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신춘문예 당선시집, 문학세계사, 2009(초판1쇄)
여치 타이머
민구
돌아눕다가 그만
여치를 놀래켰다
꿈에서 비를 피한답시고
여치가 사는 집 문을 두드린 모양이다
여치는 불청객을 내모는 대신
지구 저편의 가을을 끓여
따끈한 수프를 내왔다
지난날
내가 걷어찬 나무의 마른 잎들이
그 위에 띄워져 있었다
허겁지겁 음식을 비우자
그는 가볍게 웃어 보이며 한 그릇을 마저 권한다
여치는 탁자에 그릇을 올려놓고
강아지풀을 꺼내어 느슨해진 줄을 바람에 조이더니
앰프를 옮겨달라고 부탁했다
그건 어젯밤 내가 던진 돌이었다
돌아눕다가 듣는 신음소리
여치는 내게 들리지 않는 소리로 조용히 울고 있는데
창문 닫고 돌아누웠을 때 더 선명해지는 울음이여,
누가 내 귀를 앰프 삼아 울고 가는가
무럭무럭 구덩이
이곳은 내가 파 놓은 구덩이입니다
너 또 방 안에 무슨 짓이니
저녁밥을 먹다 말고 엄마가 꾸짖으러 옵니다
구덩이에 발이 걸려 넘어집니다
숟가락이 구덩이 옆에 꽂힙니다
잘 뒤집으면 모자가 되겠습니다
오랜만에 집에 온 형이
내가 한눈파는 사이 구덩이를 들고 나갑니다
달리며 떨어지는 잎사귀를 구덩이에 담습니다
숟가락을 뽑아 들고 퍼먹습니다
잘 마른 잎들이라 숟가락이 필요 없습니다
형은 벌써 싫증을 내고 구덩이를 던집니다
아버지가 설거지를 하러 옵니다
반짝반짝 구덩이
외출하기 위해 나는 부엌으로 갑니다
중력과 월요일의 외투가 걱정입니다
그릇 사이에서 구덩이를 꺼내 머리에 씁니다
나는 쏙 들어갑니다
강아지 눈에는 내가 안 보일 수도 있습니다
친구에게 전화가 옵니다
학교에서 나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나는 구덩이를 다시 땅에 묻습니다
저 구덩이가 빨리 자라야 새들이 집을 지을 텐데
엄마는 숟가락이 없어져서 큰일이라고 한숨을 쉽니다
손끝이 말해줍니다
주머니에 들어 있는 증명사진을 만지며 걷습니다
뒤집히지 않았다면 이쯤이 어깨 여긴 머리
살짝 구겨도 봅니다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여전히 방긋
발은 굳이 보여줄 필요가 없습니다
사진관에 간 것만으로
다리든 그 비슷한 것이든 증명됩니다
내가 지금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는 건 우연입니다
나는 일상에서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다리가 걸을 때 가끔 머리는 어디에 가 있습니다
나는 마침 나도 모르는 사이 집에 다 왔습니다
이렇게 절반이 확인됐습니다만
정신없는 날에는
나머지 반이 잘 있다고 믿는 게 조금 불안합니다
우리는 웃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진이 필요합니다
연못
허리 굽은 노인이 깊은 꿈 속으로
연못처럼 고이고 있는 새벽
선잠에 돛을 달아 물결을 따라가 보려 했지만
꿈은 어느새 몸을 뒤척여 자취를 감추고
노인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잠을 설치고 일어나 보니
갈현동 이 좁은 골목으로도 계절이 꺾여 들어오고 있었다
오랫동안 골목 위로 시간은 무수히 흘러갔지만
모퉁이 담벼락 앞에 다시 피는 산수유,
그러고 보니 시간은 그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오는 것인지도 몰랐다
새벽 창의 중심부에 붙은 산수유를 따라
다닥다닥 늘어붙는 생각들, 순간
창의 가장자리로 한 노인이 고개를 내밀었다가 사라졌다
노인의 우연을 질문하지만 대답해주는 이는 없다
그렇게 어머니를 만나야 했다
잠을 설치고 부스럭댈 때마다
말없이 깨어 있던 어머니는 없다 살아 있다면
백발이 성성했을 어머니는
젊은 그대로의 모습만 보여주었다
늙은 어머니를 슬퍼하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다 하지만
젊은 어머니는 드물게 다시 찾아와
골목 위의 배 한 척 띄울 수 없는 연못처럼
밤 속에 고였다, 간다
바람과의 여행
바람의 청자가 되어 오래 걸었다 그리고
어느 변방을 지나다 상인에게서 산 보이차
고원을 넘어오는 동안
보이차에는 바람의 무게가 더해진다는데 어쩌면
그건 무게가 아니라 바람이 놓고 간 음절이리라
경사를 오르며 읊는 경전처럼
상인들의 가쁜 입 속을 헹궜을 바람
차가운 저녁을 뚫는 말의 등을 밀며
제 살을 비벼 내는 소리가
차의 잎맥마다 살아 있다
떠나간 상인들을 생각하며
이역의 여관방에서 그 바람을 씹어본다
지금 그들은 모닥불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며
날 때부터 말 울음소리를 배워야 하는 유년에 대해
길의 맥락을 앓던 밤에 대해 이야기하겠지
안개가 눕고 있는 고원 위에 입김이 짙어지면
달빛에 손을 비비며 추위를 견디겠지
밤사이 상인들의 젖은 몸을 뒤진 바람이
보이차의 음절에 더해질 텐데
잠이 오지 않아 꺼낸 편지지 앞
고향을 떠올리며 첫 문장을 쓰는 일이
그들의 표정을 이해하는 것처럼 어렵다
여행이란 잊었던 언어들을 더듬으며
내면의 이역을 찾는 시간인가
달빛이 낮은 조도로 윤색하는 방
나는 입 속에 맴돌던 바람을 풀어준다
외풍 드는 방
어둠이 방을 훔쳐갔다 외풍에 떨며 깨자 누군가 생(生)을 던진 수면처럼 피부가 차다 태어나 처음 본 저녁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죽은 친구의 체온이 이러했을까 병든 이의 성대를 핥거나 골방에 잠든 노인의 벌어진 입속을 거쳐 온 바람, 이생을 건너온 소리를 털며 지하 단칸에 삭막하게 가라앉고 있다 바람이 온기를 더듬고 인간이 사는 가장 낮은 고도에서 객사하고 있는 것이다 뜬눈 같은 문 아래 누워있으면 다가오던 한기는 바람이 벗어놓은 여정이었나 영혼이 머문 방에서는 잠마저 비좁다 타인의 시간이 내게서 거처를 찾지 못하는 밤, 새들은 바람소리를 귓속에 넣고 아침을 찾아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천장을 가진 짐승이다
안단테 그라피
자취생의 하루는 몇 그램의 향기일까
편지 뜯듯 풋풋하게 바람과 마주하면
은은한 풍금소리가 메밀꽃처럼 피곤했다.
홀로라는 말 속에는 현재형이 숨어 있다
낡은 나무의자에 헐거워진 못들처럼
전설의 가시나무새, 휘파람을 엿듣는다.
느리게 좀더 느리게 생각의 깃 세운다
마음껏 헤매고 마음껏 설레고 나면
노을진 지붕 아래로 또 하루가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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