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네르바, 2008년 가을(31호)
그녀는 프로다
이기와
수족관 같이 좁고 어두운 지하실 단칸방
물갈이 하지 않은 혼탁한 수질 속
지체장애자인 그녀와 치매인 그녀의 어머니가 산다
그녀의 어머니가 투명 랩을 뜯지 않은 채
자장면 위에 장을 붓는 순간
단칸방은 아내 시커먼 바다로 번들거린다
치맛자락에 쏟아진 길쭉한 바다를 치대며
단무지처럼 기억이 노란 어머니가
싱글싱글 웃는다
그러자 그녀의 삐뚜름히 돌아간 입에서도
찰진 반죽의 웃음이 쏟아진다
얼떨결에 멀쩡한 나도 따라 웃어보지만
내 웃음은 가짜, 속이 덜 익은 군만두
영 서툴다
그녀는 프로다
피할 수 없는 난감함을
웃음으로 커버하는 노련한 선수다
발가락에 들린 숟가락이 삐뚤빼뚤 입을 찾아가는 길
보기에 아슬아슬 멀고도 험하다
그러나 그녀는 프로다
불완전하면서 완전하다
외줄타기 곡예사처럼 조마조마함을 연출하지만
실수하는 일 없이 면발을 입으로 가져간다
형제나 이웃, 신의 가호도 없이
의연하면서도 정확하게 밥의 길을 찾는다
사랑의 기술
네가 마지막 선물이라고 준 책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건네준
Art를 기술이라고 번역한 책
몸살을 앓으면서 읽었다
사랑도 기술이 필요하다고
그럴까, 그럴까?
미소짓는 기술, 걷는 기술
허리 비틀며 눈흘기는 기술이 아니고
혼자 피었다 혼자 쓰러지면서
어느새 벌판에 이르는 기술
하늘을 나는 새나 바닥을 기는 쥐같은 것들은
어디서 어떻게 늙어 자기 몸을 눕히는지
볼 수 있을까? 보고 싶다
찌푸린 한 구름을
너와 나의 머리가 함께 이고 있다면?
그럴 수는 없다
너를 지우고 나를 지우면서
쥐구멍을 뒤져 늙은 몸을 눕힌 쥐를 만날 때까지
가보려고 했다
씨름 선수가 등배지기의 기술을 익히듯이
새끼새가 벌레를 받아먹고 퍼덕이다가
어떻게 절벽 아래로 내리 꽂히는지
나에게 읽히고 읽혔었다
삼키고 토하고 삼키다가
언제부터 내버려 두었는지 모르겠다
감정의 발자국들
어룽대며 변해가는 페이지들 위에서
먼지에 덮여 있었다
안녕
멀리서
천둥 같은 게
소리는 들리지 않고
빛만 번쩍이는 게
그런 게
풀잎 같은 게
갑자기 돋아나
깊은 겨울이라서
그럴 리가 없는데도
어린 게
길가에 새파랗게
흔들리고 있었다
곁에 있던 네가
아득하게 멀어지면서
낮은 처마들이
손 들어
경례를 붙이고
안녕히 계십시오.
냇물에 철조망
우리 모두는 사랑하는 이를 향하여 흐르는 강물이다
어제는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아닌 것 같다
조금 바람이 불었는데
한 가지에 나뭇잎, 잎이
서로 다른 곳을 보며 다른 춤을 추고 있다
저 너머 하늘에
재난 속에서 허덕이다가 조용히 정신을 차린 것 같은 모습으로
구름도 흘러가고 있다
공중에서 무슨 형이상학적 추수를 하는 것 같다
사실 시인이 자기 안에 평론가를 하나 가지고 있는 것이 나쁠 것은 없다. 적어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는 알려줄 테니까.
슬픔 혹은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시를 쓰게 촉발하고 무언가를 향해 추진해 나가는 원동력이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전부일 때 감상적 감정 그것 뿐이 되고 만다. 감상적 감정은 대상을 똑바로 보는 것을 방해한다.
“시에 무슨 근사한 얘기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그 “믿음”에 대한 전복,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미 아름답다고 인정받은 대상을 향해 다시 한번 그 대상을 새로운 수식어로 예찬하는 것이 시라고 믿는 사람들의 관습적 생각, 그것에 대한 반발을 말하는 것이다. 시는 이미 관념화 된 이 세계의 대상들, 언어들 그것을 다시 새롭게 인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어야 한다는 말인 것이다.
달빛 문장
운주리 목장에 달이 뜨자
쇠똥구리 한 마리 길 떠나기 시작하네
제 몸보다 수십 배 무거운 쇠똥을 빚어서
온몸으로 굴려서 가네
작은 몸이 힘에 겨워 쇠똥에 매달려 가는 것 같네
문득 멈추어 달빛을 골똘히 들여다보네
달빛 아래서만 제 길을 찾는 두 눈이 반짝이네
마치 달빛 문장을 읽는 것 같이 보이네
무슨 구절일까 밑줄 파랗게 그어가며
반복해서 읽고 또 읽어가네
갑옷 속의 붉은 심장이 팔딱팔딱 뛰네
어느 날 내게 보여준 네 마음에
밑줄 그으며 몇 번씩 읽어내려 가던
눈부신 순간이 생각났네
맑은 바람 한 줄기가 쇠똥구리 몸 식혀주네
태어나고 죽어야 할 집 한 채 밀고 가네
드넓은 벌판에 아름다운 집 한 채 밀고 가네
그날 네 마음이 내 안에서 자라
꿈틀꿈틀 내 몸을 밀고 가네
사십세
맹문재
집에 가야 할 시간이 훨씬 지난 술집에서
싸움이 났다.
노동과 분배와 구조조정과 페미니즘 등을 안주 삼아
말하는 일로 먹고사는 사람들과 즐겁게 술을 마시고 있는데
개새끼들, 놀고 있네
건너편 탁자에서 돌멩이 같은 욕이 날아온 것이다
갑자기 다한 무안에
그렇게 무례하면 되느냐고 우리는 점잖게 따졌다
니들이 뭘 알아, 좋게 말할 때 집어치워
지렛대로 우리를 더욱 들쑤시는 것이었다
내 옆에 있던 동료가 욱하고 일어나
급기야 주먹이 오갈 판이었다
나는 싸워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단단해 보이는 상대방에게 정중히 사과를 했다
다행히 싸움은 그치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굽신거린 것일까
너그러웠던 것일까
노동이며 분배를 맛있는 안주로 삼은 것을 부끄러워한 것일까
나는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싸움이 나려는 순간
사십세라는 사실을 생각했다
이사
전에 살던 사람이 버리고 간
헌 장판을 들추어내자
만 원 한 장이 나왔다
어떤 엉덩이들이 깔고 앉았을 돈인지는 모르지만
아내에겐 잠깐 동안
위안이 되었다
조그만 위안으로 생소한
집 전체가 살 만한 집이 되었다
우리 가족도 웬만큼 살다가
다음 가족을 위해
조그만 위안거리를 남겨 두는 일이
숟가락 하나라도 빠트리는 것 없이
잘 싸는 것보다
중요한 일인 걸 알았다
아내는
목련나무에 긁힌
장롱에서 목련꽃향이 난다고 할 때처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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