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박노자, 한겨레출판, 2009(초판 2쇄)
다수의 한국인들은 정부 정책을 불신하는 것은 물론, 대한민국 자체를 불신한다. 희망과 미래가 없는, 암울한 나라로 보는 것이고, 자신들과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고민, 걱정으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체제에서는 그 어떤 질적 발전의 전망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하면서도, 이 체제를 뒷받침하는 정치 세력에 대한 암묵적 내지 명시적 지지를 끝내 철회하지 못하는 것은 오늘날 ‘평균적 한국인’의 자기 모순적 모습이다.
내가 만난 한국 젊은이 대부분은 학습 경쟁을 강요해온 부모 세대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으며, ‘모두 골고루 잘사는 사회’ ‘돈이 없어도 자기실현이 가능한 사회’에 대해서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다.
노르웨이 학생들에게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문제였다. 산업화된 나라 중에서 미국 다음으로 한국과 일본이 가장 보수적인 곳이 아닌가,라고 묻는 이들도 있다.
학계에서 자주 지적되는 한∙일의 상대적 보수성의 원인 중 하나는, 자영업자 인구가 상대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전체 비농업 부문 피고용자에 대비해 비농업 자영업자가 5퍼센트도 안 되는 노르웨이에서는,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안정된 소득의 임금 노동자들이 맹목적 ‘성장’보다 차라리 재분배 위주의 정책에 더 쉽게 합의한다.
외국 진보 정당에서는 유망한 20대 활동가들을 사회에서 체계적으로 발굴하고 전략적으로 공천한다. 예를 들어 노르웨이 국회의 경우 노동당 소속 국회의원 중 2명이 20대 초반의 학생이며, 종합적으로 30세 미만의 국회의원이 전체 169의석 중 13명이고 거의 다 진보 정당에 속해 있다. 스웨덴 국회는 30세 미만의 17명(전체 의석은 349석) 의원 중에서 5명이 사민당과 좌파당, 녹색당 등 좌파 계열이다.
최연소 국회의원이 1971년생인 한국에서 ‘20대 국회의원’은 마치 다른 세상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민주노동당은 과연 다른 정당에 비해서 20대들의 당직 등용에서라도 더 많은 실적을 냈던가?
특정 정파의 영향 아래 있는 학생 조직의 관계자가 아닌 ‘일반적’ 20대 진보주의자들을 외면해온 정당에 20대들이 왜 지지를 보내야 하는가? 지난 대선에서 20대들이 보인 민주노동당에 대한 무관심은 1980년대까지 당연시됐던 장유유서의 유습을 버리지 못한 80년대식 ‘운동권 정당’의 업보랄 수 있었다.
‘젊음’과 ‘대듦’은 진보의 생명이다!
<조선일보>는 판매 부수 1위지만, 4년 전 국내의 한 여론조사 결과 이 신문을 가장 신뢰한다고 밝힌 응답자는 8.9퍼센트에 불과했다. <동아일보>에 대한 신뢰도는 아예 5.1퍼센트로 나타났다. 영국 BBC 방송 조사에서, 신문 보도에 대한 한국인의 종합적 신뢰도는 64퍼센트에 불과해 미국(81퍼센트)이나 독일(80퍼센트), 영국(75퍼센트)보다 훨씬 낮았다. 타성적으로 읽기는 읽지만 경험적으로 보수 언론이 사익 추구 집단에 지나지 않음을 파악한 것이다.
사실, “부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성경과 상반되는 내용을 설교하는 교회들의 수로 봐서는, 자본주의야말로 이 나라의 유일무이한 종교라는 생각도 든다.
성장 시대는 이제 끝났다. ‘구조적 불안과 빈곤’ 시대의 막이 올랐다.
기성세대는 물론,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해봐도 약 22퍼센트가 “부자가 되는 것이 정직하게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답한다. 참고로, 방글라데시에서 그렇게 답하는 이들은 3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도덕 선생’이 이미 경멸적인 표현이 된 지 오래된, 모든 것이 다 아파트 평수와 연봉 액수로 재단되는, 약육강식의 왕국에서 수많은 유권자들은 ‘성공적인 사기꾼’을 자신의 희망적 모델로 볼 뿐이다.
일본∙한국 자본주의 모델에서 ‘대학’이란 일차적으로 ‘20대 초반 청년 대다수의 최종 사회화 기관이고, 사회의 위계서열적 분류 작업을 담당하는 신분 결정적 기관’이다.
그렇다면 이제 ‘명문대’라는 말을 스웨덴어나 노르웨이어로 번역해보자. 딱 맞는 번역어 자체가 없다. 동질의 사회 현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보통 ‘prestisjetungt universitet(사회적 권위를 부여하는 대학)’이라고 번역하지만, 어쨌든 직역어는 아니다. 그리고 일본과 한국에서 고교 졸업생의 90퍼센트 가까이가 대학에 진학하는 ‘진짜 이유’를 북구 학생들에게 설명하기가 너무나 힘들다.
터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첨언하자면 대한민국처럼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을 불인정하고 감옥에 보내 전과자로 만들고 평생 이등 시민으로 만드는 ‘민주주의 국가’들은 터키와 싱가포르, 그리고 아제르바이잔 정도다.
“백성이 힘들어서 혁명이 일어난다”는 등식은 역사적으로 봤을 때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 백성이 힘들면 발버둥 쳐 살기도 하고, 굶주려 죽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혁명이 곧 일어나는 건 아니다. 한 가지 필수조건이 있다. 다름이 아니라 ‘국가 폭압 기구의 내파∙돌연적 약화’다.
지난 촛불집회 때 2명의 의견이 상부의 명령이 아닌 양심의 명령을 좇아 데모 진압을 거부한 일이 있었지 않나? 만일 그런 의경이 2명이 아닌 2천 명이었다면 이명박이 망명지를 알아봐야 할 상태가 됐을지도 모른다. 시위대와 의경이 하나가 된 군중이 청와대를 향해 간다……, 이건 벌써 저들에게 악몽 중의 악몽일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의 발생 확률이 아직도 매우 낮다. 그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고 굽실거리기만 잘하면 만사형통하여 입신출세한다는 걸 유치원 때부터 가르치고 초등학생부터 점수 경쟁을 시켜버리면, 나중에 커서도 교과서에 안 나오거나 선배들도 이야기하지 않는 일은 어지간해서는 하지 않게 되어 있다.
마르크스의 여러 글 중에서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문구는 『경제-철학 초고』(1844)의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노동의 소외란 무엇인가? 첫째, 노동이 노동자에게 외재적이라는 사실이다. 즉 노동이 노동자의 실존에 속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노동자는 그 노동을 통해 자신을 확립시키지 못하고 그 반면 자기 자신을 부정한다. 노동자는 노동의 과정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불쾌감을 느끼며, 유쾌한 심신의 기운을 발산하지 못하는 반면, 그 심신을 파괴시킨다. 노동자는 노동하지 않을 때만 행복감을 느끼고, 오히려 노동할 때 불행하다고 느낀다. 노동하지 않을 때 자신의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함을 느끼고, 노동할 때는 ‘바깥’에 있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즉 그의 노동이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요받은 노동이다.
“국가 대항전 형태의 축구 시합에 빠져드는 것이 왜 위험한지 잘 알겠는데, 그래도 텔레비전에서 운동 경기라도 보면서 응원하지 않으면 여가시간을 도대체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로서는 그 질문을 듣는 순간이 일종의 깨달음의 시간이었다.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끼치는 최악의 해악이 무엇인지 바로 그 순간에 생생하게 체감했다.
괴롭게 태어나고 괴롭게 죽게 돼 있는 인간은, 그에게 주어진 얼마 안 되는 평온과 고요함의 시간을 얼마든지 즐겁게 보낼 수 있다. 그러나 남과 같이 소비하지 않으면 불안과 외로움을 느끼고, 혼자 조용하게 있으면서 ‘나’의 존재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삼성공화국의 배부른 노예 대다수에게 이 이야기는 아마도 내향적 성격 때문에 사회와 어울릴 줄 모르는 낙오자의 설교로 들릴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생산수단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 자신들의 진정한 존재(실존)로부터도 소외되어 인간으로서의 ‘나’를 상실하고 만다.
이 나라가 미국 본받기를 하도 좋아해서 하는 말인데, 미국의 식량 자급률은 125퍼센트다. 그 부분부터 본받는 건 어떨까?
일본의 식량 자급률이 40퍼센트 안팎이 되었을 때 일본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문제 제기를 했는데, 일본보다 더 일본적인 난 개발, 묻지 마 개발로 치달은 한국의 식량 자급률은 고작 28퍼센트 정도다. 어느 정도로 산업화된 국가치고 이런 국가는 어디에도 없다. 지금도 반도체를 팔아 번 돈의 약 절반을 식량 수입에 쓰고 있지만 이제 몇 년 후 세계적 식량 위기가 더 심화되면 그대로 거덜 날 상황에 처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어떻게 보면 한국의 사회 경제는 자전거형이다. 성장률이 높아 빨리 달릴 때는 괜찮은데 성장이 낮아져 속도를 못 내면 바로 넘어지는, 안정성이 없는 구조다. 우리의 위기감은 거기서 발생되는 것 같다.
예컨대 학비도 입학시험도 연령 제한도 없는 노르웨이에서는 거의 누구나 (학교 성적이 아주 나쁘지 않은 이상) 고졸 이상이면 언제든지 대학에 들어와서 좋아하는 과목을, 그저 자기 자신의 ‘자아실현’을 위해서 공부할 수 있다.
심지어 총장 선거를 할 때도 학생들에게까지 투표권을 준다. 한국의 대학 중 총장 선거에서 학생들에게 투표권을 주는 학교가 몇 군데나 있을까?
미안한 얘기지만 수능시험장 벽이나 문에 기대 열심히 기도하는 어머니들의 모습을 볼 때 나는 감동하기는커녕 답답해서 울고 싶은 심정이 된다. “내 아이가 암기 경쟁에서 남을 잘 눌러 올라서서 승리 하기를” 예수님이나 부처님에게 기도하기보다 오히려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하셨듯이 (부모의 의도가 아닌)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갈 수 있는 용기를 지니도록 기도하는 것이 진정 종교인의 마음이 아닌가.
학교에서 반장이 선생의 ‘착실한 보조원’ 역할을 벗어나, 학생들을 대표해서 학교의 행정에 참여하거나 또는 결정권을 가지지는 못해도 학생들에 관한 사항을 요구하거나 권고하는 적극적인 학교생활을 상상할 수 있는가?
비현실적인 주장이라고 일축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중국, 인도, 파키스탄에서 코리아타운들이 번성하기를 원한다면 ‘단속’을 두려워하지 않는 국내의 차이나, 인도, 파키스탄 타운들도 세워져야 되지 않을까?
어린아이는 알게 모르게 부모를 따르게 돼 있다. 그리고 판매원 아주머니나 경비실 아저씨를 대할 때와, 길 가다 우연히 부딪친 상사를 대할 때 나의 엄마, 아빠가 얼마나 다른가를 당장 눈치 챈다. 그러고는 인간 사이의 보이지 않는 ‘사다리’를 몸으로 익히기 시작한다.
회중교회(會衆敎會, Congregational Church) 계통에 속하는 오벌린 대학의 학장 에드워드 도스워스는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어 징병령이 내려졌을 때 다음과 같은 발언으로 ‘명성’을 얻었다.
“기독교적 군인은 기독교 박애정신으로 적병에 부상을 입히고 살해한다. 그 마음속으로 적병을 저주하지 않으면서 살해만 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적 전쟁 방식이다.”
이 제도의 신설을
‘모자보건법’ 제14조에 명시된 특별한 이유 이외에는 낙태가 법적으로 아직 ‘불법’으로 남아 있음에도, 연구자들이 추정하는 실질적 낙태율이 세계 최고를 기록하는 한국의 경우는 어떤가? 15~44세 여성의 연간 낙태율이 1천 명당 평균 29.8명으로 미국(21.1명)이나 영국(17.8명) 등을 능가하는 한국에서는, 가톨릭을 비롯한 종교 단체들이 원론적으로 낙태 반대 의견을 밝혀도 낙태 문제의 당사자인 여성이나 사회 여론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지 않다.
세계 50대 대형 교회 중 23곳을 보유한 나라가 ‘낙태의 낙원’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세계적 투자국, 선교사 파송국, 관광객 출발국, 군대 파병국인 대한민국은 이미 악명 높은 가해자가 된 지 거의 20년이 지났다.
솔직히 나는 ‘광복’이라는 이름 자체도 다소 비현실적이라 불만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광복’이란, 일제가 먹어버렸던 한반도를 미 제국과 소련 제국이 분할 점령한 것으로, ‘점령자의 교체’에 불과했다는 것은 아쉽지만 현실이었다.
수상 거부 이유를 묻는 기자들에게, 페렐만은 학계와의 접촉을 피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는, 수학계 보스 중의 한 사람이 푸앵카레의 추측을 푸는 과정에서 자기 제자들의 역할을 과장한 데 대해 한심하다는 심경을 피력하고, “다수의 수학자들이 개인적으로 정직하다고 해도, 정직하지 않은 ‘권력자들의 횡포’를 그냥 수용하는 순응주의자에 불과하다”고 덧붙였다.
불교 사찰을 즐겨 탐방하는 러시아 정교회 신자였던 그는 한국의 일부 개신교도들의 독선주의에 혀를 내두르며 “아니, 천 년 전에 이미 기독교화된 러시아로 가서 선교를 한다니 이게 무슨 뜻이오?”…
사실,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대학이란 (특히 사립대학은) 꽤나 비싼 (그리고 갈수록 물가 이상 지수 이상으로 계속 비싸지는) 돈을 받고, 사무직 노동자 이상의 신분 이동을 보장해주는 신분 증서를 만들어 파는 일종의 공장이다.
그리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아이들에게 (대학에 아예 안 갈 수도, 모두들 외국 유학 갈 수도 없잖은가?) 거의 약탈 수준의 돈을 받고 신분 증서를 판매하는 착취 공장에서는, 심오한 이론 개발이나 순수 학문에 대한 열정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일반적인 상식마저도 기대하기가 어렵다.
구미 학생들과 한국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교사와 함께 그룹으로 토론할 때, 한국 학생들은 자신들의 독자적 생각을 논리적으로 정리하여 참석자들을 설득하거나, 반론을 받았을 경우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가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들 말한다. 토론 능력, 독자적 논리력을 개발시키자면 기존의 권위가 부정될 가능성을 허용해야 한다. 그러나 이 가능성은 한국 청소년들에게는 부정되는 것이다.
학교 운영 사항은커녕 자신의 머리 길이와 색깔마저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없는, ‘훈육 대상’일 뿐인 한국 청소년에게 이는 남의 나라 이야기라기보다는 달나라 이야기에 가까울 것이다.
2005년쯤인가 고려대에서 우편으로 보낸 두툼한 학교 홍보 자료를 받았는데, 끔찍하게도 홍보책자 첫 페이지에 영문으로 “고려대학교는 현직 국회의원의 20퍼센트를 배출한 대한민국 최고 명문 대학 중 하나”라고 적혀 있었다. 이 문구를 보는 순간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런 방식으로 학교를 홍보하는 사람들은 몇몇 특정 ‘명문’ 대학의 전국적 패권주의가 세계적 자랑거리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이 문구를 보는 외국 대학의 관계자들이 당장 고려대의 ‘힘’을 우러러볼 것으로 기대하는 것인가? 학교 간 교류 문제다 보니 그 자료를 상부에 제출해야 했지만, 나의 ‘한국 모교’가 이러한 방식으로 홍보물을 만들었다는 것이 부끄러워서 제출을 계속 미루기까지 했다.
“모든 권력이 권력자를 부패시키지만 절대적 권력은 권력자를 절대적으로 부패시킨다”는 말만큼이나 “모든 특권들이 양심과 양식(良識)을 마비시킨다”는 말도 옳을 수밖에 없다. ‘대듦의 정신’이 증발되는 날에는 관악골도 신촌골도 안암골도 지성의 무덤이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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