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꽃피는 숲에 저녁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오른 섬들은 바다에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싶었다.
목이야 어디로 갔건 간에 죽은 자는 죽어서 그 자신의 전쟁을 끝낸 것처럼 보였다.
죽여야 할 것들을 다 죽여서, 세상이 스스로 세상일 수 있게 된 연후에 나는 내 자신의 한없는 무기력 속에서 죽고 싶었다.
그 「나무묘법연화경」의 깃발을 치켜든 적선들은 다시 눈보라처럼 밀려왔다.
서울 의금부에서 문초를 받는 동안 나는 나를 기소한 자와 탄핵한 자들이 누구였던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는 정치에 아둔했으나 나의 아둔함이 부끄럽지는 않았다.
권률이 돌아간 뒤, 나는 종을 시켜 칼을 갈았다. 시퍼런 칼은 구름 무늬로 어른거리면서 차가운 쇠비린내를 풍겼다. 칼이 뜨거운 물건인지 차가운 물건인지를 나는 늘 분간하기 어려웠다. 나는 칼을 코에 대고 쇠비린내를 몸 속 깊이 빨아넣었다. 이 세상을 다 버릴 수 있을 때까지, 이 방책 없는 세상에서 살아 있으라고 칼은 말하는 것 같았다.
구례에 도착하던 밤에 혼자서 술을 마셨다. 술이 먼 것들을 가깝게 당겨주었다. 두 달 전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떠올랐다.
- 적의 선두를 부수면서, 물살이 바뀌기를 기다려라. 지휘체계가 무너지면 적은 삼백 척이 아니라, 다만 삼백 개의 한 척일 뿐이다.
싸움은 싸울수록 경험되지 않았고, 지나간 모든 싸움은 닥쳐올 모든 싸움 앞에서 무효였다.
- 나으리의 몸이 수군의 몸입니다.
- 그렇지 않다. 수군의 몸이 나의 몸이다.
히데요시가 전 일본의 군사력을 휘몰아 직접 군을 지휘하며 바다를 건너올 것이라는 풍문 앞에 조정은 무겁게 침묵하고 있었다. 나를 죽이면 나를 살릴 수 없기 때문에 임금은 나를 풀어준 것 같았다. 그러므로 나를 살려준 것은 결국은 적이었다. 살아서, 나는 다시 나를 살려준 적 앞으로 나아갔다. 세상은 뒤엉켜 있었다. 그 뒤엉킴은 말을 걸어볼 수 없이 무내용했다.
나는 벼루를 당겨 먹을 갈았다. 칼에 문자를 새긴다는 장난이 쑥스럽고 수다스럽게 느껴졌다. 먹을 천천히 갈면서, 그 쑥스러움을 밀쳐낼 만한 문구를 생각했다. 문구는 냉큼 떠오르지 않았다. 베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세를 바꾸는 순간의 칼을 나는 생각했다. 나는 칼의 휘두름과 땅위로 쓰러지는 쓰레기를 떠올렸다.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일휘소탕 혈염산하
一揮掃蕩 血染山河
칼로 적을 겨눌 때, 칼은 칼날을 비켜선 모든 공간을 동시에 겨눈다. 칼은 겨누지 않은 곳을 겨누고, 겨누는 곳을 겨누지 않는다. 칼로 찰나를 겨눌 때 칼은 칼날에 닿지 않은, 닥쳐올 모든 찰나들을 겨눈다. 적 또한 그러하다. 공세 안에 수세가 살아 있지 않으면 죽는다. 그 반대도 또한 죽는다.
- 강물 위에서 싸움을 할 만하겠느냐?
안위가 대답했다.
- 물이 흔들리지 않으니 더욱 두려웠습니다.
송여종이 말했다.
- 강은 물이 아니라 뭍입니다. 강 양쪽 뭍에서 적의 육군이 쏘아대면 아마도 수군은 견뎌내지 못할 것입니다.
끼니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적은 수군이라기보다는 배를 탄 육군에 가까웠다. 적은 무수한 병졸들의 개인의 몸으로 돌격해 들어왔다. 그때, 적은 눈보라처럼 몰아쳐왔다. 적은 휘날렸고 나부꼈으며 적은 작렬했다. 달려들 때, 적이 죽기를 원하는지 살기를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달려드는 적 앞에서 나는 물러섰고 우회했고 분산했다.
쇠의 안쪽에도 저러한 무늬가 있었구나, 언젠가 내가 적의 칼을 받게 되면 저러한 쇠의 무늬가 내 목숨의 무늬를 건너가겠구나,
나는 가난했다. 적 안에 내포된 죽음만이 나의 재산이었다.
나는 달빛에 젖어 잠들었다.
정유년 가을에 바람이 고와서 소금은 고요했다.
나는 결국 자연사 이외의 방식으로는 죽을 수 없었다. 적탄에 쓰러져 죽는 나의 죽음까지도 결국은 자연사일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적이 물러가버린 빈 바다에서는 죽을 수 없었다. 나는 갈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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