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조지프 오닐, 사피엔스, 2009(1판4쇄)

 

 

 

 

 

 나조차 없어도 상관없다는 것을, 나는 묘한 안도감을 느끼며 깨달았다.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무엇보다 나는 피곤했다. 피로감.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인생에 만성적인 병증이 있다면 그것은 피로감이었다.

 


 바로 얼마 전에 우리는 아들의 혀가 짧다는 말을 들었다. 특정 자음을 발음하면
아이의 혀는 입 안 깊은 곳으로 도망쳐 들어가서는 모음이라는 안전장치의 도움을
받아야만 다시 나타났다.

 

 과거의 자신과 쉽사리 동화되는 사람들이 있다. 가령 레이철은 어린 시절이나
대학 시절의 일화라도 마치 그날 아침에 겪은 일처럼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조차 서먹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우연과 노력이 수반되어 현재의 나를
형성한 과거의 나를 지금의 나와 동일시하기란 나로서는 무척 벅찬 일이다.

 

 "...그쪽도 시장이 꽤 크답니다. 사람들은 사진을 잔뜩 찍어대지만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거든요."
 


 이제 내가 오래된 깨달음을 얻을 차례였다. 떠난 사람은 결국 덧없는 행동을 취할 도리밖에
없다는 깨달음.

 


 나는 어머니를 화장한 후에, 어머니는 살아 계실 때조차 기억의 화덕에 거주했을 따름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사람과 사람이 교제하는 일은 겉보기에 아무리
생생해 보일지라도 결국 어느 시점에 이르면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교제하는 셈이 된다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중요한 건 제이크를 '병든 이데올로기'가 난무하는 나라, 대중이나 지도자가 미국과 세계뿐만
아니라 광신적인 기독교 복음주의 운동 덕분에 우주에 대한 독선적인 망상에 빠져 있는 나라,
다른 나라들에는 문명과 법과 합리적인 규칙을 무자비하게 강요하면서도 미국만은 면제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독선적인 망상에 빠져 있는 나라, 한마디로 '악성 정신병에 걸린 비현실적인'
나라에서 키우지 말아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남자는 낡은 문짝처럼 세월이 흐르면 뒤틀리고 삐걱거리게 마련이어서, 그런 남자를 좀더
사용하려는 여자는 사포질과 대패질에 꽤 시간을 쏟아야 한다. 물론 모든 여자가 그렇게
때빼고 광내는 일에 관심 있는 건 아니다. 모든 남자가 마음속에 한 가지만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듯이.

 

 이제야 나는 그 슬픔이 유리에 비친 모습에서 자신의 참된 반사물을 인지할 수 없을 때
생기는 슬픔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척은 극도로 바쁜 나날을 극도의 자유시간을 연상케 하는 의상 수집으로 달래고 있었다.

 

 거기서 내가 주로 상대하는 정력적이고 강인한, 성공한 남자들은 삼 개월마다 주어지는
평가서를 남몰래 역겨워하는 데다 상사와 고객과 눈 밝은 아내와 신랄한 자식들에게
산 채로 먹힌다는 생각에 자신들을 액면 그대로 봐주기를 누구보다도 바라마지 않으니
서로 정중한 예절을 지키는 걸 무척 기쁘게 생각한다.

 

 물론 직장에는 인도인 동료들이 몇몇 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크리켓에 미친 친구들이
아니었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그들을 내 삶의 한 부분으로 끌어들이려 하지
않았을 터였다. 이런 거리두기야말로 내 삶의 귀중한 정수였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타격할 때는 변함없이 정통 타법 - 미국의 구장 환경에서는 불가능한 타격
방식 - 을 구사해야 한다는 나만의 고집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이곳의 환경에 맞게
공을 강하게 때리는 도박적인 타법을 구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이보다 더 까다
로운 딜레마도 있을 수 있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득점보다는 타격 방식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평가에 관련된 문제였다. 타격이란 노력과 기술과 극기를 통해
변화무쌍한 세상에 맞서는 단 한 번의 기회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런던 거리에 민영버스를 소떼처럼 쏟아 붓고 혼잡통행료를 거두어도 교통환경은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고 그래서 집으로 가는 택시비가 이탈리아행 비행기 값보다
비싼 어이없이 짜증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이는 <주라기 공원>을 천 번째 보는 중이다.

 

 나는 그저 어린 소년이었어. 콘월의 호텔 방에서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나는 단지
이 광활한 우주에서 배에 누워 있는 어린 소년이었어.

 

 사랑이라는 단어는 이미 그 의미에서 분리되었다. 사랑? 레이철이 옳았다. 사랑은
어중이떠중이들이 몰려드는 옴니버스였다.

 

 앨범을 몇 페이지만 들춰보아도, 제이크의 겨울 자아는 곧 여름 자아에 의해 지워지고
다시 이 여름 자아는 그 다음의 자아에 의해 지워졌다. 그러므로 아들의 이야기는
완전히 멈출 때까지 끊임없이 새로 시작하는 이야기인 셈이다. 이거야 말로 인생의
페이지를 넘기는 유일한 방식이 아닐까?

 

 어머니는 뉴욕이 아니라 나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삶이라는 이 피할 수 없는 패배에 직면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패배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소설 쓰기의 존재 이유가 있다.
  - 밀란 쿤테라, <커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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