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님 복서의 꿈을 꾸었다.
장님 복서 앞에 세상은 늘 감추어져 있고
반면 장님 복서는 세상 앞에 숨을 곳이 없었다.
그는 링에 올랐고 어떤 것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어둠 속에서 날아오는 상대의 주먹을 기다렸고
주먹이 날아올 때보다
주먹이 날아오지 않는 동안이 더 괴로웠다.
장님 복서는 상대의 주먹을 맞는 순간에만 상대를 볼 수 있었고
매맞는 그의 몸이 그의 시선이었다.
장님 복서는 펀치를 맞는 찰라 자신의 펀치를 날렸고
그것은 때로 빗맞거나 때로 정통으로 상대를 가격했다.
그가 이겼는지 졌는지는 보지 못했다.
꿈은 내 의지대로 조종되지 않았고
나는 공중을 날아다니는 유령의 시선으로
싸우는 장님 복서를 보았다.
그가 가까이 붙어 주먹을 주고받을 때
그는 더 이상 장님이 아니었고 동등했다.
상대의 눈에도 불똥이 튀었고 장님의 눈에도 불똥이 튀었다.
장님은 젊었고 강했고 단단했고 싸울 줄 알았고
살 줄 알았다.
꿈의 테마가 장님이었는지, 꿈은 곧이어
장님 건축가로 옮겨갔다.
장님 건축가는 자기 사무실에서 설계도를 그리고 있었다.
그의 책상에는 스탠드가 켜져 있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니 그에겐 스탠드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의 꿈이 내게 보여주기 위해 켜놓은 불빛이었고
나는 불빛 없이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도록 길들여진 자였다.
장님 건축가는 장님이 활동하기 편안한 건물을 설계하고 있었다.
장님은 어둠 속에서도 건물 이용이 쉬운 건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자의 눈금을 하나하나 손끝으로 만져가며 수치를 계산하고
두꺼운 도화지에 송곳 팬을 그어나갔다.
그 설계도엔 색과 선이 없었으나
눈 먼 자들이 살아가기 좋은 세상을 꿈꾸는 금들이 촘촘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설계도를 만져가는 그의 손바닥이 느껴졌고
그의 이상과 꿈틀대는 혈관이 느껴졌다.
그에게 밤은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아니었고
낮과 밤의 구분이 없으므로 언제까지나 그곳에 앉아 집을 짓고 있었다.
예전 플랫 랜드 이야기라는 책을 읽었을 때처럼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빛과 색의 영역과 소리의 영역을 벗어난
색과 형상과 소리와 존재가 있을 때
우린 그것을 결코 알지 못한 채 살아갈 거라는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가 장님의 뒤로 살금 살금 걸어 지나쳐 가도
그가 우리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장님의 삶과 꿈에 대해 그 무엇 한 점 알지 못하는 눈 뜬 자들의 인생 또한
장님이 지나쳐 가도 보지 못하는 인생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린 ‘함께 살고 있다’고 할 수 없겠지.
꿈에서 깨어, 도통 빛이 들어오지 않는
그래서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는 내 방에 누운 채로 생각해 보았다.
장님도 꿈을 꿀까.
어떤 꿈을 꿀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