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이야기, 정효구, 작가정신, 2008(초판1쇄)
빌딩 속의 삶이 생애의 전부인 도회의 청장년들에게, 그대들의 유년 속에 마당이 있었지 않았느냐고 사라진 기억을 일깨워주고 싶다. 경쟁의 삶 속에서 생의 불안과 좌절을 품고 사는 직장인들에게, 마당과 같이 평평하고 둥근 세계도 있지 않느냐고 귀띔해주고 싶다.
세종대왕은 한글의 모음과 자음을 모두 음양오행의 원리에 맞추어 창제하였다고 한다. 양성모음 가운데 ‘아’가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동쪽의 목성 소리라면, ‘오’는 태양이 중천에 떠오른 모습을 그려 보인 남쪽의 화성(火性) 소리이다. 그런가 하면 음성모음에 해당되는 ‘어’는 태양이 지기 시작하는 모습을 본뜬 서쪽의 금성(金性) 소리이며, ‘우’는 태양이 서쪽의 지평선(또는 수평선) 아래로 깊이 넘어간 모습을 그린 북쪽의 어두운 수성(水性) 소리이다.
마당은 근본적으로 색상은 물론, 형태의 변화도 전혀 없다. 마당은 처음부터 영원까지 한결 같은 색이고, 한결 같은 모양이다. 그저 마당은 전신으로 묵묵망언(默默妄言)의 침묵처럼 누워 있다. 그의 생애에서 인공적으로 욕망을 느끼며 일어서는 사건이란 아예 없다. 우리의 나체인 몸과 유사한 색으로, 그리하여 색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무색으로, 그는 단 한순간의 일어서고자 하는 욕구도 없이 그저 영원처럼 시간을 넘어서 무형인 듯, 수평으로 누워서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은 어떤 존재보다도 직립된 수직적 존재이지 않은가. 그리고 변덕에 가까운 변화를 즐기는 격한 동물성의 존재이지 않은가. 잠을 잘 때조차 인간은 온전히, 반듯하게, 고요히 누워 잠들지 못한다. 그 영원과 같은 적멸의 밤에도 인간은 꿈을 꾸며, 지난 일에 분노하고 내일을 걱정한다. 그리고 아침부터 일어서서 색을 더하고, 기교를 더할 준비를 한다.
색이 없는 날, 기교가 없는 날, 인간들은 권태에 빠져 허덕인다. 그 죽음과 같은 권태가 두렵거나 그를 감당하기 어려워, 사람들은 그림을 그리러, 사진을 찍으러 사방으로 헤매고, 그러다 포착한 몇 개의 이미지들을 안고 날이 어두울 무렵 지쳐서 집으로 돌아온다.
마당은 안이면서 바깥이다. 마당이 내부인 것은 낮지만 울타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당은 외부이다. 그것은 무한한 하늘 쪽으로 마당이 그야말로 ‘무한히’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당은 인간의 땅이면서 우주의 땅이다.
밤에만 내리는 그 이슬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신도 밤이면 몰래 울어야 한다. 그것이 자신을 지키는 비밀이다. 신이 우는 시간에 우리는 그 자리를 피해줘야 한다.
달이 밤의 시골 마당에 비췰 때, 마당은 진심으로 그 달빛을 받아 안는다. 마당에 내리는 달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이 말의 뜻을 알 것이다.
사람들은 하늘의 달과 별을 두고 다르게 말한다. 달은 떠있고, 별은 박혀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정말이지 적절한 표현이다. 달은 하늘의 바다에 무게 없이 편안한 배처럼 떠 있는 것 같고, 별들은 마치 여문 씨앗처럼 어딘가에 깊이 총총히 박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달이 흐름과 넓이의 표상이라면, 별은 강한 응집과 발산의 표상이다.
쓸고 싶어도 쓸 마당이 없는 도회의 나에겐 늘 삶이 풍족한 것 같은데도 미진했다. 쓸어볼 마당이 있다면 이유 없이 미열에 시달리는 내 마음이 말끔히 치유될 것 같았고, 구겨졌던 마음도 평평하게 펴질 것 같았다.
혼자 잘 노는 일은 무엇보다 어렵다. 그것은 한 존재가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였을 때, 비로소 창조할 수 있는 탁월한 하나의 세계이다.
혼자서 잘 노는 모습을 ‘자유(自遊)하다’고 말한다. 스스로 노닌다는 뜻이다.
혼자서 아무렇지도 않게 노니는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뭐니 뭐니 해도 ‘무의(無依)’의 삶을 내면화해야 한다. ‘무의’란 외부의 어느 것에도 의지하거나 휘둘리지 않는 것,
마당이 허락하는 오직 하나의 장식이 있으니, 그것은 하늘의 빨랫줄이다.
가느다란 단순미의 빨랫줄은 마당의 뭉툭한 손가락에 낀 실반지 같고…
겨울은 몸의 안쪽을 틈 없이 강하게 내면화한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한 해의 최대 난코스이다. 그렇지 않으면 겨울에 동사하거나, 안쪽에 깃들인 생명의 프로그램에 흠이 가서 봄을 기대할 수 없다.
마당은 부동(不動)의 표상이다.
그런 마당에 이 세상에서 몸이 가장 가벼운 한 떼의 잠자리들이 비단 날개를 단 무용수처럼 찾아온다. 그들의 가볍고 자유자재한 몸짓으로 인하여 마당은 시간과 공간, 경계와 소유, 수직과 수평이 갑자기 사라지는 화사한 축제의 장으로 변모된다.
새의 다리를 본 적이 있는가. 날개나 부리에 비하면 새의 다리는 너무나 가늘고 여리다.
새는 지상에 겨우 앉을 수 있을 만큼의 가는 다리와 작은 발만을 달고 사는 특이한 존재이다.
그들은 정말로 지상의 공간을 축소시킬 대로 축소시킨 빨랫줄, 전깃줄, 나뭇가지 등과 같은, 너무나 가늘고 좁아서 우리가 공간이라고 부르기에도 어색한 그런 공간만 있으면 충분히 앉을 수 있다. 그러나 날개로 사는 그들에겐 이런 곳에서의 머묾도 언제나 잠시일 뿐 그들은 이 공간조차 부정하고 어디론가 떠나고 또 날아가며 흐르듯 산다.
아침 일찍 일어나거나 이른 저녁을 먹고 난 후, 마당은 누구라도 얻정거리기에 적합한 장소이다. 마당에 나가 어정거릴 때 우리를 재촉했던 직선의 삶과 사유는 무디어지거나 무화된다. 그곳엔 거리 개념도, 시간 개념도, 효율성의 개념도 명확하지 않다.
아파트나 도심의 빌딩에서는 비의 전신(全身)을 볼 수 없다. 그저 베란다나 창문을 통하여 출처도 없이 떨어지는 비의 옆구리나 허리께만 파편처럼 스치듯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출처가 하늘인 마당의 비는 그 마당이 착지의 종점이다. 비가 착지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안정된다. 마치 목적지나 본향에 무사히 닿은 사람을 보았을 때처럼 일단 안심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파트나 빌딩의 고층에서 비의 옆구리나 허리께만 파편처럼 허공 속에서 보고 그 시작도 마침도 알기를 단념해야 할 때, 그 해결되지 않는 결여감이나 공허감과 다른 것이다.
삶도 잘 살아내면 ‘윤기(潤氣)’가 난다… 집도 마찬가지다. 잘 보살피고 가꾸면 그 집에서 반질반질하고 매끄러운 윤기가 난다. 연장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마당을 갖고 싶다는 말을 하면 그것은 허를 갖고 싶다는 말로 바꾸어 들어도 무방하다.
학교 마당은 누워 있는 큰 공터다. 와불 같은 이 공터에서나마 우리는 공(空)의 힘을 얻어야 빌딩 같은 첨예한 도시적 삶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고 견딜 수 있다. 정말로 공의 보존을 심각하게 연구할 때가 온 것 같다.
마당 없이 태어나, 마당 없이 살다, 마당 없이 죽는 이 시대의 ‘아스팔트 키드’가 보여줄 앞으로의 삶이 너무 불안하게만 여겨진다.
해조음은 바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우주적이며 규칙적인 생명의 리듬이다. 해조음은 하루 24시간 동안, 한해 365일 동안, 아니 영원히 같은 리듬으로 노래한다. 그 해조음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마치 굴곡 없는 자장가를 듣는 것처럼 이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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