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의 적들, 베르나르 앙리 레비 미셸 우엘벡, 프로네시스, 2010(초판 1쇄)
최근 『타임(Time)』지는 프랑스 문화와 지성의 끔찍한 쇠퇴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우리 두 사람을 선정했습니다. 조금 지나친 감이 있습니다만, 이 같은 선정은 정확한 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들레르는 위대한 인물은 자국민 전체에 맞서는 존재이고, 따라서 하나가 된 자국민 전체의 힘과 같거나 그보다 더 강한 힘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아마도 이 문장은 당신이 지난번 편지에서 인용한 문장보다 먼저 쓰였을 것입니다(왜냐하면 그는 아직은 전 인류가 아니라 프랑스만을 공격하고 있으니까요).
고백하자면 나는 단 한 권의 전기도 끝까지 읽어본 기억이 없습니다. 내가 읽어보려고 했던 전기들은 시원찮은 추리소설들(혹은 수수께끼 같은 탐정소설들)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작가의 연민이 단번에 드러나며, 오직 범행 동기와 그것들의 뚜렷한 조합으로 구성된 그런 추리소설들 말입니다.
내게서 간간이 표출되는 ‘고백에의 성향’은 두 개의 상이한 원천으로부터 나옵니다. 이미 말한 대로 첫 번째 원천은 그 어떤 고백도 작가의 인격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장차 나타나게 될 자신의 결점들을 치유하거나 악화시키지도 못한다는 뿌리 깊은 확신입니다. 요컨대 이 확신은 반(反)정신분석적 확신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 확신은 또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과 더불어 내가 늘 품고 있던 생각들 중 하나입니다.
두 번째 원천은 스스로 희생양이 되곤 하는 나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 그 어떤 고백으로도 내 인격을 다 길어 올릴 수 없다는 나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입니다… 요컨대 만약 누군가가 나를 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보 부족으로 인한 오해의 소산일 것입니다.
자기를 뛰어넘고자 하는, 다시 말해 글자 그대로 능력을 초월하면서 살아가는 것.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삶, 진짜 위대한 살에 대한 동경 때문입니다. 그리고 비록 궁극적으로는 허망해 보이지만, 또한 결국에 가서는 당신이나 당신의 행동으로부터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겠지만, 그래도 두 번째 삶, 즉 위대한 삶만이 가치가 있는 삶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나는 절대 ‘민주주의 안에서 살고 있다’고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늘 그것이 잘못이라고 확신하지도 못한 채 일종의 테크노크라시 안에서 살고 있다고 느꼈을 뿐입니다. 어쩌면 테크노크라트들이 현명하고 옳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술을 끊어야 하고, 또 ‘담배까지도 끊어야’ 할지 모릅니다.
(테크노크라시: 전문적 지식 또는 과학이나 기술에 의하여 사회 또는 조직 전체를 관리∙운영∙조작할 수 있고, 따라서 이것을 소유하는 자가 ‘의사결정’에 대한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게 되는 시스템.)
(테크노크라트: 기술관료, 과학적 지식이나 전문적 기술을 소유함으로써 사회 또는 조직의 의사결정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
이 문장이 나를 얼어붙게 만들고, 당신의 펜 끝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육체적으로도 견디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그 문장이 나의 내면에서 어두운 공포, 합리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두려움, 뭐라고 규정지을 수 없는 어린 시절에 관계된 위협, 요컨대 환영과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하게 말하자면 내 일부의 어디에선가 그 문장이 언젠가 나에게 전달될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공중으로 던져진 돌과 같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살아가면서 어느 정도는 내가 호텔에 머무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내 방을 비울 것’이라는 점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겪는 불면증 속에서 늘 반복해서 나타나고 또 나를 무섭게 하는 것은 두 가지 입니다.
우선 당연하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무’입니다.
하지만 다른 하나는 ‘존재’입니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무’가 되는 것과 ‘자기’가 도려는 이중의 강박관념을 자기 안에서 구축(驅逐:몰아쫓아내다)하고자 하는 자는 누구라도 돕는다는 원칙을 말이죠.
철학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철학은 누군가가 자신의 강박관념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방식, 또 때로는 거기서 벗어나는 방식입니다.
“무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널리 알려진 파스칼의 이 문장은 이제 영향력을 잃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내가 처음에 그 어떤 보호막이나 사전 예고 없이 이 문장을 읽었다는 사실과 그야말로 ‘한입 가득’ 그 문장을 덥석 물어 삼켰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십시오. 무한하고 텅 빈 공간에 대한 공포,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영원히 추락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순수한 공포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대교는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히브리어에는 ‘종교’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시계를 놓고 두는’ 방식이 아니라 소위 ‘편지를 통해’ 두는 방식이지요. 나는 모교 고등학교의 체스부에 등록했습니다. 인터넷이나 이메일이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멀리 떨어져서 수를 생각한 뒤에 그 수를 봉투에 넣어 상대방에게 전하는 겁니다. 그리고 상대가 수를 두기를 기다립니다. 이렇게 하면 체스 한 판 두는 데 몇 주나 몇 달이 걸리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만 체스 두는 것을 아주 좋아하던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은 몇 년에 걸쳐 겨우 한 판만을 두기도 했습니다.
체스라는 권투는 자기와 자기 자신이 구사하는, 늘 다시 시작되는 전략의 한계하고만 싸우는 권투라고 말입니다…….
사랑이란 찾을 수 있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종종 글쓰기가 고통인가 아니면 쾌락인가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가끔씩은 이런 질문에 대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답은 그와는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유머를 구사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실질적인 감정을 느끼는 부끄러움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일종의 ‘힘의 묘기’, 절망이나 분노 가운데 하나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우아한 모습을 한 노예가 벌이는 재주겠죠. 그렇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오늘날 유머는 높이 평가받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글쓰기’입니다. 언어를 다루는 작업대에서 언어를 반죽하고, 그것에 형식을 부여하고, 작은 기호들의 기둥들을 세우면서 수많은 밤을 지새우고, 낮을 보내고, 또 많은 밤을 지새우는 것을 말하죠.
당신은 왜 글을 씁니까? 하루 종일 사랑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왜 사랑을 합니까? 온종일 글을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란 “자, 보아라, 나는 사유한다.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찾아내는 일만 남았다”라고 말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겨로 그렇지 않습니다! 내 개인적 경험을 통해 보면, 대부분은 그 반대입니다! 개념을 끌어내는 것은 언어이지, 개념이 언어를 끌어내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정확한 사유가 생겨나는 것은 바로 언어의 작업이 이루어지는 틈새, 빈터, 빛의 화살 속입니다!
언어인가, 사물인가? 나는 이와 같은 질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문학인가, 삶인가? 문학이 있기 ‘때문에’ 살이 있는 겁니다. 나에게 삶은, 내가 이 삶으로부터 언어를 끌어낼 수 있을 경우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시를 쓰는 데 2년이 걸리든 15분이 걸리든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것을 보면 시는 마치 우리들이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쓰여졌고, 그것도 영원히 쓰여졌으며, 우리는 그저 그 시를 ‘발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는 끝까지 ‘우엘벡이 되는 것’을 견뎌내야 합니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그 어떤 일관성이나 판단도 없이 단어가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당장 종이가 필요한 순간들이죠. 그런 순간에는 뭔가가 발생합니다. 그런 순간은 아주 짧은 동안만 지속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순간이 지속된 만큼만 계속됩니다. 하지만 한 편의 시를 쓰기에는 충분하죠.
파트릭 보쇼Partrick Bauchau도 일찌감치 그 점을 귀띔해주었죠. “연출은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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