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 2009년 가을

 

 

 

 

 

             정진규

 

 

 삽이란 발음이, 소리가 요즈음 들어 겁나게 좋다 삽, 땅을 여는 연장인데 왜 이토록 입술 얌전하게 다물어 소리를 거두어들이는 것일까 속내가 있다 삽, 거칠지가 않구나 좋구나 아주 잘 드는 소리, 그러면서도 한군데로 모아지는 소리, 자정(子正)에 네 속으로 그렇게 지나가는 소리가 난다 이 삽 한 자루로 너를 파고자 했다 내 무덤 하나 짓고자 했으나 왜 아직도 여기인가 삽, 젖은 먼지 내 나는 내 곳간, 구석에 기대 서있는 작달막한 삽 한 자루, 닦기는 내가 늘 빛나게 닦아서 녹슬지 않았다 오달지게 한 번 써 볼 생각이다 삽, 오늘도 나를 염()하며 마른 볏짚으로 한나절 너를 문질렀다

 

 

 

 

 

 

 

달밤

 

       김은자

 

여둑하니 산그림자 내려앉을 때

 

유월 밤 산 위로 둥실 떠오른 저 달,

 

자운영 풀섶이고 개울물이고

 

천지모르고 따라가다가 어느

 

들길에서 놓쳐버린 네 그림자인데,

 

쥐눈처럼 새푸른 꽃눈을 뜨는 대추나무 너머,

 

눈물자욱 훔쳐낸 말그레한 눈자위로

 

먼 길 돌아 마침내 띄워 올린 맨발 같다

 

 

 

 

 

 

 

 

 

햇살

 

        이병초

 

마룻장 끝날이 햇살에 긁힌다

진분홍 꽃잎이 깜짝 벗어놓은 비늘 같은

얇디얇은 부름켜의 비릿함 같은

 

자디잔 바람이 혀로 꽃잎을 펴듯 새촘새촘 꽃잎의 둥근 테를 혀로 감아올리듯 햇살이 불그죽죽한 귓볼을 마룻장 끝날에 비빈다 세월에 접질려 보리티끄락같이 꺼끌꺼끌한 잔금들 쓸어모으는 내 여자의 눈그늘 안쪽, 목숨도 수세미수염도 못 밀어내고 이슬방울 문 맨샅 같은 눈그늘 안쪽, 그 독방에 들고 싶어서 햇살이

 

작은 글씨들처럼 마룻장 끝날에 박힌다

 

 

 

 

 

 

저녁

 

        이병초

 

동치미무 쫑쫑 채 가시어 고추장 치고 생강대 넣고 찐 된장 치고 양푼밥에 썩썩 비벼먹는 저녁, 이마에 눈 밑에 질질 흐르는 땀을 손가락으로 훔쳐대며 된장독에 박은 살얼음 묻은 고춧잎이 입에 개운한 저녁, 귀 다칠라 귀 다칠라 생짜로 목 쉬는 바람소리가 들창문을 들입다 흔들고 가는, 문구멍으로 내다본 세숫대야 너머 캄캄한 어둠을 문 구정물통 너머 길갓방 아궁이에 활활활 참나무장작이 마디게 탄다

 

 

 

 

 

 

 

 

 

 

 

자서전(自敍傳)

 

            송수권

 

연산군(燕山君) 때라던가 파발 말을 놓는 역()이 생겼대서

내 고향 속성(俗姓)은 역둘리

보성만을 굽어보며 우뚝 솟은 매봉 꼭대기

봉수대(烽燧臺)가 허물어진 그 골짜기에는

우리 윗대 선친(先親) 한 분 잠들어 계시다

한양이라 시구문 밖 소문난 망나니로 씽씽 칼바람을

내며 가셨다 하니

그 무덤 속엔 당대에서도 잘 듣던 칼 몇 자루

녹슬어 있지 않았을까

그러지 않았을까 이 볼펜이 칼이 될 수만 있다면

이 원고지 한 장이 도모지*만 될 수 있다면

우리 선친(先親) 소문난 칼솜씨 칠월 장마에

풋모과 떨구듯

나도 한평생 뎅겅뎅겅 모가지나 흘리며

살다 가지 않았을까

 

* 도모지(途貌紙): 대원군 때 망나니들이 천주교도들의 목을 치다가 고되면 얼굴에 백지장을 씌우고 물을 뿌려 질식하게 했던, 그때 사용했던 종이를 말함. 도무지.

 

 

 

 

 

 

 

 

여자의 성소(聖所)

 

             송수권

 

어미 등 뒤에 붙은 코알라를 보면

젖니 두 개가 났을 때가 생각난다

, , - 하다

젖니 세 개가 났을 때

나는 움, 움마라는

이 지상의 마지막 말을 완성했다

부엌 뒷문으로 비친 북두칠성 별자리를 보고

일곱 걸음을 옮겼을 때

밥물이 끓고 뜸 들이는 그 밥 냄새를 처음 알았다

이 세상 어떤 꽃들의 진항 향기보다 진했다

좀 더 자라서는 부뚜막에서 부지깽이 숯검정으로

가갸- 뒷다리를 썼고

일곱 살 땐

얘야, 이곳은 네가 개칠(改漆)할 곳이 아니란다

그 성소(聖所)에서 쫓겨났다

나 대신 삽살강아지 한 마리가 들어와

그 깔자리를 개칠하고 살았다

내 나이 지천명이 되었을 때

마지막 타오르던 아궁이의 그 빨간 불꽃,

굴뚝 드 높이 솟은 연기 따라

그녀는 하늘로 갔다

 

 

 

 

 

 

 

 

풍겨에 관한 허만하 시인의 글

 

 풍경이 우리 내부로 걸어 들어와서 우리의 일부가 되는 것은 그 낯선 본질 때문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산다는 것은 낯선 것을 받아들여 낯설지 않은 친숙한 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낯선 것을 만나기 위하여 우리는 길 위에 선다. 깨어있는 정신에게 풍경은 새가 들녘 끝 한 그루 느티나무 자리를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시시각각 새로운 놀라움이다. 영혼이란 낯선 풍경을 만나 깨어나는 자기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정효구, <마당이야기>, 작가정신 중()

 

 봄이 무작정 위로 솟구치려는 생()의 계절이고, 여름이 그 솟구침을 무한까지 늘려가려는 장()의 계절이라면, 가을에는 생장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임계지점에서 겸허히 수용하고 모두가 내향성의 눈으로 존재의 내부로 키워가는 수렴의 계절이다.

 

 열매 앞에서 우리는 전신으로 흐뭇해지듯 온몸이 둥글어지는 느낌이다. 몸과 마음이 함께 긍정의 감정으로 풍성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열매 앞에서 우리는 의지가 담긴 신뢰감을 맛본다. 봄과 여름을 인내심 있게 통과한 결실물만이 간직한 지구력과 지혜로움이 이로부터 무한히 환기되기 때문이다.

 

 마당엔 어느 한 부분도 가리지 않은 하늘이 꾸밈없이 고스란히 내려온다. 마당에 내리는 하늘은 결코 인색하지 않다. 그리고 마당엔 어느 곳도 다녀갈 수 있는 몸 없는 바람이 나체로 불어온다. 마당에 부는 나체의 바람은 날 것 그대로 싱싱하고 자연스럽다.

 

 열매인 곡식들은 가을의 마당 위에서 여러 날을 이렇게 뒤척이며 자신을 안팎으로 말리고 내면화시켜 간다. 마당은 그들의 뒤척임 소리와 그들의 움직임을 그들이 누워 있는 아래쪽에서 그대로 모두 듣고 느낀다. 마당은 그들과 살을 맞대고 있기 때문이다.

 

 

 

 

 

 

 

 

즐거운 편지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더 비린 사랑 노래 6

   

                   황동규

 

비실비실 봄이 왔습니다.

거실의 화초들이 베란다로 나갔습니다.

옆집 화초들도 서둘러 나왔더군요.

때 이른 꿀벌 하나가

하늘도 땅도 아닌 팔층으로 찾아 왔다가

뒤돌아보지 않고 되날아갔습니다.

화초들은 차가운 분속에 발목들을 묻고

계속 떨더군요.

그들도 씨 시절을 그리워할까요.

껍질 속에서 마음 따로 없던 때를?

내 머리와 가슴을 흔들어보니

시간 같은 것이 말라붙어 있었습니다.

 

 

 

 

 

 

 

 

퇴원 날 저녁

 

                  황동규

 

흑반(黑斑) 잔뜩 끼어 죽어가는 난 잎 어루만지며

베란다 밖을 살핀다.

저녁 비가 눈으로 바뀌고 있다.

주차장에 누군가 차 미등 켜논 채 들어갔나,

오른쪽 등 껍질이 깨졌는지

두 등 색이 다르다.

안경을 한번 벗었다 다시 낀다.

눈발이 한번 가렸다가

다시 빨갛고 허연 등을 켜놓는다.

난 잎을 어루만지며 주인이 나오기 전에

베터리 닳지 말라고 속삭인다.

다시 만날 때까지는

온기를 잃지 말라고

다시 만날 때까지는

눈감지 말라고

차운 세상에 간신히 켜든 불씨를

아주 끄지 말라고

이 세상에 함께 살아 있는 그 무엇의.

난이 점차 뜨거워진다.

 

 

 

 

 

 

 

 

 

 

검정은 색깔이다

 

                 송영미

 

시간을 읽는 방법으로는 사천 구백 구십 칠 개의 길이 있지만

그건 완전히 다른 식으로도 할 수 있다는 의미다

 

나는 웅크린 고양이의 눈을 들여다본다

새벽 세시 낯선 고도

 

상처받은 채로

가책도 없이

 

지난밤에는 죽은 사람들의 손톱으로 만든 배를 타고

긴 불면의 강을 떠 다녔다

처녀들의 노래 소리를 듣고 싶었는데

길 잃은 양과 말을 위해 나 혼자 노래를 불렀다

 

두고 온 것도 기다리는 것도 없지만

귀환하는 국경수비대처럼 산림감시원처럼

얼굴을 가리고 황금빛 사막으로 가고 싶다

 

알림표와 통계로 가득 찬 서랍에 못질을 하고

작은 황조롱이 하나 머리 위에 띄우고

그곳으로 가면 불면이 완성될 수 있을까

사라져버린 외로운 창자를 만날 수 있을까

 

바람은 불어 사막을 서성이는 차도르가 펄럭이고

검은 눈동자 속 주홍빛 허벅지

흥청거리는 바람을 다 먹을 수 있다면 좋겠지

아무도 배가 고프지 않도록

 

먼 산에 눈이 쌓이면 독사의 입 냄새가 약해지고

새들의 가슴에 살아남은 들꽃의 씨앗이

모래산을 넘어 먼 곳까지 날아간다

 

몇 번의 그믐을 더한 어둠

잊혀진 도시를 수십 번 뒤덮을 모래 먼지 속에

뒤적뒤적 이름들을 새겨 넣으며

불면의 시간인지 불멸의 시간인지나 탕진해야지

 

꽃송이 팡팡 터지는 화승포를 쏘아대며

사월의 혁명이 가고

십일월의 혁명이 온다

 

상처받은 채로

가책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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