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의 발달, 문태준, 문학과지성사, 2009(초판 4)

 

 

 

 

 

 

 

2

 

 

가을 풀밭에 앉아 있었네

 

가을 풀벌레는

무릎 주름에서 우네

 

걸어가며 울던

나의 어머니

 

 

 

 

 

 

 

 

동산

 

 

동생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동산에 놀고 있다

염소도 염소도 함께 있다

별도 까마귀도 같이 앉아 있다

우는 소린지 웃는 소린지 알 수 없다

이곳은 아득히 멀다

이곳서는 저쪽이 너무 작다

누나는 또 동생을 부르러 갔다, 가면서

동생의 이름을 길게 부른다

멀리서 동생은 내 이름을 길게 부른다

은하처럼 길게 나를 부른다

글쎄,

내가 왜 벌써 이곳으로 돌아왔는지 알 수 없다

 

 

 

 

 

 

 

평생(平生)

 

 

저녁이 다 오고

강아지들이 어미의 젖을 찾는 것을 본다

어미는 저녁처럼 젖은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고

눈을 못다 뜬 다섯의 강아지들은

머리통을 서로 밀고 찧으며

저녁밥을 찾는다

어디 다른 데에서 목숨을 사는 것이 아니라

저것이 평생이다

 

 

 

 

 

 

 

 

이제 오느냐

 

 

화분에 매화꽃이 올 적에

그걸 맞느라 밤새 조마조마하다

나는 한 말을 내어놓는다

이제 오느냐,

아이가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올 적에

나는 또 한 말을 내어놓는다

이제 오느냐,

 

말할수록 맨발 바람으로 멀리 나아가는 말

얼금얼금 엮었으나 울이 깊은 구럭 같은 말

 

뜨거운 송아지를 여남은 마리쯤 받아낸 내 아버지에게 배냇적부터 배운

 

 

 

 

 

 

 

 

추운 옆 생각

 

 

족제비가 뒤를 돌아가는 소리도 들릴 만하게 조용하고 무섭고

세상의 모든 검은 열매를 모아 즙을 내놓은 듯 캄캄하고

누군가 마당에 문득 들어선 듯 굵은 눈이 막 듣고

너는 누이의 몸에서 이불을 끌어내려 너의 곯은 배를 덮고

너의 아버지는 꺼져가는 새벽 아궁이에 굵은 산솔잎을 지피고

너의 아버지는 소의 등에 덕석을 올리고 낮에 기운 털옷을 입히고

 

옆이라도 이런 옆은 없었으면 싶게 옆이 어는 날에는

 

곯은 너의 배와

너의 아버지와

막막하게 추운 하늘을 소의 눈알처럼 끔벅끔벅 올려보던 굵은 눈

 

 

 

 

 

 

 

살얼음 아래 같은 데 2

 - 生家

 

 

겨울 아침 언 길을 걸어

물가에 이르렀다

나와 물고기 사이

창이 하나 생겼다

물고기네 지붕을 튼 살얼음의 창

투명한 창 아래

물고기네 방이 한눈에 훤했다

나의 생각 같았다

창으로 나를 보고

생가의 식구들이

나를 못 알아보고

사방 쪽방으로 흩어졌다

젖을 갓 뗀 어린것들은

찬 마루서 그냥저냥 그네끼리 놀고

어미들은

물속 쌓인 돌과 돌 그 틈새로

그걸 깊은 데라고

그걸 가장 깊은 속이라고 떼로 들어가

나를 못 알아보고

무슨 급한 궁리를 하느라

그 비좁은 구석방에 빼곡히 서서

마음아, 너도 아직 이 생가에 살고 있는가

시린 물속 시린 물고기의 눈을 달고

 

 

 

 

 

 

 

나와 거북 2

 

 

시간이여,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사람에게 마른 데를 보여다오

 

아무도 없는 텅 빈집에 내가 막 들어섰을 때 나의 거북이 작은 몽돌 위에 올라 앉아 사방으로 다리를 벌리고 몸을 말리듯이

저 마른 빛이 거북의 모든 소유(所有)이듯이

 

걸레처럼 축축하게 밀고 가는 시간이여,

마른 배를 보여다오

 

 

 

 

 

 

 

 

 

구겨진 셔츠

 

 

벽에 셔츠가 걸려 있다

겨드랑이와 팔 안굽이 심하게 구겨져 있다

바람과 구름이 비집고 들어가도

잔뜩 찡그리고 있다

작은 박새도 도로 날아 나온다

저 옷을 벗어놓은 몸은

오늘 밤을 자고 나도 팔이 아프겠다

악착같이 당기고 밀치고 들고 내려놓았을

물건들, 물건 같은 당신들,

벽에 셔츠가 비뚜름히 걸려 있다

오래 쥐고 다닌 약봉지처럼 구겨진 윤곽들,

內心에 무언가 있었을,

內心으론 더 많은 구김이 졌을

 

 

 

 

 

 

 

 

 

겨울 강에서

 

 

슬픔은 슬픔이어도 강 어부가 얼음낚시를 하려 얼음에 뚫어놓은 모란꽃만 한 구멍 같았으면

그대 가슴속에도 몸이 투명한 빙어 떼가 노는가

 

얼음 구멍 아래

 

치마 한 감 거리 빛 속

 

반짝이는 빛이었구나 빛의 한 마리 몸이었구나,

찬 없는 밥을 삼키던 누이는

머릿수건 올려 찬물 한 동일 이고 돌아오던 키 작은 내 누이는

 

 

 

 

 

 

 

 

 

 

 

 

 

 

'other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이컨셉의 시대가 온다 - 스콧 매케인  (0) 2009.11.29
김수영 전집1 시  (0) 2009.11.27
칼의 노래 - 김훈  (0) 2009.11.23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 박노자  (0) 2009.11.18
배가본드 30권, Takehiko Inoue  (0) 2009.11.1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