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달래는 순서,
이러고 있는,
비가 자운영꽃을 알아보게 한 날이다 젖은 머리칼이 뜨거운 이마를 알아보게 한 날이다 지나가던 유치원 꼬마가 엄마한테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엄마, 그런다 염소처럼 풀쩍 놀라서 나는 늘 이러고 있는데 이게 아닌데 하는 밤마다 흰 소금염전처럼 잠이 오지 않는데 날마다 무릎에서 딱딱 겁에 질린 이빨 부딪는 소리가 나는데 낙엽이 그리움을 알아보게 한 날이다 가슴이 못질을 알아본 날이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일생에 처음 청보라색 자운영을 알아보았는데
내일은 정녕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다정이 병인 양 중(中)
… 나사처럼 빙글대는 거짓말은 세상과 나를 당신을 더욱 바짝 조여줍니다.
조금씩 이상한 일들 2
- 저녁의 답장
1
생각도 늦고 시계도 늦었다 강의하러 뛰듯 걸으며 ‘시창작가는길’ 답장한다는 게 낡은 휴대폰 자음 하나 덩달아 뒤로 늦어지면서 ‘시창자까는길’로 간 모양이다 나날의 위선이 가시연꽃의 연못물이어서 비린 속어들 입도 안 댔는데 닳아빠진 손가락이 끝내 말썽이다
비바람 세찬 날 고속열차 차창에 가로로 부딪는 빗물들 꼭 정자 올챙이들이다, 어떤 생을 만들러 저토록 안간힘인가, 목숨이란 치달리는 차창에 부딪쳐 얻는 몇억 분의 일의 빗방울 아무나 얻는 답장도 아니건만 혹, 내 아버지인가, 앞을 막아볼 새도 없이 휙휙 써지는 나,라는 차창의 빗물을 본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시계를 찼는데 잊고 다른 시계를 소매 끝에 덧차고 나간 날이,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비슷한 검정구두를 짝짝이로 신고 나간 날들이 있다 선물 받은 그릇이 아무리 봐도 플라스틱인지 사기인지 성분 표시가 없다 하니 답장이 왔다 불속에 넣어봐
2
그 많은 날들 그렇게 불속에 집어넣고 그 잿가루 찍어 낡은 기차와 빗물과 시계와 손목과 그릇들에게 다시 쓰는 저녁의 답장들,
흰 봉투 가득한 목련나무가 수신인이다.
만유인력
사람들이 달걀처럼 앞뒤 분간 안된다 여긴 때가 있었다
내 마음 달걀처럼 쉽게 깨진다 여긴 때도 있었다
사랑은 싫어 이별이 나는 좋아 그래서 자꾸 사랑하지 노래하던 때도 있었다
너무 받으려는 것만큼 너무 받는 것도 천하다 노래하던 때도 있었다
고층건물 창밖으로 마음 던지고 따라 도망가려 했던 적도 있었다
흙투성이 바닥에 팽개쳐진 그 얼굴 거둬와
사과 깎아먹인 적도 있었다
마음에 없는 철학에 문 열어준 적도 있었다
얼룩이 얼룩말에 근사한 무늬 넣는 것 도와준 적도 있었다
촛불인지 빗물인지 몰라
양 끝을 잡고 당겨본 적 또한 있었다
한낮, 대취하다
아침부터 벌써 골목 끝 이른 듯 개들 돌아나온다
나비 지나간 자국은 바람만이 안다
시간이 파헤쳐놓은 길은 전기공사인지 하수도공사인지 지나는 행인에겐 구별 없다
슬픔이 쓰레기인지 달빛인지 죽은 자만이 말해야 한다
광화문 식당 초면의 점심약속 어색함들 지우려 낮술들을 마시니, 한 남자가 슬프다 한다, 흰 치자색 햇빛이 기차표 담긴 잔을 건네며 다들 도망가라 떠미니, 견딜 수 없음으로 견디자느니, 등뒤의 그리움 알고 보니 눈앞의 들소떼라느니, 흰 와이셔츠 소매 끝이 너무 더럽다느니, 한 남자 또한 기어이
울고 싶다 한다
한낮 더욱 맹렬히 환해져가고, 내다보이는 마당에 어린 날의 송사리 조약돌 비치던 뜨거운 여름 시냇가 모래밭에 번지고 전염된 슬픔에 다 같이 떠나버리자고 한낮이 이렇게 치명적인 줄 몰랐다고 기차들 마당으로 분꽃이며 해바라기들 데려오는데
기차문 열리는 순간 기차 벌써 떠나버린 듯 치자꽃처럼 환해도 무어라 한마디인들 천기누설할 수 없는 한낮 몇천년부터의 하루가 가지 않은 채 오늘을 바꿔치기하다 그 손목 딱 들킨 듯 누적된 날들을 물어낼 마당이 너무 깊으니,
모두 다 대취한 한낮, 봄날은 안 가고 또 안 가니
화상
새 도마를 샀다, 토끼무늬들이 피크닉을 가고 있다
도마일 뿐이지만 내 음식 밑에서 언제고
그들의 신발과 피크닉 가방아 나뒹군다
라일락무늬 나무받침에 뜨거운 냄비 얹다가
라일락꽃들 비명에 냄비를 놓친 적도 있다
문 열린 것들과 닫힌 것들이 두죽박죽이 되어간다
자운영꽃잎의 물방울들 나에게 더 잘 전해지듯이
나 그대에게 더 잘 전해지지 않듯이
사람 시늉
난 영 틀렸다 – 삼일쯤 연이은 사람 약속엔 사람인 게 고통이 된다
커피 한모금에도 일주일의 잠이 고단해진다
하루의 불면은 열흘치 시든 과오들에 물을 준다
다 알면서도 나흘째 목요일에도 커피를 시켰다
아니나 다를까
밤 한시 삼십분, 동료 드라마작가가 힘없이 전화한다
멜로드라마 잘 안될 땐 무조건 배신 얘기 쓰라는데
재밌는 배신 좀 없나요?
심야 두 시 오분, 기혼의 친구가 흐느껴운다
나 너무 오래 외로우니 무슨 짓이든 해도 되겠지
물속에 못을 떨어뜨린 자들만이 잠 못 이루는가
못에서 꽃을 기다리는 자들만이 서성이는가
누구가는 연꽃과 기도를 얻기도 하는 불후의 시간
차라리 더 캄캄한 어둠을 기다리는 저 먼 한강대교의 불빛 얼룩들
모든 게 영화쎄트장의 시늉 같건만 오지 않는 잠은
짐짓 해보는 연기가 아니다 과오들 또한 늘 그렇듯
멜로영화 속 추억의 회상장면이 아니다
그날의 배경
몇날이고 수도승처럼 눈만 감다가 모처럼 나섰다
나서다가 누군가가 머리에 박은
10센티짜리 대못을 꽂은 채 떠도는
고양이 뉴스를 봤다
빼려고 얼마나 부볐는지
핏속 못이 조금 헐거워졌다고 했다 사람이 동물을
얼마나 낙담시키는지 이미 잘 알고 있다
다정한 모임 속 네가 갑자기 내 머리에 못을 박았다
그 대못 얼버무리려 괜한 웃음을 웃느라
이마와 코가 헐거워졌다,
너무 가깝거나 멀어 몹쓸
사이도 아닌데 인간이 인간을 얼마나 낙담시키는지
이미 잘 알고 있다
잘 알고 있는데도 뺨으로 눈썹이 흘러내렸다
나는 확실히
사람과 잘 안 맞아 어떻게 사람이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죽은 척하는 순간
고양이가 내 두 손을 지목한다
그들의 중년 1
필라멘트 같은 골목
화분으로 누빈 대문과
물로 지은 벽들
푸성귀처럼 싱싱한 숨과
귀를 터뜨리는 기차소리
바닷물 내음을 톡 쏘는 지느러미
한 정신과 의사는 폭우 오는 날이면
한낮부터 문 닫고 멀고 따뜻한 고향 같은 방에 있고 싶다
모두의 마음에 그런 방이 있다 했다
폭우 며칠째 계속되던 어느 여름날
꽉 막힌 도로 위 차 안에서
붉고 외진 네온싸인 성곽에서
나오는 그와 어린 여자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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