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피부,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 들녘, 2007(초판3쇄)
우리는 우리가 증오하는 사람들과 결코 멀리 떨어질 수 없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진정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다.
문제는 무엇이 있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없느냐였다.
우리는 때로 외딴 바위에 걸터앉아 실패로 얼룩진 지난날과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미래 사이에서 협상점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스스로 혼자 하는 과제도 많았다. 정확히 6분 30초 동안 풀밭 한가운데 앉아 있는 과제도 이었다. 이 시간 동안 유일한 숙제는 끈이나 실로 작은 직사각형을 만들어 그 안에 살고 있는 생물의 모든 형태를 기록하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풀만 보였지만 차츰 놀랄 만큼 많은 종류의 기어다니는 곤충, 날아다니는 곤충, 땅속에 사는 곤충들이 보였다. 모든 것이 살아 있었다. 바람도 살아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형언하기 어려운 독립성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는 훌륭한 아일랜드인이었기에 전투에서 패할 때마다 매번 더 열심히 다음 패배를 준비했다. 결국 적군의 기운을 뺀 것은 이런 흰개미와 같은 끈기였다.
전에는 사람들이 무기를 숨겼지만 이제는 무기 아래 사람이 숨었다.
공화국군 시절에 배운 방식이 하나 있다. 감상적인 생각이나 절망과 싸울 때는 기술적인 측면에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이다.
혼자 하는 생각의 힘을 우습게 여기면 안 된다. 내가 피우는 담배는 마법의 힘을 빌려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담배로 변했다. 폐에서 나오는 연기는 싸움을 포기한 사람이 보내는 신호로 바뀌었다. 나는 기진맥진했다. 하지만 피로가 힘겹지는 않았다.오히려 피로가 날 힘겨워하고 있었다.
담배를 다 피우고 나니, 내 자신에게서도 아주 멀리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나는 수천 마리의 괴물들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나의 적이 아니었다. 지진이 건물의 적이 아니라 그냥 지진인 것처럼.
“오늘 정말 괴물들이 몰려올까요?”
“지금 교황이 로마에 사느냐고 물어보는 거요?”
무사시의 또 다른 격언 : 훌륭한 무사는 그가 표방하는 대의명분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싸움에서 얻어내는 의미로 규정된다.
“인간의 타고난 품성, 그러니까 사람이 원래부터 착하다든지 아니면 나쁘다든지 하는 말들은 다 무의미합니다. 그가 속한 사회가 좋은가 나쁜가의 문제이지요…”
이곳 등대에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은 못과 못, 혹은 유리와 유리 사이의 1센티미터 공간이 주는 강박관념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글로 쓸 수 있는 것은 기억할 가치조차 없다.
남쪽 해안에서 나무들이 바닷물에 입을 맞춘다.
그는 시간의 포박을 피하려는 듯 몽유병 환자 같은 시선으로 멍하니 세상을 바라본다.
마스코트는 갑각류처럼 파도에 무심했다. 그리고 파도를 모른 체하는 것처럼 나도 모른 체했다.
세상을 돌아다니다 보면 이 덧없는 여행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게 된다.
내 몸은 부르주아가 자본을 축적하듯 쾌락을 얻었다.
어떤 아일랜드 사람이 어두컴컴한 방에 있었답니다. 손을 더듬거리며 석유램프를 찾아 성냥불로 램프를 켰지요. 불빛을 벽에 비춰보니 다른 문이 있었어요. 재빨리 그 문으로 나온 다음 문을 닫았는데 그만 램프를 두고 나온 걸 알게 됐습니다. 그는 자신이 다른 방에 갇힌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죠. 램프를 더듬어 찾아 불을 켜고, 그 램프를 잊어버린 채 문을 닫고 나와, 다시 또 어둠 속에 갇히는 이 고집쟁이 아일랜드 사내 얘기는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마침내 이 사내는 문이 없는 방에 들어가게 되고 쥐처럼 갇히게 되죠. 그런데 뭐라고 했는지 압니까? ‘다행히도 그게 마지막 성냥이었어.’
그때 발코니에서 “춤 로이히트투름!” 하며 다급하게 외치는 바티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믿을 수 없었다. 차가운 공기를 뚫고 총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무언가 아주 연약한 것이 내 안에서 부서졌다.
등대 조명은 달과 의사소통을 하려는 곤충의 신호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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