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품 방아품, 오탁번, 원서헌, 2008(500부 한정판)
섣달 초손에 아버지 제사를 지낼 때의 추위와 배고픔은 소년시절의 소중한 슬픔이 되어왔다.
나를 줄기차게 괴롭혀 온 현실에 그대로 소속되는 것은 패배를 의미한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의 못생긴 산과 시시한 강물이 주는 저 악마의 아름다움, 이 모든 것의 나의 문학의 세계요 내 영혼의 고향임을 새삼 알았다.
거의 차이가 없는 정도의 차이뿐
하관(下棺)
이승은 한줌 재로 변하여
이름모를 풀꽃들의 뿌리로 돌아가고
향불 사르는 연기도 멀리 멀리
못 떠나고
관을 덮은 명정의 흰 글자 사이로
숨는다
무심한 산새들도 수직으로 날아올라
무너미재는 물소리가 요란한데
어머니 어머니
하관의 밧줄이 흙에 닿는 순간에도
어머니의 모음을 부르는 나는
놋요강이다 밤중에 어머니가 대어주던
지린내나는 요강이다 툇마루 끝에 묻힌
오줌통이다 오줌통에 비치던
잿빛 처마 끝이다
이엉에서 떨어지던 눈도 못 뜬
벌레다
밭두럭에서 물똥을 누면
어머니가 뒤 닦아주던 콩잎이다 눈물이다
저승은 한줌 재로 변하여
이름모를 뿌리들의 풀꽃으로 돌아오고
기침
기관지를 앓는 딸아이를 데리고
아침 아홉시 동부시립병원으로 가면서
나는 평화롭다 애비 손을 잡고 가는 딸은
기침이 나와도 그저 즐겁기만 하므로
나는 평화롭다 X레이에 나타난 딸아이의
궁형의 갈비뼈와 안개 같은 허파와 암흑
그 사이에서도 나는 평화롭다 평화롭다
동대문구에서 제일 예쁜 딸아이는
그림일기를 거짓말로 그렸다고 울지만
일기는 거짓말로 써도 된다고 달래는 대학교수
나는 평화롭다 평화주의자이므로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다지도 살고 싶은가
미당이 이렇게 노래한 것은 기막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살고 싶은가를
죽고 싶은가로 교정하는데
이 교정에 이의 있는 자 있으면
안암동 5가 1번지 문패도 없는 이름도 없는 캠퍼스,
그 앞으로 올 것
선생님은 참 행복하시네요
행복 속에서 어떻게 글이 나오지요?
오냐오냐 나는 행복해서 미칠 지경이다
시가 욕설이 되는 슬픔을
문학이 땅에 떨어지는 과일이 아니라
피어나는 잎이라는 것을 겨울을 참는 아픔이라는 것을
사이비 정치학도여 너희들은 아는가
딸아이의 기관지병은 보름이면 낫는다는데
내 기침은 15년이 지나도 가망이 없는 날에
평화에 들떠서 이 글을 적는다
고향
아침 천등산은 구름으로 허리를 숨기고
아주 요염한 여인처럼 성감대를 감추고
잘 다듬은 쪽진 머리만 보인 채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온 방탕한 나를
은밀한 침실로 유혹하듯 손짓해 불렀다
야뇨증이 심해서 바짓가랑이는 젖고
기계충이 새하얀 머리는 똥누면서도
가려웠다 어디에도 내가 숨어서
말라붙은 코딱지를 빨아먹을 수 있는 곳
평화로운 장소는 없었다
허허로운 벌판을 쏘다녔다
저 멀리 물러가 있는 천등산이
나를 따라서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고
이제는 꼭 내 나이만한 슬픔이 되어
똥누면서도 가렵기만 했던 그리움 못 버린 채
아침 구름 불러모아 보고 싶은 곳 가리우고
손짓해 불러도 갈 수 없는 곳으로
요염하게 유혹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스무 살 서른 살의 위험한 고개를 지나와
나를 유혹하는 천등산의 아침 구름은
하늘로 날아오르면서 눈물짓는다
산발치 조그만 고향마을 언덕에서
살찐 메뚜기 게으르게 뛰어오르고
늦가을 매미 이승을 하직하며 운다
벙어리장갑
여름내 어깨순 집어준 목화에서
마디마다 목화꽃이 피어나면
달콤한 목화다래 몰래 따서 먹다가
어머니한테 나는 늘 혼났다
그럴 때면 누나가 눈을 흘겼다
- 겨울에 손 꽁꽁 얼어도 좋으니?
서리 내리는 가을이 성큼 오면
다래가 터지며 목화송이가 열리고
목화송이 따다가 씨아에 넣어 앗으면
하얀 목화솜이 소복소복 쌓인다
솜 활끈 튕기면 피어나는 솜으로
고치를 빚어 물레로 실을 잣는다
뱅그르르 도는 물렛살을 만지려다가
어머니한테 나는 늘 혼났다
그럴 때면 누나가 눈을 흘겼다
- 손 다쳐서 아야 해도 좋으니?
까치설날 아침에 잣눈이 내리면
우스꽝스런 눈사람 만들어 세우고
까치설빔 다 적시며 눈싸움한다
동무들은 시린 손을 호호 불지만
내 손은 눈곱만큼도 안 시리다
누나가 뜨개질한 벙어리 장갑에서
어머니의 꾸중과 누나의 눈흘김이
하얀 목화송이로 여태 피어나고
실 잣는 물레도 이냥 돌아가니까
엘레지
말복날 개를 잡아 동네 술추렴을 했다
가마솥에 발가벗은 개를 넣고
땀 뻘뻘 흘리면서 장작불을 지폈다
참이슬 두 상자를 다 비우면서
밭농사 망쳐놓은 하늘을 욕했다
술이 거나해졌을 때
아랫집 김씨가 나에게 말했다
- 이건 오씨가 먹어요, 엘레지요
엉겁결에 길쭉하게 생긴 고기를 받았다
엘레지라니? 농부들이 웬 비가(悲歌)를 다 알지?
- 엘레지 몰라요? 개자지 몰라요?
30년 동안 국어선생 월급 받아먹고도
『엘레지』라는 우리말을 모르고 있었다니!
그날 밤 꿈에서 나는 개가 되었다
가마솥에서 익는
나의 엘레지를 보았다
죽음에 관하여
1
왼쪽 머리가
씀벅씀벅 쏙독새 울음을 울고
두통은 파도보다 높았다
나뭇가지 휘도록 눈이 내린 세모에
쉰아홉 고개를 넘다가 나는 넘어졌다
하루에 링거 주사 세 대씩 맞고
설날 아침엔 병실에서 떡국을 먹었다
수술 여부를 결정하는 의사가
첩자처럼 병실을 드나들었다
수술 받다가 내가 죽으면
눈물 흘리는 사람 참 많을까
나를 미워하던 사람도
비로소 저를 미워할까
나는 새벽마다 눈물지었다
2
두통이 가신 어느 날
예쁜 간호사가 링거 주사 갈아주면서
따듯한 손으로 내 팔뚝을 만지자
바지 속에서 문뜩 일어서는 뿌리!
나는 남몰래 슬프고 황홀했다
다시 태어난 남자가 된 듯
면도를 말끔히 하고
환자복 바지를 새로 달라고 했다
- 바다 하나 주세요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엉뚱했다
- 바다 하나요
바지바지 말해도 바다바다가 되었다
언어 기능을 맡은 왼쪽 뇌신경에
순식간에 오류가 일어나서
환자복 바지가
푸른 바다로 변해 버렸다
아아 나는 파도에 휩쓸리는
갸울은 목숨이었다
방아타령
- 여보, 카섹스가 뭐래유?
요즘의 성풍속이 TV에 방송되자
계집이 사내에게 물었다
- 병신, 자동차 안에서 방아 찧는 것도 몰러?
마당의 모깃불이 시나브로 사위어갔다
이튿날 사내는 계집을 경운기에 티우고
감자밭으로 감자 캐러 나갔다
산비둘기가 싱겁게 울고
암놈 등에 업힌 메뚜기는
뙤약볕이 따가워 뺨 부볐다
- 여보, 우리도 카섹스 한 번 해 봐유
- 뭐여?
- 경운기는 차 아니래유?
사내는 경운기를 냅다 몰았다
계집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바소쿠리 가득 감자를 캐면서
계집이 사내를 핼긋핼긋 할겨보았다
- 저, 병신!
사내는 욕을 하며
구들장보다 뜨거워진 경운기에
계집을 태웠다
- 아유, 아유, 나 죽네
솔개그늘 아래 경운기 위에서
계집은 숨이 넘어갔다
뻐꾹뻐꾹 울던 뻐꾸기가
울음을 딱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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