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담대한 희망, 버락 오바마, 랜덤하우스, 2008(1판 4쇄)
사람은 대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자신의 결점에 익숙해지게 마련인데, 가령 늘 같은 식으로 생각하는 버릇의 경우 맹점이 되기도 한다. 이런 맹점은 타고난 것이거나 자란 환경 탓일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해진다. 절름거리는 걸음걸이가 틀림없이 고관절의 통증으로 이어지는 것만큼이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런 성격상의 결점이 더 나빠질 것은 분명하다.
나서 자란 주가 진보 성향이든 보수적이든 간에 국민들은 정치가들이 정책을 놓고 토론을 벌일 때 정직하지도, 엄격하지도 않으며 기본적으로 상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직관한다.
국민들은 오늘날의 정치를 사명이 아닌, 하나의 직업으로 생각하고 정계에서 논란을 벌이는 것을 구경거리나 쇼 정도로 치부한다.
나는 클린턴과 깅리치 간의 결론 없는 논쟁이나 2000년, 2004년 선거를 지켜보면서 전국적인 무대에서 공연되는 베이비 붐 세대의 사이코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오래전 몇몇 대학 캠퍼스에서 만들어 냈을 법한, 묵은 원한과 복수극에 뿌리를 둔 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가끔 들었던 것이다.
우리는 얼굴에 붉은색이나 푸른색을 칠한 뒤 우리 편에 응원을 보내고 상대편에 야유를 퍼붓다가 우리 편이 거의 마지막에 일격을 가하거나 비열한 플레이로 상대편을 꺾어도 그대로 환호한다. 중요한 것은 승리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라크에서 사랑하는 이를 잃은 가족에게 편지를 쓰거나 학비 보조금 예산이 삭감되면서 대학을 중퇴한 유권자의 전자 우편 내용을 읽을 때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행위와 조치가 국민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되새긴다. 권력자들 자신은 그런 영향에 따른 대가를 거의 한 번도 치러 본 적이 없다.
모든 사람의 가치관이 존중받을 만한 값어치가 있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미국의 민주주의는 좀 더 원활하게 굴러갈 것이다. 예를 들어, 취미로 사냥을 즐기는 사람이 총기를 아끼는 마음은 진보적인 사람이 도서관의 책을 아끼는 심정과 비슷하다는 점을 진보 세력이 인정해 준다면, 또 대부분의 여성이 자녀 출산에 대한 자유로운 의사 결정권을 지키려는 마음은 복음주의자들이 신을 섬기고 받들 권리를 지키려는 마음과 다를 바 없다는 점을 보수 세력이 인식한다면, 미국의 민주주의는 더욱 발전하리라는 것이다.
정치인이나 이익 집단들은 추구하는 이념적 목표를 위해 오히려 갈등과 대립을 반기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임신 중절에 반대하는 대부분의 사회운동가들은 입법부에 있는 동조자들에게 임신 중절 방법 중 하나인 부분 분만 낙태(partial-birth abortion) 시술의 빈도를 대폭 줄일 수 있는 타협안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공개적으로 권고했다. 이런 시술이 일반이게 나쁜 이미지를 심어 주어 임신 중절 반대자들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되는 만큼 그대로 놔두라는 것이었다.
나는 정치인들이 계산된 발언이라거나 엉터리 같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면서 가치 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히는 일이 왜 그렇게 어려운지 궁금할 때가 많다. 내 생각에 일부 원인은 이런 데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처럼 공직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미리 짜놓은 각본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공직에 출마한 후보자들이 자신의 가치관을 드러내기 위해 활용하는 제스처가 흑인 교회나 전국자동차경주연맹 트랙 같은 곳을 방문하거나 아니면 유치원에 찾아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는 등의 정해진 형식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일반 국민으로서는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떤 것이 정치적 연출인지 가려내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다.
더구나 오늘날의 정치 행태 자체가 가치 같은 문제에 얽매이지 않는 듯하다. 정치 활동과 정치성 발언을 보면 우리가 보통 수치스럽다고 생각하는 행태를 그대로 용인할 뿐만 아니라 그런 행동으로 종종 이익을 얻기도 한다. 이야기를 날조하거나 다른 사람의 발언 의도가 분명한 데도 이를 왜곡하는가 하면, 타인을 모욕하거나 타인의 언행에 불순한 동기라도 있는 것처럼 의문을 제기한다. 아니면 타인에게 타격을 줄 만한 꼬투리를 잡기 위해 사적인 부분을 꼬치꼬치 파고든다.
우리가 자신의 가치 기준을 위해 대가를 지불할 뜻이 없다면,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얼마간의 희생을 감수할 용의가 없다면, 그 가치를 진정으로 신봉하고 있는지 자기 자신에게 질문해 봐야 한다.
최소한 이런 기준에 비춰 볼 때 오늘날 미국인들은 부와 날씬한 몸매, 젊음, 명성, 안전, 오락 말고는 별다른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더러 있다. 우리는 다음 세대에 남겨 줄 유산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면서도 산더미 같은 부채를 넘겨 준다. 기회 균등의 가치를 인정한다면서도 수백만의 빈곤층 어린이들이 고초를 겪는 것을 그대로 방관한다. 또 가족을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가족의 역할을 날이 갈수록 위축시키는 형태로 경제 구조와 사회생활을 꾸려 가고 있다.
나는 가끔 내 강의가 캠퍼스 건너편에서 수업하는 신학 교수의 강의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성서를 가르치는 신학 교수처럼 나도 학생들이 실제로는 헌법을 한 번도 읽어 보지 않은 채 아는 척 하고 있다고 느낀 적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귀동냥으로 알게 된 헌법 조문을 들어 자신의 논거를 뒷받침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주장과 상충되는 것 같은 내용을 애써 외면하는 데 익숙했다.
미국 헌법은, 치밀한 구성과 내용으로 미국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에게 시민적 권리를 아낌없이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테두리를 벗어난 사람들은 보호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인디언이 백인과 맺은 협약 따위는 정복자의 법정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었고, 흑인 드레드 스콧(Dred Scott, 그는 1857년 2월 자유 주인 일리노이와 미네소타 주에 살았다는 사실을 근거로 자신과 가족이 자유 신분임을 인정해 줄 것을 연방 법원에 재소했으나 법원은 미국 헌법이 흑인을 시민으로 인정하지 ㅇ낳으므로 노예는 시민권을 가질 수 없고 따라서 비록 자유 주에 거주했다 하더라도 흑인은 자유를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에 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권리도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옮인이 주)은 자유인의 신분으로 대법원 법정에 들어섰다가 노예 신분으로 나오게 되었다.
어쩌다 우연히 미국 상원 의원이 된 사람은 거의 없다. 상원 의원이 되려면 최소한 과대망상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 즉, 출신 주 내의 온갖 유능한 사람들 중에서 유독 자신이 이들을 대변할 수 있다는 자격이 있다는 믿음 말이다.
돈으로 승리를 보장받을 수는 없다. 돈으로 열정과 카리스마, 언변을 살 수도 없다. 그러나 돈이 없어서, 선거 자금의 거의 전액이 투입되는 TV광고를 활용하지 못하면 패배하기 십상이다.
최소한 일반 대중에게 투영되는 내 실체는 미디어가 전하는 모습일 뿐이다. 내 발언 또한,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미디어가 전하는 내용일 뿐이다. 나는 미디어가 그런 사람이 되었다고 전하는 모습 그대로의 사람이 된다.
정치인 사이에 예의가 점차 줄어든 데는 언론에도 일부 책임이 있다. 정치인들의 예의 바른 말투나 행동을 언론은 따분하게 받아들인다. 그 때문에 정치인이 “상대방의 견해를 이해한다”거나 “그 문제는 정말 복잡한 측면이 많다”라는 식으로 말하면 그런 발언은 기사 속에 인용되지 않는다. 반대로 공격적인 발언을 하면 카메라가 몰려온다. 가끔 기자들이 본분을 잊고 이런 발언을 유도하기도 한다. 자극적인 질문으로 격앙된 반응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2005년 초 『뉴스위크 Newsweek』는 관타나모 수용소에 근무하는 미국 경비병과 조사관들이 수감자들을 괴롭히고 학대했으며 특히 코란을 찢어 수세식 변기에 흘려 보냈다는 주장을 보도했다. 백악관은 이런 보도 내용이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펄쩍 뛰었다. 확실한 증거가 없는 데다, 이 기사로 말미암아 파키스탄에서 폭력 시위가 벌어지자 『뉴스위크』는 기사 취소라는 자멸적인 조치를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국방부는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근무하는 일부 요원들이 실제로 여러 차례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는 내용의 조사 보고서를 발표했다. 부적절한 행위로는 여성 요원이 심문을 받는 수감자들에게 월경 피를 문지르는 척한 사례, 최소한 한 차례 경비병이 코란과 수감자에게 오줌을 뿌린 사례 등이 있었다. 그늘 오후 <폭스 뉴스 Fox News>는 이렇게 보도했다.
국방부는 코란이 변기 속에 버려져 물에 쓸려 내려갔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최근 시카고 웨스트사이드 지역에 위치한 도지 초등학교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이 학교는
여러 평가 항목에서 최하위에 가까운 학교였는데 당시 적극적인 개혁을 모색하고 있었다. 나는 몇몇 교사들과 당면 과제를 놓고 의견을 나누고 있었는데 한 젊은 교사가 ‘이 아이들 신드롬(These Kids Syndrome)’ 이라는 희한한 용어로 문제점을 지적했다. 즉 미국 사회아 ‘이 아이들’이 왜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가에 대해 수많은 변명거리들을 찾아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이 아이들은 형편이 어려운 집안 애들이지요.” “이 아이들은 너무 뒤떨어져 있습니다.”
이 교사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화가 치밀었어요”라고 내게 말했다.
“이 학생들은 ‘이 아이들’이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이지요.”
나는 앞으로 미국 경제의 앞날은 젊은 교사의 지적을 얼마나 가슴 속 깊이 새기느냐에 따라 크게 좌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이라면 건강하거나 부유하거나 아니면 그냥 운이 좋은 사람은 더 운이 좋거나 부유하거나 건강해질 것이다. 반대로 가난하거나 몸이 불편하거나 운이 나쁜 사람에게는 그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뻗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경제를 지속적으로 성장시키고 견실한 중산층을 유지하는 묘책이 될 수 없다. 또한 사회적 응집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도 아니며, 다른 사람이 잘 되어야만 나도 잘 될 수 있다는 우리 모두의 가치에도 역행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우리 모두를 한 국가의 국민으로 보기도 어렵다.
미국인이 종교적인 국민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최근 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인 중 95퍼센트가 신을 믿고 3분의 2 이상이 교회에 다니며 37퍼센트는 독실한 기독교인을 자처하고 이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은 진화론보다 창조론을 믿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중에 TV에 등장한 복음 전도자들 사이에서 일종의 유행처럼 번지기 전부터 흑인 교회의 전형적인 설교에서는 모든 기독교인들도 일반인과 똑 같은 탐욕과 원한, 육욕, 분노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을 거침없이 인정했다.
인종 문제를 명확하게 인식하려면 두 쪽으로 나뉜 스크린에 이 세상을 비춰 보아야 한다. 즉, 우리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아메리카의 모습을 한쪽에 비추고 다른 한쪽에는 현실 그대로의 모습을 비춘 뒤 아무런 편견 없이 바라보는 것이다.
TV에서는 아랫배가 불쑥 튀어나온 천진난만한 어린이 모습 대신에 흑인 약탈자와 노상강도의 모습을 자주 보여 주었다. TV뉴스에서는 남의 집 가정부로 일하면서 어떻게든 가계를 꾸려 나가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흑인 여성의 모습보다는 오로지 더 많은 지원금을 받겠다는 생각에서 임신을 하는 이른바 ‘복지혜택으로 풍요롭게 사는 여인(welfare queen)’ 에게 초점을 맞추는 일이 더 잦았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지도를 펼쳐 놓고도 인도네시아를 찾아내지 못한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들으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지난 60년 동안 인도네시아의 운명은 미국의 외교 정책에 좌우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주로 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비해 편성된 국방 예산과 군사력 구조가 이제 전략적 의미를 거의 상실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미국의 2005년도 국방 예산 총액은 5,220억 달러를 웃돌았다. 국방 예산 순위 면에서 미국 다음의 2위부터 30위까지를 차지한 29개국의 방위 예산 총액을 합쳐도 미국의 국방 예산에 못 미친다.
나는 사람들이 과연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다. 즉, 우리가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한 걸음 올라서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호황과 불황, 전쟁과 평화, 오르막과 내리막의 순환 과정을 따르고 있는 것인지 잘 알 수 없을 때가 있는 것이다.
1950년대 이래 결혼율이 계속 떨어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렇게 결혼율이 떨어진 이유 중 일부는 학업을 마치거나 경력을 쌓기 위해 결혼을 늦추는 사람이 많아진 데 있다. 그러나 45세 연령층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여성의 89퍼센트와 남성의 83퍼센트가 최소한 한 번은 결혼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지난 50년 동안 가족이나 가정의 특성이 바뀌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혼율은 1970년대 말과 1980년대에 걸쳐 절정에 이르렀다가 그 이후 21퍼센트나 줄었지만 그래도 첫 결혼의 절반은 이혼으로 끝난다.
당시에 이들이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낙마한 뒤에는 곧바로 말안장에 다시 앉히는 것이 최선이라는 이론에 따라 전당 대회를 참관하게 하면 내가 좌절감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 그리고 다른 누구도,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줄 수 없어. 자신만이 그것을 찾아 낼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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