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연인들,
세일즈맨, 백 칸 건물 속으로
눈에 익은 골목이 잠들 무렵
라이터 불이 흔하디흔한 침묵을 빌리는
봄날은 왔다
둥글게 오려진 불빛 밑에 잠만 자러 가는
키 큰 사내는 헐거운 신발을 끈다
백 개씩 올라가는 계단으로 된 골목에서
수행하는 시간이다
딸이 좋아하는 별자리 하나를 눈 보자기에 매동그릴 때
쟁반국수집에서 얼김에 바뀐
낡은 구두 뒤축과 발뒤꿈치 사이 기슭이
계단 속으로 낯선 음계를 밀어 넣는다
문을 그처럼 많이 열어본 사내가
휘청휘청 올라가고 있는 계단 끝집을
겨냥하는 목련은 숨을 죽이고 있다
백 칸 내림 건물 한 채 속으로
들어가는
조금 전 비뚜름하게 라이터 불을 빌리던 사람
어느 집 개가
제 목 같은 데를 물어주길 바란 적도 있다네
젓가락, 내 마음은
내 마음은 오래도록 바짝 마른 것에 가 있었다
고아원이 밤의 굴뚝을 울려대는
새 울음소리 뒤로 옮겨가고 없는 밤에
나는 시름해진 꿈들을
곧잘 눈에 잘 띄는 선반에 올려놓곤 하던
젓가락처럼 몸이 긴 원장을 생각한다
이런 날 내 마음은
물배급차를 끌고 다닌 길에서 돌아오지 않는다
입에 물려 있던 물을 간신히 다른 입에 밀어 넣던 아이의
희미한 이름도 간직하고 있다
별이 두 개나 세 개씩 하룻밤에 떨어지면
흙칠을 한 호수 옆에 묻어야 했던 그 길을
가지고 있다 내 마음은
물이 없어 문을 닫은 고아원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주면
기력을 다한 살핏한 눈빛을 내 귀에 대고
고맙다고 하던 아이는
쪼개기 전의 나무젓가락처럼 두 다리가 바닥에 붙어 있었다
지평선에 해 빠질 동안
아이들을 세상 밖으로 가만히 달아나게 해주고 싶었다
마른 발등이 병실을 옮기는 긴 허방 붉디붉어도
우리는 무비*나 에이즈, 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지만
옮겨 심은 나무들이 더 이상 자라지 않아
어느 귀신이 그걸로 새 젓가락을 만들고 있으리라
* 아프리카의 아이들이 에이즈를 부르는 말. ‘도둑’이라는 뜻을 가진 스와힐리어.
막 어두워지는 숲길
숲길이 막 어두워져 더 걸어 들어갈까 말까 하는 갈피에서
무슨 빛인가 발그레하게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숲이 항아리를 씻어두었는지
무슨 빛인가,
여름 날 길을 달리한 모든 가지들 위에
밥 묻은 손바닥처럼 얹히는 것이었습니다
노란 양푼을 업은 금달맞이꽃이 눈에 띄는 것이었습니다
그 길은 언젠가 두 사람이 걸어
이끼 앉은 돌 틈에서 목탑(木塔)을 들어내던 곳
찬 이슬을 지닐 때까지 구부러들어야 했던
어둠의 설움의 친정이었을,
숲에선 하루해를 핥아준 냄새가 나고
지하 대수층에 다니러 가는 해가 밤나무 밑으로 접어들면
마른 새가 엎드려 있어도 좋을
눈동자 같은 둥지가 밝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오 숲길은,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을 때가 있어서
두고 가는 사람을 짐작하지 않지만
사람과 다른 과일도 있다는 말을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뉘엿뉘엿 눈발 속으로 가는 일
여러 날 오체투지해가다
때 없이 잠에 빠뜨리는
서거나 쓰러지는 몸
당나귀 등에
눈밭 여기저기서 주운 나무토막 쇠똥이 모이는
자루가 삐뚜루 걸쳐 있다
오늘 밤 달빛이 되는 영혼이 우둘투둘 들어 있는 것 같다
가죽 치마 깔고 쓰러지면
어디서는 눈보라가 어디서는 모래바람이
우는 마음을 알아듣는 것 같다
귀 뒤에선
나무 하나가 빗자루를 들고 휘어지고 있을 텐데
앞서 있던 전봇대들이 어느새 보이지 않는다
판자 조각을 댄 가죽 장갑 땅에 내리치면
낑낑대며 생의 한 귀퉁이 잡아 굴리느라
무릎뼈처럼 구부러지던 계절이 생각난다
내 안의 붉은 머리채에 낚여
꽈당 엎어지는
참, 사랑을 쉬는 일도 중요한 일이네
배꼽 속에 성산이 꼬르륵 부푼다
퇴근 열차
1호 열차에 한 손이 손목만 있는 사내와
내가 앉아 간다
의자 위에 올린 사내의
발바닥에 든 멍을 발등이 가만히 누르고 있다
가랑이 어딘가에서 다시 덜컹거리는 기차,
텔레비전처럼 굴러오는 기억의 역들을
부은 다리 사이로 불러들이는지
안쪽으로 도는 바퀴가 경사를 긋는다
그 바람에 오래전 잊은 반지 같은 것이라도
병 깊은 구석에서 굴러나오는지
생수병 든 손으로
생수 흘린 턱을 닦는 사내
입술에 손등을 댄 채 지그시 눈을 감고만 있다
무릎 위 뭉툭한 손목은 안으로 힘든 상처를 안아
과거 같은 걸 붙들 수가 없겠다
잠그지 못한 기억의 물소리 사이
1호차에서 만난 손발들은 서로 말을 나누었을까
밤의 맞은편으로 기차가 덜커덩거릴 때
간병
흐린 눈이 우묵해지는 봄밤
흑룡강은 이제 여기서 흘러서 갈 수 없으니
치매가 오면 갈 수 있을까
더듬더듬 수면을 취하며 찾아가보는 강
잠의 명경 속으로
빨간 십자가 쏟아지는 서울
치매 노인 똥오줌을 닦다가
갈 때가 오면 어쩌나 흑룡강은 아직 추울 텐데
검버섯 붙은, 떨어진 신발 같은 날을
뒤로하고 흘러갈 테지
그런 날이어야 또 내게 올 테지 착한 환자가 있는
흐린 서편으로 간병을 하러 가라며
병동 공터
모르는 아버지를 위해
목련꽃 한 짐을 지고 서 있다
염치없어 밤이라도 새야 하는 자식이 생길 때까지
지루한 오후
문틈으로 하이힐이 넘어오듯 새 한 마리가
언젠가 낙서로 지나간 까만 눈동자를 하고
아, 딱새 하고 내밀었다
지루한 골목이 있는 오후
간격을 좁히기 위해 질질질 발을 끄는
한 사내가 두 손을 좀, 하고 내밀었다
손저울에 누가 밥을 푸나
우리의 무엇은 단번에 단다고 할 수밖에 없는
나의 어디라고 할 수밖에 없는
지루한 오후
저녁의 연인들
침대처럼 사실은 마음이란 너무 작아서
뒤척이기만 하지 여태도 제 마음 한번 멀리 벗어나지 못했으니
나만이 당신에게 다녀오곤 하던 밤이 가장 컸습니다
이제 찾아오는 모든 저녁의 애인들이
인적 드문 길을 한동안 잡아들 수 있도록
당신이 나를 수습할 수 있도록
올리브나무 세 그루만 마당에 심었으면
진흙탕을 걷어내고
진흙탕의 뒤를 따라오는 웅덩이를 걷어낼 때까지
사랑은 발을 벗어 단풍물 들이며 걷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이 아니라면 어디 사는지 나를 찾지도 않았을
매 순간 당신이 있었던 옹이 박인 허리 근처가 아득합니다
내가 가고,
나는 없지만 당신이 나와 다른 이유로 울더라도
나를 배경으로 저물다 보면
역 광장 국수 만 불빛에 서서 먹은 추운 세월들이
쏘옥 빠진 올리브나무로
쓸어둔 마당가에 꽂혀 있기도 할 것 같습니다
당신이 올리브나무로 내 생애 들러주었으니
이제 운동도 시작하고 오래 살기만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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