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 J. M. 쿳시, 민음사, 2009(1판1쇄)
왕들이 통치하던 시대에 국민들은 이런 말을 들었다. “너희들은 A왕의 신하였다. 이제 A왕이 죽었으니, 너희들은 B왕의 신하다.” 이후로 민주주의가 도래했다. 국민에게는 처음으로 다음과 같은 선택의 여지가 주어졌다. “여러분은 (집단적으로) A한테 지배를 받고 싶은가, 아니면 B한테 지배를 받고 싶은가?”
미국이 현재 중동에서 하고 있는 것과 같은 ‘민주주의를 확산시킨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규칙들을 확산시킨다는 의미다.
정치의 밖에서 정치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것은 어째서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어째서 그 자체로서는 정치적이 아닌 정치 담론이 있을 수 없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정치는 인간의 본성 속에 들어가 있다. 즉, 군주제가 꿀벌들의 운명이듯이 정치는 우리 운명의 일부다. 정치에 관한 조직적이고 초(超)정치적인 담론을 바라는 것은 소용없는 짓이다.
왕이 통치하던 시절에 왕의 장자가 통치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순진했을 것처럼, 우리 시대에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순진하긴 마찬가지다. 이양의 규칙은 최고의 통치자를 찾아내기 위한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합법성을 부여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갈등을 막기 위한 방식이다.
토크백 라디오에 전화를 걸어 죄수들을 심문하는 데 고문을 사용하는 걸 정당화하는 사람은 정확하게 똑같이 마음속에 이중적인 잣대를 갖고 있다. 기독교 윤리의 절대적인 요구(너희 자신을 사랑하듯이 너희의 이웃을 사랑하라.)를 조금도 부정하지 않으면서, 국가의 적들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야 한다며 당국(군대, 비밀경찰)의 손을 풀어 주는 데 동의하는 것이다.
자유주의 지식인은 전형적으로 그 모순에 이렇게 반응한다. 어떤 것이 어떻게 동시에 틀리고 맞을 수 있거나, 적어도 틀리고 괜찮을 수 있는가? 그런데 자유주의 지식인이 보지 못하는 것은 이런 모순이 보통 사람들이 완전히 받아들인 마키아밸리적인 것, 즉 근대적인 것의 정수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테러리즘에 대해 호의적으로 말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오스트레일리아의 새 법률에 포함되어 있다. 표현의 자유에 재갈을 물리자는 것인데, 그런 게 아닌 척하지도 않는다.
그는 펜을 쥐어짜서 다른 쪽 끝으로 말들이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좋다고 한다.
“당신은 나한테 말을 가르쳤다. 내가 거기에서 배운 건 욕을 하는 방법이다.”
대학이 독립적인 기관이라는 것은 언제나 조금씩 거짓말이었다.
세상에 정의가 없다는 걸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들에게는 국가들 사이의 법이 통용되지 않는다고 선언한 미국에 대항하여 신들의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 세계 도처에 있음이 틀림없다. 탄원인들은 신들이 오늘이나 내일 응답하지 않으면, 한두 세대가 지나서 응답할 수도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그래서 그들의 기도는 결과적으로 저주가 된다.
“이야기는 스스로 얘기하는 것이지, 얘기되는 것이 아니에요. 나는 일생 동안 이야기를 갖고 살아왔기 때문에 그 정도는 알아요.”
우리는 발이 아픈 개 혹은 날개가 부러진 새에 대해 얘기한다. 하지만 개는 그런 식으로 자기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새도 마찬가지다. 걸으려고 하는 개에게는 그저 아프다는 것만 있고, 날려고 하는 새에게는 그저 그럴 수 없다는 것만 있다.
우리한테는 그게 아닌 것처럼 보인다. ‘내 다리’, ‘내 눈’, ‘내 뇌’ 그리고 심지어 ‘내 몸’ 같은 일반적인 표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어쩌면 허구적일지 모르는 비물질적인 어떤 것, 어떤 존재가 있다는 걸 믿는다는 걸 암시한다.
이런 식으로 부엌을 보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러시아 소설가 빅토르 시클롭스키가 낯설어진 눈이라고 일컬을 눈으로 부엌을, 살해 후 죽은 자의 시체를 먹어 치우기 전에(우리는 생고기를 거의 먹지 않는다. 우리 건강에 위험하니까.) 매만지려고(꾸미려고) 가져오는 곳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삶을 경주에 견주는 이유가 무엇이고, 국가 경제가 건강을 위하여 사이좋게 같이 뛰기보다는 오히려 서로 경쟁을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은 제기되지 않는다. 경주와 시합. 바로 이것이 현실이다.
사실 마레와 같은 사람들은 그들이 대변하는 유형, 즉 지성이 지나치게 발달한 사람들 모두가, 인간 전체가 따를 수도 없고 따르지도 않을 길을 표방하는, 운인 다한 진화적 실험은 아닐까 생각했다.
화장은 거짓일지 모르지만, 모두가 다 한다면 거짓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화장을 한다면, 화장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된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 말고 무엇이 진실이겠는가?
숫자의 명칭은 언어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언어의 단어들과는 사뭇 다르다.
예를 들면, 어떤 영어 사전에도 twenty-three라는 단어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럼 당신은 95퍼센트 확신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냐고 물을 수 있다. 조사자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스물 중에 적어도 열아홉은 맞는다는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2만 중에서 1만 9천은 맞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스물에 열아홉, 2만에 1만 9천 중에서 현재는 어느 경우입니까?
도시에서 태어난 아이에게는 숲의 흔적이 없다.
역사는 당신이 당신의 의식 속에 그것이 살 집을 주지 않는다면 생명이 없는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역사의 센스와 난센스』라는 새 책에서, 존 허스트는 백인들이 원주민들에게 그들의 땅을 정복해 탈취한 것에 대해 사과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다시 거론하고 있다. 그는 회의적인 시각에서, 반환하지 않으면서 사과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것이 사실은 ‘난센스’가 아닌지 묻고 있다.
아담 스미스는 이성(理性)을 이익에 봉사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제는 감정도 이익에 봉사하는 자리에 놓였다.
우리는 서정시인들이 뭔가를 본 게 틀림없다는 걸 알지만 그들이 무엇을 보았는지는 알지 못한다.
신을 부를 수는 있지만 신이 반드시 오는 것은 아니다. 키르케고르는 “권위 없이 말하는 법을 배우라.”라고 말한다. 나는 여기에서 키르케고르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키르케고르를 권위자로 만든다. 권위는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없는 것이다. 그 패러독스는 진짜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영감을) 은총의 상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늘에서 내려온 속삭임도 아니다. 그것은 끈기와 장악을 통해서 당신이 주제와 일체(一體)가 되는 순간이다. …… 그 주제를 몰아치고, 그 주제도 당신을 몰아친다. …… 모든 장애물이 사라지고, 꿈도 꾸지 않았던 것들이 당신에게 일어난다. 그 순간에는 이 세상에서 글을 쓰는 것보다 더 좋은 건 없다.”
그것이 생각의 아름다움이잖아요. 거리도 이별도 문제 되지 않잖아요.
문명화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첫 번째 것들 중 하나는 소리를 지르지 않는 것이다.
결혼 생활처럼 같이 살면서는 완전히 정직할 수는 없어요. 그것이 지속되기를 원한다면 말이죠. 결혼의 좋지 않은 점 중 하나예요.
나는 쿳시를 번역하면서 폴 리쾨르(Paul Ricoeur)가 말한 “언어적 환대”의 즐거움, 즉 다른 나라의 언어(손님)를 모국어(집) 안으로 맞이하면서 타인의 언어를 체험하는 기쁨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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