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문학과지성사, 2008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아득한 고층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이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풍경
1
비가 갠 거리, XX공업사의 간판 귀퉁이로 빗방울들이 모였다가 떨어져 고이고 있다. 오후의 정적은 작업복 주머니 모양 깊고 허름하다. 이윽고 고인 물은 세상의 끝자락들을 용케 잡아당겨서 담가놓는다. 그러다가 지나는 양복신사의 가죽구두 위로 옮겨간다. 머신유만 남기고 재빠르게 빌붙는다. 아이들은 땅바닥에 엉긴 기름을 보고 무지개라며 손가락으로 휘젓는다. 일주일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지독한 무지개다…… 것도 일종의 특허인지 모른다.
2
길 건너 약국에서 습진과 무좀이 통성명을 한다. 그들은 다 쓴 연고를 쥐어짜내듯이 겨우 팔을 뻗어 악수를 만든다. 전 얼마 전 요 앞으로 이사 왔습죠. 예, 전 이 동네 20년 토박이입죠. 약국 밖으로 둘은 동시에 털처럼 빠져나온다. 이렇게 가까운 데 사는 구만요. 가끔 엉켜보자구요. 흐흐흐. 인사를 받으면 반드시 웃음을 거슬러 주는 것이 이웃 간의 정리이다. 밤이 오면, 거리는 번지르르하게 윤나는 절지동물의 다리가 된다. 처방전만 하게 불 켜지는 창문들.
3
마주 보고 있는 불빛들은 어떤 악의도 서로 품지 않는다. 오히려 여인네들은 간혹 전화로 자기네들의 천진한 권태기를 확인한다. 가장들은 여태 귀가하지 않았다. 초점 없는 눈동자마냥 그녀들은 불안하다. 기다림의 부피란 언제나 일정하다. 이쪽이 체념으로 눌리면 저쪽에선 그만큼 꿈으로 부푼다. 거리는 한쪽 발을 들어
아내의 마술
아내가 슬프고
슬픈 아내를 보고 있는 내가 슬프고
그때 온 장모님 전화 받으며, 그러엄 우린 잘 지내지, 하는
아내 속의 아내는 더 슬프다
마술처럼 완벽한 세상에서 살고 싶다
모자에서 나온 토끼가
모자 속으로 자청해서 돌아간다
내가 거울 속으로 들어가려 하면
딱딱한 면은 왜 나를 막는가
엄마가 아이를 버리고
직업이 아비를 버리고
병이 아픈 자를 버리고
마술사도 결국 토끼를 버리고
매정한 집이, 너 나가, 하며 문밖에 길을 쏟아버리자
미망(迷妄)이 그 길을 받아 품에 한번 꼭 안았다가 바로 버린다
온 세상을 슬픔으로 물들게 하려고
우는 아내가 식탁 모서리를 오래오래 쓰다듬고 있다
처음 보는 신기한 마술이다
한때 황금 전봇대의 生을 질투하였다
시간이 매일 그의 얼굴을
조금씩 구겨놓고 지나간다
이렇게 매일 구겨지다보면
언젠가는 죽음의 밑을 잘 닦을 수 있게 되겠지
크리넥스 티슈처럼, 기막히게 부드러워져서
시간이 매일 그의 눈가에
주름살을 부비트랩처럼 깔아놓고 지나간다
거기 걸려 넘어지면
끔찍하여라, 노을 지는 어떤 초저녁에는
지평선에 머무른 황금 전봇대의 生을
멀리 질투하기도 하였는데
18세기 이후 자연과 나의 관계
겨울 동안 헐벗었던 산봉우리는 이제 초록색 브래지어를 걸쳤다, 자연이여, 18세기 이후 나는 불행해졌다 나는 내 자지를 노 저어 여기까지 왔다 뒤돌아보면 강물은 여기저기 찢겨 있다, 자연이여, 흘러가는 상처여, 늙은 동지여, 헉헉거리며 숨 가쁘게 얼음 녹는 해빙의 물결에 나는 더러운 손을 씻는다 나는 그처럼 따뜻한 구멍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랬다 18세기 이후 역사는 접붙인 자지들로 만든 인공 숲이었다 겨울 동안 배곯았던 길은 이제 훈풍의 노래를 여물처럼 씹고 있다, 자연이여, 찢긴 악보여, 단 하나의 모성이여, 나는 강가에 쭈그리고 앉아 내 자지를 기역자로 꺾어 날카로운 낫이 될 때까지 숯돌에다 갈기 시작한다 머지않아 봄날이 등 뒤에서 산불처럼 크게 웃으며 나를 덮치리라
도주로
집을 나서는데, 아이 하나가 담벼락에 낙서를 하고 있다. 나는 옆에 선 채 가만히 지켜보기로 한다. “영철이랑 미영이는 사랑한대요. 씨발놈아, 미영인 내꺼다.” 아이는 나를 보더니 주뼛거리다가 후다닥 달아난다. 너무 곧장 달음박질쳐서, 바로 앞에서 점점 작아지는 것 같다.
유심히 보면 담벼락 아래에는 잘게 부서진 백묵 가루가 수북하다. 아이는 정말 온 힘을 다 주어서 꾹꾹 눌러 쓴 것이다. 허리를 굽혀 손가락에 묻혀본다. 씨발놈아, 미영인 내꺼다…… 참 부드러운 증오다.
가방 속엔 빈 도시락 통이라도 들었는지 소리가 요란하다. 아이는 벌써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지만 아직도 들려온다. 수치심이란 저렇게 오래도록 덜그럭거리는 것일까. 발걸음을 옮기다 나는 문득 본다. 수많은 빛살들이 같은 쪽으로 도망치다가 컴컴한 그림자들로 길바닥에 와르르 넘어지고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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