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을 배반하는 과학, 에른스트 페터 피셔, 해나무, 2009(초판 발행)

 

 

 

 

 

 

 

 

 

 

 잘못 아는 것이 편하지만,

 그래도 올바로 알아야 할 것들이

 있지 않을까?

 

 

 

 인간의 수명은 점점 더 길어지고 있다. 우리는 이 평범한 문장의 핵심 단어로 생명세월을 지목할 수 있을 것이다. 문장을 풀어보면, 생명이 점점 더 많은 세월을 얻고 있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 단어들을 뒤집어서 다음과 같은 흥미롭고 도전적인 문장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세월이 점점 더 많은 생명을 얻고 있다.

 

 

 

 가장 간단한 첫 번째 사례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열등한 학생이었다는 이야기다. 진실은 정반대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은 학년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이었다. 물론 그는 좋은 성적을 받으려고 무섭게 덤비는 학생은 아니었다. 모든 10대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무의미한 암기와 시험을 위한 연습을 증오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성적은 좋았다.

 

 독일의 최고 점수인 1점은 스위스에서 6점이다. 아인슈타인의 성적표에 기재된 점수가 바로 그것이다. 안타깝게도 아인슈타인의 전기를 처음 쓴 저자는 이 점을 몰랐다. 많은 이들은 그 전기에서 처음으로 열등생 아인슈타인에 대한 이야기를 접했고, 그 이야기는 찬란한 성적을 받지 못한 모든 이들의 혹은 그들의 자녀들의 마음에 들었다. 보잘것없는 성적을 받았지만 나중에 아인슈타인이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비트에서 존재로(It From Bit)는 모든 존재는 정보에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휠러의 주장을 압축적으로 담은 표현이다. 정보에서 존재가 비롯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it)들이 존재하게 된 것은 우주의 정보(bit)가 관측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로 휠러가 주장한 참여우주이다. 우주는 관측이라는 행위, 즉 우리의 의식이 필요한 참여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즉 우주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관측하는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가장 유명한 과학자들도 사기를 쳤다! 예컨대 19세기의 위대한 미생물학자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는 그의 결과들을 의심하는 사람에게 위조된 데이터를 들이댔다. 페니실린의 발견자로 추앙된 알렉산더 플레미은 논공행상(論功行賞)을 옳게 할 경우 각주에 언급될 만한 자격조차 없다. 1919년에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성공적으로 입증한 실험 데이터는 대폭 위조되어 있었다(그 위조로부터 옳은 결론이 나와서 다행이지만). 그 외에도 많은 사기들이 있었다.

 

 

 

 우리가 떠올리는 중국인은 우리가 많은 중국인들을 경험하고서 얻은 인상의 평균이 아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역설적이다. 우리는 개인들을 좋게 평가하면서도 그들이 속한 민족을 나쁘게 평가할 수 있다.

 

 

 

 우리가 보는 운동은 우리 자신의 운동이다. 코페르니쿠스는 바로 그 점을 깨달았다.

 

 

 

 이미 1884년에 미국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가 확실히 깨달았듯이 진실은 정반대이다. 그는 어떤 글에서 감정emotion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울기 때문에 슬픔을 감지하고, 때리기 때문에 분노를 감지하며, 떨기 때문에 두려움을 감지한다. 충분히 다음과 같을 수도 있을 테지만, 슬프거나 분노하거나 두렵기 때문에 울거나 때리거나 떠는 것이 아니다.

 

 

 

 내가 완전히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에테르와 장과 암흑물질의 개념은 무언가 공통된 것을 표현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공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리하여 그 무시무시한 무는 이성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공유한 영혼에 의해 채워진다. 우리는 세계를 내용물 없이 (채우지 않고) 이해할 수 없다. 심지어 화학물질 에테르 덕분에 얻을 수 있는 공(마취상태)도 그것의 반대를 전제한다. 생각과 느낌으로 가득 찬 인간을 말이다.

 

 

 

 이런 논쟁은 예나 지금이나 무의미한 짓이다. 오히려 그런 논쟁은 무엇이 젊은이들로 하여금 진화에서 비롯된 본성에 맞서 자녀에 대한 욕구를 포기하도록 만드는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방해할 뿐이다.

 

 

 

 의사는 우리 환자들로부터 평균 18초 동안 이야기를 듣고 나서 우리의 진단보다 훨씬 더 중요한 확고한 진단을 내린다. 과연 그들은 잘못된 진단을 내리지 않는 전지전능한 신과 같은 존재일까?

 

 

 

 예컨대 어떤 경영자가 자기 회사의 양자도약을 약속한다고 말할 때, 그가 약속하는 것은 갑작스럽고 이례적으로 폭이 큰 상승이다. 이때 물리학자는 웃지 않을 수 없다. 양자도약은 첫째,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작은 변화이며, 둘째, 일종의 기저상태를 향해 아래로 내려간 후 거기에 머무는 변화이기 때문이다.

 

 

 

 혁신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보면 일종의 역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채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오로지 새것만 중요하다면, 결국 헌것만 늘어나게 된다. 매 순간 새것은 금세 헌 것이 도어 다음에 오는 혁신-새로운 새것-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혁명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이중적이다. 정치사회적인 면에서 우리는 급진적인 변화를 몹시 두려워하는 한편, 과학기술적인 면에서 획기적인 혁신을 바라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작은 변화만 일어나도 진보가 일어난 듯한 인상만 있으면 즉각 우리에게 혁명적인 능력이 있음을 자랑한다.

 

 

 

 심리학자 브루노 베텔하임Bruno Bettelheim이 지적한 바 있듯이, 진실은 정반대다. 텔레비전은 상상력을 해방하지 않고 구속한다.

 

 

 

 가망 없는 관념. 미국 철학자 대니얼 데넷Daniel C. Denett이 새 책 『주문 깨뜨리기』에서 신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표현이다.

 

 

 

 꼬마였을 때 나는, 과학을 하는 사람은 놀라움을 각오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과학에 매력을 느꼈다. 당연한 말이다. 과학자들이 이미 아는 것을 알아내려고 실험을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혁신과 성장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성장에 대한 관점의 혁신이다. 우리는 생산량과 소비량을 무턱대고 점점 더 늘일 수 없다. 현재 물질의 흐름은 이미 우리 모두의 자산인 지구에게 부담이 될 정도로 많다.

 

 

 

 혁신의 의미는 국민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Joseph A. Schumpeter에 의해 처음으로 제시되었다. 그는 혁신이 성장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혁신과 성장은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20세기 전반기에 생각했다. 당시로서는 신선한 생각이었고, 바로 그 이유만으로도 오늘날에는 낡은 생각이다. 당시로서는 신선한 생각이었고, 바로 그 이유만으로도 오늘날에는 낡은 생각이다. 혁신광(革新珖)들은 새것에 내재한 모순을 망각한다. 새것은 존재하자마자 곧바로 옛것이 된다는 모순을 말이다. 또한 새로움보다 중요한 것은 좋음인데, 아무도 이 얘기를 하지 않는다.

 아무튼 이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오늘날 혁신과 성장이라는 구호 아래 정치적 프로그램을 공포하는 사람은 우리에게 케케묵은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 혁신의 정반대인 사람이다.

 

 

 

 아직도 성장을 지상 목표로 제시하는 정책결정자는 자살테러범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날아가는 스파게티 괴물(Flying Spaghetti Monster, FSM)은 캔자스 주 교육위원회가 지적 설계를 생물학적 진화론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결정한 것에 항의하기 위해 오리건 주립대학 물리학 석사인 바비 헨더슨이 2005년에 창시한 기독교 패러디 종교이다.

 

 

 

 그 편지에서 자신을 걱정에 싸인 시민으로 밝힌 헨더슨은 우주와 인간은 날아가는 스파게티 괴물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확신을 피력한 다음에 이 생각을 학교에서 동등하게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 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전통적인 창조론자들이 주장하는 인류의 기원과 날아가는 스파게티 괴물의 창조는 지적인 질이 동등하다. 두 입장 모두 아무런 과학적 뒷받침 없이 오직 상상의 불꽃놀이에만 의존한다.

 

 

 

 어느 토론에서 나는 사람에게 어떤 교양이 필요하냐는 질문을 받고 거의 자동적으로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사람이 교양이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더 중요한 것은 교양 있는 놈이 사람이냐 아니냐죠. 그때 이후로 나는 다음의 질문에 매달린다. 어떤 교양이 인간성humanity을 동반할까? 어던 교양이 도덕을 담보할까?

 

 

 

 모든 시작은 어렵다. 이 문장은 민간에서 유래하지 않았다. 괴테의 펜pen에서 유래했다.

 

 

 

 모든 시작은 쉽다!! 느낌표가 두 개나 붙은 이 문장은 세바스티안 하프너Sebastian Haffner가 보행자의 생활을 묘사한 칼럼에 등장한다.

 

 

 

 데이터의 홍수는 결코 앎의 증가로 볼 수 없다. 우리는 과학이 알려주는 바를(지식 사회를

이루는 것들을) 알기보다는 믿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과학이 알려주는 바를(지식사회를 이루는 것들을) 알기보다는 믿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태양이 지구보다 크다는 것을 타인들에게서 들었다. 통찰이라는 의미의 앎은 얻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안다고 믿지만, 실은 그저 남들이 우리에게 하는 말을 믿어야 한다는 것만 안다.

 

 

 

 한 장의 그림은 우리에게 천 마디의 말보다 많은 이야기를 건넨다. 하지만 그림이라는 단어 하나는 천 장의 많은 그림보다 우리 마음속에 다양한 심상을 불러일으킨다.

 

 

 

 평범한 인간은 1 더하기 1 2라고 생각한다. 수학의 영역을 떠나면 그 등식이 거짓이라는 점이 언제나 거듭해서 드러나는데도 말이다. (아인슈타인이 자주 말했듯이, 실제로 수학은 실재와 관계를 맺지 않을 때에만 확실하다.)

 

 

 

 게놈 서열을 밝혀내고 도서관의 소장 목록을 만들려면 당연히 전문가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체스터턴이 법정을 예로 들어 말했듯이 정말로 중요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 사람들은 당장 주위에 있는 평범한 사람 12명을 불러 모은다. 기독교의 창시자들도 그렇게 했다. 중요한 교훈이 담긴 지적이다.

 

 

 

 성공으로 이어진 시작을 언급하면서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대로 그 다음은 역사이다.

 

 

 

 1474년 스위스 바젤에서 수탉 한 마리가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수탉은 알을 낳는 극악하고 반자연적인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산 채로 불태워지게 되었다. 이런 식의 형 집행은 스위스에서 18세기까지 존재했다.

 

 

 

 온 힘을 다하여 선을 정의하려 하는 사람은 악을 만들어낸다. 선을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악을 위한 길을 닦는다.

 

 

 

 노자는 이렇게 썼다. 만일 옳음이 정말로 옳음이라면, 옮음과 옳지 않음이 뚜렷이 구별되어 더는 싸울 일이 없을 것이다. 정말로 항상 우리들 중 한 사람은 옳고 다른 한 사람은 그를까? 우리 둘 다 옳고 둘 다 그를 수는 없을까?

 

 

 

 서양의 물리학은 빅뱅Big Bang을 이야기하고, 모든 기독교 신학은 생명이 탄생하는 시점을 규정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는 반면, 중국 철학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늘과 땅의 시초는

 이름이 없다.

 이름 없는 그것이

 만물의 어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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