 죽도록 도와주었다. 애인은 살고 싶다고 애원을 하는 중이었고, 나는 살고 싶은 마음을 조금만 참으시면 편하게 죽을 수 있어요 라고 했던 것 같다. “간 이식 수술을 하면 10년 이상은 살 수 있겠네요”라고 비난의 눈초리로 회진을 돌던 주치의와 2년의 신경전을 벌여야 했다. 아! 자본주의, 몸뚱이 하나가 밥이고 돈이고 시간이고 나여서 병원에서 원하는 수술비가 도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주일마다 1-2백만 원씩 병원비 수납을 촉구하는 계산서가 착실하게 침대 위에 놓이곤 했다. 도대체 자판기는 왜 커피나 먹으라고 하는지, 비만해지는 음료수 따위만 통! 통! 떨어지는지 모르겠다. 누군가 미래를 여는 자본 전문가라면 자판기에 수술비 버튼을 만들어 놓았으면 좋겠다. 현실에서는 돈이 더 필요했으나 나는 가슴에서 꺼낸 사랑 외에는 줄 것이 없었다.
두꺼비
- 아이
길 가에 두꺼비 한 마리가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쪼그리고 앉아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 두꺼비 나를 보며 끔뻑끔뻑 눈을 떴다 감았다 합니다.
야, 너 나 아냐?
발목들
발목에 허벅지까지 긴 석고가 씌워졌다 유리
화병에 반 넘게 몸 갇힌 버들가지 그 첫 휴식 곁의
보조침대 환자보다 더 절뚝이며 심야의 휴게실로 나가선다
창공을 날려던 발목이 다친 발목에 묶인 날들 넓은
유리창이 대신 날아가 풍경을 물어온다 저 밤의 강물을
춘천 호수라 부르자 저 불빛을 남해의 밤바다 등대라
부르자 이곳을 기차라 부르자 러시아 자작나무 숲을
통과하다 멈춰선 간이역 차창이라 하자 누구나 아프다는 인도의
갠지즈 강가라 하자 고통으로 누구나 새로운 몸을 얻는다는 강
뒤척이다 간신히 잠든 발목의 꿈은 더 먼 페루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어디까지라도 부디 가볍기를 처음 가는
그 길 내 발목에도 돌아보지 않기를
늦게야 터지는 이 눈물을 사하라의 낙타라 부르자
발목을 인생세간의 오목한 심장이고 인연이라 부르자
병원에서야 가장 아름다운 야경을 원없이 본다
또 그렇게 봄날은 간다
아내한테 꾸중 듣고
집 나와 하릴없이 공원 배회하다가
벤치에 앉아 울리지 않는 핸드폰 폴더
괜스레 열었다 닫고
울타리 따라 환하게 핀 꽃들 바라보다가
꽃 속에서 작년 재작년 죽은 이들
웃음소리 불쑥 들러와 깜짝 놀랐다가
흘러간 옛 노래 입 속으로만
흥얼, 흥얼거리다가 떠나간 애인들
어디서 무얼 지지고 볶으며 사나
추억의 페이지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는데
갑자기 요란스레 핸드폰 자지러진다
“아니, 싸게 들어와 밥 안 먹고 뭐해요?”
아내의 울화 어지간히 풀린 모양이다
석가헌*
이제, 수유리를 뜬다.
뜰의 한 그루 산수유나무를 뜬다.
이 집에 눌러 산 지도 어언
수령 삼십 년,
오! 만 가지 무성한 수유리를 뜬다.
산수유 뿌리 둘레를 오래 에둘러 동네 한 바퀴
에둘러 뜨는 땅,
빈 구덩이를 두고 간다. 묵음의 이 아우성,
꽃 핀 그늘의 반경을 지고 간다.
용서하시라,
뒷모습이란 까닭 모를 사죄이며 생전
벗을 수 없는 짐이니…… 수유리,
산수유 한 그루를 떠 고향에 부리려 한다.
나 죽어 그대 그리운 날의 눈빛,
그 석양에 나무여
너 참 아름답기 바란다.
* 夕佳軒
눈빛
- 창밖 목련
어머니, 내 옆자리에 와 앉는다.
방금 했던 말, 날 보며 또
밥 먹었느냐, 묻고 앉는다.
가죽 소파 둔한 반동에 닿으며 나는
공중으로 약간 부풀어 오르는 느낌을 받는다.
작은 키에 꼿꼿이 마른 체구, 아흔여덟 연세에 무슨
힘이 있겠냐만 새삼
날 낳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는 것 같다.
환갑 지난 내 몸무게가 방금,
목련 피는 환한 시늉을 겪는다.
부위별로 팔아요
나를 사가세요 부위별로 팝니다 흐벅지진 않지만 오십여 년 숙성된 살이 말랑말랑할 거예요 세상을 휘젓고 다닌 팔과 다리는 좀 싸게 팔아요 엉덩이살은 바람구멍이 있을 거예요 살짝 도려내고 드세요 당신 가슴에 영영 메울 수 없는 구멍을 만들지도 몰라요 젖가슴과 허벅지살은 할인되지 않아요 입술은 혀를 끼워 팝니다 혀 없는 입술은 좀 싱거울 테니까요 갈비뼈 사이엔 아팠던 흔적이 사리처럼 끼어있을 거예요 약이라 생각하고 꼭꼭 씹어 드세요 간장은 다 녹아 못쓰게 됐을 거예요 진창도 풍덩풍덩 다니던 발과 아무나 덥석덥석 잡았던 손이 문제군요 아랫도리를 통째로 사가면 손은 덤으로 드릴게요 잠 안 오는 밤 혹시 당신에게 위안이 될지 모르니까요 발은 팔지 않을래요 갈 곳이 있거든요 꼭 한번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요 평소에 그랬듯 껍질은 살살 벗기세요 당신 입맛에 맞게 회를 뜨든지 탄력이 없다 싶으면 소금구이를 해보세요 뼈는 푹 고아 조금씩 마셔요 뼈에 사무쳤던 일 많아 독이 있을지 몰라요 아 당신이군요 어떤 부위를 잘라드릴까요
길
장옥관
급한 김에 열었다 서둘러 닫은
복부 같다
사람 드문 아파트 이면도로
낡은 길 한복판을 검은 띠가 거칠게 가로지르고 있다 도시가스 배관공사라도 했는지
곳곳에 흩어진 흙무더기
마취가 미처 덜 풀렸다는 듯 길은 몸을 뒤틀어
지나가는 차량 흔들어놓기도 하지만
얼떨결에 받아먹은 제 속의 쇠파이프를
어쩌지 못해 진저리를 치는 것
복수가 차오른 배인 줄 모르고 소화제만 찾았던 그, 날것의 죽음을 받아먹은 그날
땅은 부푼 배를 껴안고 신음을 토해냈으리라
조등처럼 걸렸던 백목련
누런 고름 배어나오는 시든 꽃잎을 구둣발로 짓이기며 누가
마지막 남은 오줌방울을 탈탈 털며
진저리친다 실밥 풀린 눈으로 밤이 그걸
오래 지켜보고 있다
귀
동네 미장원에서 한 방 뚫었던 구멍
한 때는
쇠붙이나 구슬이 노래를 흘려보내던 곳이다
구멍이 있어 소리는 더 맑게 울리기도 했지만
늘어난 구멍은 몸의 외부인 듯하다
아궁이 깊은 고래 속으로 불길 들어갈 때
환한 구멍 아득히 붉고 뜨거워
아랫도리가 자꾸 조여졌으나
귀고리를 달았던 곳에
이젠 구멍을 단 느낌
귀고리는 점점 커져간다
사채를 쓰다가 어느 순간엔가 이자를 덮어쓰는 격으로
확대하면서 오히려 학대했다
고장 난 라디오처럼 이제 귀에선 느린 노래만 되풀이된다
슬픔도 잦으면 잘 조여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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