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신, 리처드 도킨스, 김영사, 2009(1판43쇄)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 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
로버트 퍼시그
전통을 따르고 학살당한 친척들에게 신의를 지키는 한편,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범신론적 경의를 종교와 혼동하여 그것에 종교라는 꼬리표를 붙임으로써 스스로 자랑스럽게 유대인이라고 말하고 유대 관습을 지키는 지적인 무신론자들이 많다. 그들은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의 말을 빌리면 “믿음을 믿는다.”
비종교인을 포함하여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고 있는 가정 중 하나는 신앙이 모욕에 몹시 취약하므로 인간을 대할 때보다 훨씬 높고 훨씬 두꺼운 존경의 벽을 쌓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인이 된 작가 더글러스 애덤스(Dougas Adams)는 사망하기 얼마 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행한 즉석연설에서 그것을 아주 잘 표현했다.
종교는…… 신성하거나 성스러운 어떤 개념을 중심에 놓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당신은 이것에 대해 나쁘게 말해서는 안 된다. 그냥 그래서는 안 된다. 왜 안 되느냐고? 그냥 그러면 안 되는 거다!”라는 겁니다.
노동당이나 보수당, 공화당이나 민주당, 경제학의 여러 모형들 중 하나, IBM이나 매킨토시를 지지하는 것은 지극히 합당한 일이지만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누가 우주를 창조했는가, 그것이 과연 신성한가에 대해서는 어째서 한 가지 견해만 지녀야 한다는 것인가요?
“기독교는 여태껏 인간이 갈고 닦은 가장 비뚤어진 체제다” 같은 제퍼슨의 말들은 자연신론뿐 아니라 무신론과도 부합된다.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의 “등대가 교회보다 더 유용하다”나 존 애덤스의 “가능한 모든 세계들 중에서 최상의 것은 종교가 없는 세계일 것이다”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애덤스는 특히 기독교에 반대하는 멋진 연설을 한 바 있다.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기독교는 계시 종교였고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 어떻게 수많은 우화, 설화, 전설이 유대교와 기독교라는 계시 종교와 뒤섞여서 역사상 가장 많은 피를 부른 종교를 만들어낸 것일까?”
“폐하, 제게는 그 가설이 필요 없었습니다.” 유명한 수학자인 라플라스(Pierre Simon Marquis de Laplace)는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이 어떻게 신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책을 쓸 수 있는지 묻자 그렇게 대답했다.
칼 세이건은 우주의 다른 곳에 생명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무신론적인 답변을 했다. 처음에 그가 그 질문에 대한 입장을 밝히기를 거부하자, 상대방은 그에게 ‘직감(gut feeling)’이 있을 것 아니냐고 대답을 강요했다. 그러자 그는 영원히 남을 만한 명답을 했다. “나는 창자(gut)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사실 증거가 나올 때까지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좋지요.”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의 찻주전자 우화가 그 방법을 제대로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은 이미 수용된 독단적 견해는 독단론자들이 아닌 회의론자들이 반증해야 하는 것처럼 말한다. 물론 그것은 잘못이다. 내가 지구와 화성 사이에 타원형 궤도를 따라 태양을 도는 중국 찻주전자가 하나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찻주전자가 우리의 가장 강력한 망원경으로도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작다는 단서를 신중하게 덧붙인다면, 아무도 내 주장을 반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 주장이 반증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을 의심하는 것은 인간 이성에 대한 용납하기 어려운 억측이라고까지 내가 말한다면 그건 헛소리로 여겨져야 옳다. 하지만 그런 찻주전자가 존재한다고 옛 서적에 명확히 나와 있고, 일요일마다 그를 신성한 진리라고 가르치며, 학교에서도 그를 아이들의 정신에 주입시킨다면, 그 존재를 썬뜻 믿지 못하는 것은 괴짜라는 표시가 될 것이고, 이를 의심하는 자는 계몽시대의 정신과의사나 그 이전의 종교 재판관의 이목을 끌게 될 것이다.
현재 인터넷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신 - 야훼나 다른 신 못지않게 반증 불가능한 – 이 하나 있다. 바로 비행 스파게티 괴물인데,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꼬불꼬불한 부속지로 자신의 몸을 건드렸다고 주장한다. 기쁘게도 <비행 스파게티 괴물 복음서>라는 책까지 나와 있다. 읽어보지 않았지만, 그것이 진리라면 굳이 복음서를 읽어야 할까? 그런데 결국은 일어나야 할 일이 터지고 말았다. 비행 스파게티 괴물 교파에 개혁파가 등장하면서 큰 분열이 일어난 것이다.
이 모든 기발한 사례들의 요점은 그들이 반증 불가능하지만, 아무도 그들의 존재 가설이 그들의 비존재 가설과 대등한 토대 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러셀은 그 거증 책임이 불신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자에게 있다고 본다.
‘기도하다’라는 동사에 대한 앰브로즈 비어스(Ambrose Beirce)의 재치 만점의 정의를 떠올려보자. “지극히 부당하게 한 명의 청원자를 위해서 우주의 법칙들을 무효화하라고 요구하는 것” 자신이 이기도록 신이 돕는다고 믿는 운동선수가 있다…
무신론자 철학자 J. L. 매키는 <유신론의 기적>에서 아주 명쾌한 논의를 펼친다. 내가 “철학자는 상식을 답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찬사다.
조지 W. 부시(George W. Bush)는 신으로부터 이라크를 침공하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딱하게도 신은 그곳에 대량 살상 무기가 없다는 계시를 내려주지는 않았다).
복음서들은 모두 예수가 사망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쓰였다. 심지어 예수의 삶에 관해 거의 언급하지 않은 사도 바울의 서간들보다 한참 뒤에 쓰인 것이다. 그 뒤로 모든 복음서들은 종교적 의도를 지닌, 오류에 빠지기 쉬운 필경사들로 이루어진 수많은 ‘중국 귓속말 놀이 세대들’을 통해 복사되고 또 복사되었다.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들은 진실인 것과 자신들이 진실이라고 믿고 싶은 것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고질적인 습성을 지닐 때가 많다.
그것은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가 비판한 ‘틈새의 신(God of the Gaps)’ 전략과 똑 같은 그릇된 논리에 기댄다. 창조론자들은 현재의 지식이나 이해에 나 있는 틈새를 열심히 찾아다닌다. 틈새가 발견되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신이 채워야 하는 것이라고 가정된다.
일반적으로 말해 종교가 미치는 진정으로 나쁜 효과 중 하나는 “몰이해에 만족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가르친다는 점이다.
신이 무엇인가의 설명이라고 보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설명이 아니다. 그것은 설명의 부재, 어깨를 으쓱하는 것, 영성과 의식으로 치장한 “난 몰라”다. 누군가가 무언가를 신의 공로로 돌린다면, 일반적으로 그 말의 의미는 그들이 단서를 갖고 있지 않으며, 그래서 그것을 자신의 능력 밖의, 이해할 수 없는 요정과 같은 범주로 본다는 것이다.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이렇게 말했다. “신자가 회의주의자보다 더 행복하다는 말은 술 취한 사람이 멀쩡한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는 말과 별 다를 바 없다.”
미국의 코미디언 캐시 래드먼은 말한다. “모든 종교는 똑같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축제일이 서로 다른 죄의식이다.”
샘은 땅을 향해 있던 시선을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당신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돌아오기를 2000년 동안 기다릴 수 있다면, 나도 존을 19년 이상 기다릴 수 있지요.”
폭력 범죄율이 가장 낮은 25개 도시 가운데 62퍼센트는 ‘푸른(민주당)’ 주에 있으며, 38퍼센트는 ‘붉은(공화당)’ 주에 있다. 25개의 가장 위험한 도시 중에서 76퍼센트가 붉은 주이며 24퍼센트는 푸른 주다. 사실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 다섯 곳 중 세 곳이 신앙심 깊은 텍사스 주에 있다.
대니얼 데닛은 <주문 깨기>에서 해리스의 책이 아니라 그런 연구 전반에 대해 야유를 보낸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결과들은 종교인들이 도덕적으로 더 고결하다는 일반적인 주장에 아주 강한 타격을 입혔기에 그것들을 반박하려는 종교 단체들의 주도로 후속 연구들이 왕성하게 이루어졌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도덕적 행동과 신앙 사이에 의미 있는 긍정적인 관계가 있다면 그것이 곧 발견되리라는 것이다. 너무나 많은 종교 단체들이 그것에 대한 전통적인 믿음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고자 열의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과학이 자신들이 이미 믿고 있는 것을 지지할 때면 과학의 진리 발견 능력에 아주 깊은 인상을 받는다.) 다달이 그렇다는 발표 없이 지나가는 걸 보니 그렇지 않다는 의심이 깊어진다.
설령 우리가 도덕적이 되기 위해 신이 필요하다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그것은 신의 존재 가능성을 더 높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의 존재를 더 바람직하게 만드는 것일 뿐이다(많은 사람들은 그 차이를 알지 못한다).
유명한 스페인의 영화감독 루이 브뉘엘(Luis Bunuel)은 이렇게 말했다. “신과 국가는 무적의 팀이다. 그들은 억압과 유혈의 모든 기록을 깬다.”
직업군인이 내뱉는 “조국이 옳든 그르든”이라는 말보다 더 절대적인 것은 없을 듯하다.
물론 나도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것이 변했으며, 오늘날의 그 어떤 종교 지도자도 모세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탈레반이나 그에 상응하는 미국 기독교 인사들은 제외하고). 그러나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려는 요점이다. 내가 입증하고자 하는 것은 현대의 도덕이 어디에서 나오든 간에 성경에서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노벨상을 받은 미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와인버그(Steven Weinberg)는 이런 말을 했다. “종교는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한다. 그것이 있든 없든, 선한 사람은 선행을 하고 나쁜 사람은 악행을 한다. 하지만 선한 사람이 악행을 한다면 그것은 종교 때문이다.”
파스칼도 비슷한 말을 했다. “사람은 종교적 확신을 가졌을 때 가장 철저하고 자발적으로 악행을 저지른다.”
가족의 가치에 대해 다소 위험한 견해를 취하고 있긴 해도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들은, 적어도 <구약성서>가 윤리적으로는 재앙의 수준임을 감안하면 찬탄할 만하다.
레니 브루스(Lenny Bruce)는 이를 제대로 꼬집었다. “만일 예수가 20년 전에 죽었다면, 가톨릭 신자들은 목에 십자가 대신 작은 전기의자를 걸고 다닐 것이다.”
아이들을 세뇌시키지 말라. 그들에게 스스로 생각하는 법, 증거를 평가하는 법, 당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법을 가르쳐라.
요점은 성서 시대 이후로 우리가 크게 변해왔다는 것이다. 문명국가가, 성서와 역사 속에서 오랜 기간 당연시되어왔던 노예 제도를 폐지한 것은 19세기의 일이었다. 현재 모든 문명국가들은 1920년대까지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던 것을 수용하고 있다. 바로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을 부여하는 것 말이다. 현대의 계몽된 사회에서 여성들은 성서 시대와는 달리 더 이상 재산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현대의 법 제도는 아브라함을 아동 학대죄로 기소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정말로 이삭을 제물로 바친다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면, 그는 일급 살인죄로 유죄판결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관습에 따르면 그의 행위는 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었기에 전적으로 찬사를 받을 만한 것이었다.
무신론자는 악한 짓을 할지 모르지만, 그때에도 무신론을 들먹이지는 않는다. 스탈린과 히틀러는 각각 교조적이고 교리화한 마르크스주의와, 바그너의 음악 같은 광기가 엿보이는 비과학적인 우생학을 도용하여 극도의 악행을 저질렀다. 종교 전쟁은 실제로 종교의 이름으로 하며, 역사적으로 끔찍할 만큼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나는 무신론의 이름으로 벌어진 전쟁이 있었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 일어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는 창조론자가 공식 논쟁에 그를 끌어들이려고 할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그의 이름을 말하지 않겠지만, 그의 말에 오스트레일리아 억양이 섞여 있다는 정도만 말해두자.) “그쪽 경력에는 도움이 되겠군요. 하지만 내 경력에는 별 도움이 안 됩니다.”
신성한 책의 진리는 추론 과정의 최종 산물이 아니라 일종의 공리다. 그 책은 옳으며, 만일 증거가 그것과 모순되는 듯하면 버려야 할 것은 그 책이 아니라 증거여야 한다.
그것은 창작된 것이 분명하며, 전적으로 틀렸다. 사실 베토벤은 아홉째 아이도, 다섯째 아이도 아니었다. 그는 장남이었다.
해리스는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을 예로 들어서 선견지명을 담아 퉁명스럽게 핵심을 짚었다. 왜 세계무역센터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없애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일까? 빈 라덴을 ‘악’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런 중요한 질문에 알맞은 대답을 내놓을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이 질문의 답은 명백하다. 빈 라덴 자신이 지겨울 정도로 끈기 있게 명확히 말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렇다. 답은 빈 라덴 같은 사람들이 실제로 자신이 믿는다고 말하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코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 19명의 교육을 잘 받은 중산층 사람들은 왜 우리 이웃 수천 명을 죽일 특권과 이승에서의 삶을 바꾸었을까? 자신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곧장 천국에 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치가들은 R로 시작하는 단어(religion 즉, 종교)를 언급하는 것을 피하며, 대신 자시들의 싸움을 ‘테러’와의 전쟁이라고 규정짓는다. 마치 테러가 자체 의지와 정신을 갖춘 영혼이나 힘인 양 말이다.
혹은 그들은 테러리스트들의 동기가 순수한 ‘악’에서 비롯된다고 규정짓는다. 그러나 그들의 동기는 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들을 아무리 잘못 생각하고 있더라도, 그들의 동기는 낙태 수술을 한 의사를 살해한 기독교인처럼 자신들이 올바르다고 인식하는 것, 자신들의 종교가 말하는 것을 충실히 추구하려는 데에 있다.
진정으로 유해한 것은 신앙 자체가 미덕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행위다. 신앙은 그 어떤 정당화도 요구하지 않고 어떤 논증에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악이다. 의문을 품지 않는 신앙이 미덕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아이들 – 획득하기 어렵지 않은 다른 요소들을 고려할 때 – 을 미래의 성전이나 십자군 전쟁을 위한 치명적인 무기로 자라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모든 마을에는 횃불이 있다.
바로 교사다.
그리고 그 횃불을 끄는 사람이 있다.
성직자가 그렇다.
- 빅토르 위고
‘하지만 못해. 어떻게 신을 믿지 않을 수 있지? 나는 신이 필요해.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게다가 신을 믿지 않는 법을 모르겠어.’
“이 책은 몹시 필요한 틈새를 채운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 죽음의 공포를 별 것 아니라고 한 것도 그런 의미에서였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나는 태어나기 전 영겁에 걸친 세월을 죽은 채로 있었고 그 사실은 내게 일말의 고통도 준 적이 없다.”
나는 우주를 이해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모형 구축이라고 본다. 우리 각자는 머릿속에 이 세계의 모형을 구축한다.
분명히 예외가 있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집착하는 주된 이유는 위로 때문이 아니라 교육에 따른 무의식적인 수용, 그리고 대안(믿지 않음)에 대한 인식 부재 때문이 아닐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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