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 동서문화사, 2008(4판)
인생은 짧고, 진리는 멀리 그 힘을 뻗치고 오래 살아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를 이야기하도록 하자.
시간과 공간과의 결합이 물질의 본질이기 때문에 물질은 철저하게 이 둘의 특색을 구비하고 있다.
실생활과 꿈은 같은 책의 페이지와도 같은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고찰하고 있는
이 모든 것은 버클리가 말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적지만 의견을 내려는 사람은 많다”는 사실에서 생기는 것이다.
논쟁에 있어 무엇보다도 알아 두어야 할 것은 논쟁하는 두 파가 논쟁의 기점이 되는 어떤 명제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석론 후편(Analyt. past)》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물이 그렇게 있다는 것과 왜 그렇게 있는가 하는 것을 동시에 가르치는 지식은 이것을 따로 가르치는 지식보다 더 정밀하며 우수하다.”
현상이란 표상을 말하는 것일 뿐,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어떠한 종류에 속하는 모든 표상, 즉 모든 ‘객관은 표상’이다. 그러나 ‘의지’만이 ‘물자체’다. 그러한 의지는 표상이 아니고 표상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모든 표상, 즉 모든 객관은 의지가 나타난 것, 가시적으로 나타난 것, ‘의지의 객관화’다.
그 사물이 일반적으로 그렇게 작용하는 원인은 도저히 입증할 수 없다. 비록 그 사물이 다른 아무런 성질도 갖고 있지 않고, 햇빛 속에 모이는 먼지의 하나라고 해도, 그것은 적어도 중력과 불가입성에 의해 그 근거를 구명하기 어려운 그 무엇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그 사물에게는 인간의 ‘의지’와 동일한 것이고, 의지와 마찬가지로 그 내적 본성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그 자체로서는 의지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것으로 볼 때 의지는 인식의 빛으로 조명되는 경우에는 언제나 내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뜻하고 바라고 있는가를 알고 있지만 의지의 본질이 무엇인가는 모른다. 즉 개개의 행위는 제각기 목적을 갖고 있지만, 의지 작용 전체에는 목적이 없다.
천재도 이유율에 따르는 관계들의 인식을 버리고 사물 속에서 오직 이데아만을 보고 찾으며, 직관적으로 나타나 있는 그 사물의 참된 본질을 파악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 천재의 행동은 극단으로 달린다. 그는 중용을 지키는 것을 모르며, 절도가 없어서 그 결과는 위에서 말한 대로다. 그는 이데아를 완전히 인식하지만 개체들을 인식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시인은 인간을 깊이 근본적으로 알 수는 있지만, ‘사람들을’ 안다는 점에서는 아주 서툴다.
아무리 궁극적인 만족이라 해도 표면적일 뿐이고, 하나의 소원이 채워지면 곧 새로운 소원이 생긴다. 채워진 소원은 인식된 오해고, 새로 생긴 소원은 아직 인식되지 않은 오해다.
우리 의식이 의지에 의해 충족되지 않는 한, 우리가 소원들의 충동에 몰려 끊임없이 기대를 하거나 두려워하고 있는 한, 우리가 의욕의 주체인 한, 우리에게는 영원한 행복도 불안도 부여되지 않는다.
행복과 불평은 사라져 버리고 우리는 이미 개체가 아니며, 개체는 잊혀지고, 오직 순수한 인식 주관일 뿐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의 세계에서 눈으로서 존재할 뿐인데, 이것은 인식의 힘을 갖고 있는 모든 생물에 작용하고 있지만, 오직 인간에게는 의지의 역할을 완전히 탈피할 수 있고, 그 때문에 개별성의 차별이 완전히 없어져 버리고, 보는 눈이 강대한 왕의 눈이든 불쌍한 거지의 눈이든 별로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행복도 고뇌도 모두 이러한 한계를 넘은 경지에는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고뇌를 완전히 이탈한 경지는 언제나 이렇게 우리 가까이에 있다. 하지만 누가 이 경지에 오래 머무를 힘을 갖고 있는가? 이처럼 순수하게 관조된 객관과 우리의 의지나 인격과 어떠한 관계가 다시 인식되자마자 마법은 곧 사라져 버리고, 우리는 이유율이 지배하는 인식으로 다시 떨어져서 이미 이데아를 인식하지 않고 개체, 즉 우리도 속해 있는 연쇄의 일부를 인식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모든 고뇌를 짊어지게 되는 것이다. 대개의 인간에게는 객관성, 즉 천재성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거의 언제나 이러한 상태에 있다. 따라서 그들은 홀로 자연을 상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교제를 필요로 하며, 적어도 책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인식은 의지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대상들에서 자신의 의지에 대한 관계만을 찾고, 그러한 관계가 없는 것에서 마음속에는 기초 저음처럼 ‘그런 것은 나에게는 소용이 없다’고 하는 절망적인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용모만큼 우리를 순수하게 미적인 직관의 경지로 매혹하는 객관은 없으며, 이렇게 아름다운 용모를 바라보면 우리는 곧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끼고 자신과 자신을 괴롭히는 모든 것을 초월하게 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오직 이렇게 가장 명료하고 순수한 의지의 인식 가능성이 우리를 가장 쉽고 빠르게 순수 인식의 상태로 높여 주기 때문이다.
우리도 인간의 아름다움을 보면 그것을 인식하지만, 참된 예술가는 이것을 아주 명백하게 인식하여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나타내며, 그 묘사는 자연을 능가한다. 이러한 것은 의지가 ‘우리 자신’이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인데, 그 의지의 적절한 객관화가 최고의 단계에서 평가되고 발견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여 비로소 우리는 실제로 자연이(물론 이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본질을 이루는 의지지만) 표시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예견하는 것이다.
예술가가 선험적으로 아름다움을 예견할 수 있고 또한 학식 있는 이들이 미를 후천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예술가와 학식 있는 이들이 자연의 즉자태(das Ansich der Natur), 즉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모방자나 꾸미는 자는 타인의 걸작을 개념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개념은 결코 작품에 내적 생명을 부여할 수 없다. 시대 일반, 즉 그 시대의 다수를 점하는 어리석은 대중은 언제나 개념을 알고 그것에만 집착한다.
언어 예술에서는 우화와 비유가 훌륭한 효력을 갖는다. 세르반테스는 수면이 우리의 모든 정신적, 육체적 고뇌를 없애 준다는 것을 표현하려고, “잠은 인간의 전신을 덮는 외투”라고 아름답게 말했다.
호메로스가 화근을 가져오는 아테 여신을 그려 “그녀는 부드러운 발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그녀는 딱딱한 대지를 밟지 않고 인간의 머리 위만을 걸었기 때문이다”(《일리아드》, 제19가의 91)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직관에 호소하는 묘사이다.
라바터가 그린 아름다운 비유적 장식화는 이런 종류의 것으로, 진리를 위하여 싸우는 고매한 사람의 마음에 깊은 감명을 준다. 즉 등불을 든 손이 말벌에 쏘였지만, 위에서는 불길에 모기가 타고 있다. 그 밑에는 다음과 같은 표어가 있다.
아무리 등불이 모기의 날개를 태우고,
두개골과 뇌수를 모두 분쇄한다 해도,
등불은 역시 등불로 남고,
아무리 무서운 말벌이 나를 찌른다 해도,
나는 등불을 놓지 않으리.
이러한 것에 속하는 것으로 또 묘비가 있는데, 그 옆에는 꺼져서 연기가 나는 등불이 있고, 옆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불이 꺼지면 확실해진다.
그것이 짐승의 기름이었는지 밀랍이었는지.
이데아는 근본적으로 직관적이다. 시에서는 언어를 통해 직접 전달되는 것은 추상적 개념에 지나지 않지만, 거기에는 분명히 이 개념들을 대표하는 것 속에 듣는 사람에게 인생의 이데아를 직관시키려고 하는 의도가 있다.
이렇게 상상을 시인의 말이 의도하는 바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변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화학자가 여러 가지 잘 알려진 맑은 액체들을 화합하여 거기에서 고체의 침전물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시인은 여러 개념의 추상적인 보편성으로부터 시인다운 방식으로 이것들을 결합시킴으로써 구체적인 것, 개성적인 것, 직관적 표상 등을 침전시킬 수 있다. 왜냐하면 이데아는 직관적으로만 인식되는 것이며, 이데아의 인식이 예술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시에 통달한 사람이면 화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목표로 삼고 있는 침전물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사람도 신도 서점의 기둥도
시인이 평범하게 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 호라티우스, 《시론》
이때까지 한 번도 어떠한 곳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
이것만은 결코 쇠퇴하지 않는다.
음악이 너무 심하게 언어와 결합하려 하거나 사건에 따라 변화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음악이 자기의 언어가 아닌 언어를 사용하여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육체에 묶여 있는 개인의 의식을 보아도 그것은 매일 수면으로 완전히 중단된다. 잠은 가끔 얼어 죽는 경우처럼 완전히 연속적으로 죽음으로 옮겨 가는 일이 있는데, 깊은 잠은 현재에서는 죽음과 다를 것이 없고, 단지 다시 깨어난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죽음의 공포는 언젠가는 현재를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어리석은 공포를 불어넣어, 현재를 포함하지 않는 시간이라도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어 현재를 몰아내 버린다. 이것은 시간에 관한 착각이지만, 공간에 관한 그러한 착각은 모두 상상 속에서 자기가 차지하고 있는 지구상의 장소는 위고 그 밖의 곳은 아래라고 보는 것이다.
고통은 분명히 죽음의 이쪽에 있는 것이며, 또 한편으로 우리는 고통이 두려워서 죽음으로 도피하는 일도 가끔 있으며, 반대로 때로는 죽음이 빠르고도 쉽다고 생각되지만, 그 죽음을 잠시라도 피하기 위해 실로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과 죽음을 전혀 다른 것으로 구별한다. 우리가 죽음에 있어 무서워하는 것은 사실 죽음으로 명백히 표시되는 개체의 멸망이다. 그리고 개체는 생에 대한 의지 자체가 개별적으로 객관화된 것이기 때문에, 개체의 본질은 죽음에 저항한다.
인간은 모든 인식에 앞서서 자신의 작품이고, 인식은 이 작품을 비추어 내기 위해 거기에 덧붙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가 이러저러한 것이라고 결정할 수도 없고, 다른 것이라고 결정할 수도 없다. 그는 결정적으로 ‘그것이고’, 계속적으로 그가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것이다.
‘후회’는 의지의 변화(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지만)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인식의 변화에서 생기는 것이다.
이들 무제한성 때문에 인간 개체의 현존에는 언제나 상대적인 ‘언제’와 ‘어디’ 밖에는 없고, 절대적인 언제와 어디는 없다. 왜냐하면 개체의 장소과 그 지속은 무한과 무제한성의 유한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곤궁은 시민에게 쉴 새 없는 채찍이지만, 권태는 상류 사회에 대한 채찍이다.
괴롭히는 자와 괴롭힘을 당하는 자는 동일한 것이다. 괴롭히는 자는 그것으로 자기가 괴로움을 벗어난다고 생각하며, 괴롭힘을 당하는 자는 그것으로 자기가 죄를 벗어난다고 생각하는 미혹에 빠져 있다.
비유적이고 상징적으로 의지의 완전한 극기와 부정, 참다운 무의지성을 절대적인 선, 최고의 선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 진통제의 효과밖에 줄 수 없는 병의 유일하고 근본적인 치료법이라고 여기면 좋을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고상한 사람에게는 이 구별이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다. 개별화의 원리, 즉 현상의 형식은 그를 강하게 사로잡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는 그가 보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을 대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 가깝게 느낀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고통과 다른 사람의 고통 사이에 균형을 이루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해 자기의 향락을 포기하고, 희생을 감수한다. 그는 악인에게는 큰 칸막이로 보이는 자타의 구별이 사실은 보잘것없는 기만적인 현상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안다.
우리가 고찰하는 한계 내에서 충분히 설명했듯 생에 대한 의지의 부정은 현상으로 나타나는 의지의 자유에 있어 유일한 행위다. 따라서 아스무스가 부르고 있듯이 초월적인 변화지만, 의지의 개별적 현상의 현실적인 파기인 ‘자살’은 이것과는 다르다. 자살은 의지의 부정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의지에 대한 강렬한 긍정 현상이다. 왜냐하면 부정의 본질은 생의 고통을 두려워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생의 향락을 두려워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자살자는 생을 원하지만 생이 놓여 있는 조건들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또 그는 미완성 원고의 제1장 제47절에서 원죄는 죄인 동시에 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의지가 없으면 표상도 세계도 없다. 우리 앞에 남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무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로 융해되는 것에 저항하는 우리의 본성이야말로 바로 생에 대한 의지이고, 이 의지가 우리 자신이며 우리의 세계다. 우리가 이렇게 심하게 무를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생에 대해 의욕하고, 또 우리는 이 의지에 불과하며, 이 의지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다른 방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가난과 속박에서 눈을 돌려 세계를 초극한 사람들을 바라보기로 하자. 그들에게 있어 의지는 자신을 자유롭게 부정하여 버린 것이지만, 그 다음 그들은 의지의 마지막 흔적이 그들이 갖고 있는 육체와 더불어 소멸하는 것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의욕하는 사람이 인생의 꿈을 낳는, 결코 실현되지 않고 성취되지도 않는 희망도 아니고, 모든 이성보다 높은 평화, 대양과 같은 넓은 마음이 지니는 완전한 정적, 깊은 평정, 부동의 확신과 즐거움이다.
그 시절 괴테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과는 대화를 나누지만, 그와는 철학을 한다.”
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1판은 발행 뒤 1년 반 동안 겨우 100권 정도밖에 팔리지 않았다. 만약 브로크하우스라는 출판인이 없었다면 이 책은 햇빛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그는 쇼펜하우어의 초고를 처음 보고 팔리지 않을 거라고 예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출판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160년 이상 지난 지금도 그가 설립한 브로크하우스사에서는 여전히 이 책이 출판되고 있다.
나는 이 짧은 여생을 완전히 나 자신을 위해 바치기로 했다. 그리고 두 다리로 멀쩡히 걷는다는 사실만으로 나와 대등하다고 여기는 인간들과 되도록 사귀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영어에서 ‘의지’라는 뜻을 지닌 동사 ‘will’은 모든 동사의 미래형을 만들어주는 조동사이기도 하다. 이는 곧 모든 동작의 근원에는 욕망이 가로놓여있다는 증거이다.
고뇌와 허무로 가득찬 세상에서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안정적인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고독을 견디고 나아가 고독을 사랑하는 정신적 경지를 체득해야만 한다. 바로 여기에서 뒷날 키에르케고르, 니체, 토마스 만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고독한 초인’이라는 사상의 싹이 움트고 있었다.
묘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겠느냐는 그비너의 질문에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어디라도 괜찮네. 내가 어디에 있든 사람들이 나를 찾아낼 테니까.”
'other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드로메다 남자 - 스와 데쓰시 (0) | 2009.04.27 |
---|---|
기발한 자살여행 - 아르토 파실리나 (0) | 2009.04.27 |
리틀 슬러거 린 3권 - Takashi Sano (0) | 2009.04.14 |
2009 신춘문예 당선시집 - 문학세계사 (0) | 2009.04.14 |
밀레니엄(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하) - 스티그 라르손 (0) | 2009.04.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