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 2009
기하학적인 삶
김언
미안하지만 우리는 점이고 부피를 가진 존재다.
우리는 구이고 한 점으로부터 일정한 거리에
있지 않다. 우리는 서로에게 멀어지면서 사라지고
사라지면서 변함없는 크기를 가진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칭을 이루고 양쪽의 얼굴이 서로 다른 인격을 좋아한다.
피부가 만들어내는 대지는 넓고 멀고 알 수 없는
담배 연기에 휘둘린다. 감각만큼 미지의 세계도 없지만
3차원만큼 명확한 근육도 없다. 우리는 객관적인 세계와
명백하게 다른 객관적인 세계를 보고 듣고 만지는 공간으로
서로를 구별한다. 성장하는 별과 사라지는 먼지를
똑같이 애석해하고 창조한다.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나왔지만
우리가 만들어낸 자연을 부정하지 않는다. 아메바처럼
우리는 우리의 반성하는 본능을 반성하지 않는다.
우리는 완결된 집이며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우리의 주변 세계와 내부 세계를 한꺼번에 보면서 작도한다.
우리의 지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 채 고향에 있는
내 방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찾아간다. 거기
누가 있는 것처럼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한 점을 찾는다.
연두의 시제
마지막으로 그 집의 형광등 수명을 기록한다 아침에 늦게 일어난다는 건 손톱이 자라고 있다는 느낌과 동일한 거 저녁에 잠들 곳을 찾는다는 건 머리칼과 구름은 같은 성분이라는 거 처음 눈물이라는 것을 가졌을 때는 시제를 이해한다는 느낌, 내가 지금껏 이해한 시제는 하루 종일 딸들의 머리를 땋아주던 여자가 중얼거리던 화음의 중간만 기억하는 거
사람을 만나면 입술만을 기억하고 구름 색깔의 벌레를 모으던 소녀가 몰래 보여준 납작한 가슴과 가장 마지막에 보여주던 일기장 속의 화원 같은 것을 생각한다 그곳에는 처음도 끝도 없는 위로를 위해 처음 본 사람이 필요했고 자신의 수명을 모르는 꽃들만 살아남았다
오늘 중얼거리던 이방(異邦)은 내가 배운 적 없는 시제에서 피는 또 하나의 시제, 오늘 자신의 수명을 모르는 꽃은 내일 자신의 이름을 알게 된다 구름은 어느 쪽이건 죽은 자의 머리칼 냄새가 나고 중국 수정 속으로 들어간 곤충의 무심한 눈 같은 어느 날
누군가의 머리를 땋아주며 중얼거리던 화음은 손을 더듬어 어두운 방안의 스위치를 올리던 순간의 일, 연두의 시제
이장(移葬)
1
오로라를 생각할 때는 오로라만 생각한다 겨울에 이사를 해야 할 때는 이사만 생각해야만 하는 것처럼, 겨울에 이장을 하기 위해 무덤을 파고 있는 인부들의 나이는 예측할 수 없다 소년 같기도 하고 청년 같기도 하고 노년 같기도 한, 할아버지는 실 뭉치에 파묻힌 바늘처럼 역방향으로만 누워 있었는데 다리는 왜 나무 뿌리들로 모두 변해 버렸을까 겨울은 삽날에 닿는 모든 것이 밤의 방향을 가졌고 누워서 떠올린 방향은 모두 밤에 이사하는 사람들이 싸는 그릇의 소리로 잠든다 그릇에 나비를 담아두고 접시를 덮어 놓고 하던 이사를 오래 기억하면 이장과 이사라는 것이 별로 다르지 않다는 믿음이 생긴다
2
혼자 사는 내가 혼자 떨어진 단추를 방에 앉아 달 때, 누워 있다가 바늘 끝에 가만히 입술을 대볼 때, 엄마의 겨드랑이 냄새만 그리웠고 교실에 앉아 눈금에 대해 처음 배울 때 그건 나비를 생각하는 느낌이었다 찰흙으로 빚어놓은 무덤들이 교실 뒤에서 다 마르도록 그 무덤 속을 떠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건 상여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그 속에 들어간 사람의 눈으로 눈이 큰 나비만 떠올렸기 때문이다
3
오로라를 생각할 때는 오로라만 생각하지만 내가 바늘 끝에 침을 묻히고 물은 것 중엔 이사 때마다 잃어버린 빗이나 바늘에 대한 것도 있지만, 이사 후 갈라지기 시작한 찰흙으로 만든 그 무덤을 땅 구멍을 파고 묻어 준건 내 몸을 빌려 그 무덤을 옮기고 있다고 생각해서다 어머니는 이장을 할 때마다 바늘에 침을 묻히고 날을 고르고 나는 이사 때마다 이장의 방식으로 눕는 법을 익히곤 했다
내 머리카락에 잠든 물결
한 번은 쓰다듬고
한 번은 쓸려간다
검은 모래해변에 쓸려온 흰 고래
내가 지닌 가장 아름다운 지갑엔 고래의 향유가 흘러 있고 내가 지닌 가장 오래된 표정은 아무도 없는 해변의 녹슨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씹어 먹던 사과의 맛
방안에 누워 그대가 내 머리칼들을 쓸어내려주면 그대의 손가락 사이로 파도소리가 난다 나는 그대의 손바닥에 가라앉는 고래의 표정으로 숨 쉬는 법을 처음 배우는 머리카락들, 해변에 누워 있는데 내가 지닌 가장 쓸쓸한 지갑에서 부드러운 고래 두 마리 흘러나온다 감은 눈이 감은 눈으로 와 비빈다 서로의 해안을 열고 들어가 물거품을 일으킨다
어떤 적요는
누군가의 음모마저도 사랑하고 싶다
그 깊은 음모에도 내 입술은 닿아 있어
이번 생은 머리칼을 지갑에 나누어 가지지만
마중 나가는 일에는
질식하지 않기로
해변으로 떠내려온 물색의 별자리가 휘고 있다
모래장(葬)
사막의 모래 파도는 연필 스케치풍이다 모래 파도는 자주 정지하여 제 흐느낌의 상(像)을 바라본다 모래 파도는 빗살무늬 종종 걸음으로 죽은 낙타를 매장한다 모래장을 견디지 못하여 모래가 토해낸 주검은 모래 파도와 함께 떠다닌다 모래 파도는 음악은 아니지만 한 옥타브의 음역 전체를 빌려 사막의 목관을 채운다 바람은 귀가 없고 바람 소리 또한 귀없이 들어야 한다 어떤 바람은 더 많은 바람이 필요하다 모래가 건조시키는 포르말린 뼈들은 작은 노(櫓)처럼 길고 넙적하다 그 뼈들은 모래 속에서도 반음 높이 노를 저어 갔다 뼈들이 닿으려는 곳은 모래나 사람이 무릎으로 닿으려는 곳이다 고요조차 움직이지 못하면 뼈와 노(櫓)는 증발한다 물기 없는 뼈들은 기화되면 이미 내 것이 아니다 너무 가벼워 사라지는 뼈들은,
늪의 내간체(內簡體)를 얻다
너가 인편으로 부친 보자기에는 늪의 동쪽만 챙긴 것이 아니다 새털 매듭을 풀자 물 위에 누웠던 항라(亢羅) 하늘도 한 움큼, 되새 떼들이 방금 밟고간 발자국도 구석에 꼭두서니로 염색되어 있다 수면의 물거울을 걷어낸 보자기 속은 흰 낮달이 아니라도 문자향이더라 바람을 떠내자 수생의 초록이 새순처럼 하늘거렸네 보자기와 매듭은 초록동색이라지만 초록은 순순히 결을 허락해 개구리밥 사이 너 과두체 내간을 챙겼지 도근도근 매듭도 안감도 모두 운문보(雲紋褓)라 몇 점 구름에 마음 적었구나 삽시간에 유금(游禽)이 적신 물방울들 내 손등에 미끄러지길래 부르르 소름 돋았다 그 많은 고요의 눈맵시를 보니 너 담담한 줄 짐작하겠다 빈 보자기는 다시 보낸다 아아 겨울 늪을 보자기로 싸서 인편으로 받기엔 얼음이 너무 차겠지 향념(向念)
슬픔의 식구
슬플 때 나를 위로하는 건 내 몸이 먼저다
미열이 그 식구이다
섭씨 39도의 편두통은 지금 염료를 섞고 있다
내 발열은 치자꽃대궁 같은 것
치자꽃 노란색 열매는 종일 위염을 생각하고 있다
햇빛의 양철 지붕에 세운 내 미열 학교에서
아픈 위도 명치에서 질문한다
붉은색이 얼마나 필요하냐고
쓰라린 위를 향한 몸의 집착은
슬픔의 입성을 꿰차는 것이다
식구 없는 슬픔도 참조하도록!
자꾸 속삭이는 적나라한 열꽃,
자꾸 넘치는 치자꽃물의 강우량에 물드는 쪽으로
미열은 운동한다
어깨도 등도 치자꽃 가득핀
슬픔역(驛)의 악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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