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벳_어느 천재의 기묘한 여행, 레이프 라슨, 비채,
박쥐들은 절대로 ‘여기’를 모른다. ‘저기’로부터의 메아리를 알 뿐.
‘여기’와 ‘저기’ 사이의 거리를 재는 일이란 그 사이에 놓인 미지의 것을 없애는 것이다. 나는 실증 자료가 부족한 어린애였기에 ‘여기’와 ‘저기’ 사이에 미지의 무엇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무서웠다.
삽질을 하다가 멈췄다. 샛강의 차가운 흙탕물이 장화 밖으로 흘렀다. 내 발은 섬이었다.
도대체 왜 두 사람이 함께 살게 됐을까? 완전히 다른 옷감에서 나온 것 같은 두 사람인데.
그러나 내가 궁금한 것은 따로 있었다. ‘우리의 존경심이 어디로 갔을까?’라는 물음이었다. 아이의 존경심은 그냥 증발할까? 아니면 열역학 법칙처럼 생성되거나 파괴될 수 없고 그저 전이될 뿐일까?
뒷자리에 여자 아이 세 명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남녀가 나란히 앉아서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보면 부부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저 집 안에 집을 또 지을 수 있겠어…”
“아, 그렇지만 죽음은 아름답단다! 죽음은 추수야! 널리 퍼진 그 전염병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어. 진화는, 삶에 의지하는 만큼 죽음에 의지한단다.”
“… 더 빨리 갈 수는 없어. 기차가 도착할 때 나도 도착하는 거야.”
애거시의 눈은 부드럽고 지쳐 보였다. 매력적이기까지 했다. 계속 몰락하기만 하는 집을 짓느라 평생을 바친 눈 같았다.
참새 뼈를 노려보면서 운하에 앉아 있었다. 참새 뼈는 여행에서 잘 살아남지 못했다. 갈비뼈가 부러졌고,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고, 별 하나가 없어졌다. 물처럼 아주 연약해서, 어디서 공기가 끝나고 어디서 칼슘이 시작되는지 분명하지 않았다.
“워싱턴이에요?”
“이 위대한 나라의 수도지. 아니면 그 위대함에서 남은 것들이거나.”
‘이렇게 시시한 일에 왜 내가 안달복달했지?’ 스스로 이렇게 묻지만, 그래도 다음 시험이 다가오면 나는 또 새벽 3시까지 잠을 못 자고 안달복달했다.
아이와 어른을 가르는 것이 나이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이유를 꼭 꼬집을 수 없지만, 나는 어른을 보면 어른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행동으로 누구나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은 행동을 하면 어른이다.
1. 아무 이유 없이 낮잠을 잔다.
2. 크리스마스가 온다고 들뜨지 않는다.
3. 기억력이 떨어진다고 무척 걱정한다.
4. 일을 아주 열심히 한다.
5. 돋보기 안경을 목에 걸고 있지만, 종종 목에 돋보기 안경을 걸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6. ‘네가 요만할 때가 다 기억나’라는 말을 한다. 그러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AU-1, AU-24, AU-41의 표정을 짓는다. 대략 해석하자면, ‘내가 벌써 늙었는데 아직도 행복하지 않다니, 정말 슬퍼’라는 뜻이다.
7. 세금을 내고 ‘빌어먹을 세금을 다 걷어서 도대체 뭘 하는 거야’라고 성난 토론을 즐긴다.
8. 매일 저녁 텔레비전 앞에서 혼자 술을 마신다.
9. 자기 자녀와 자녀의 생각에 의심을 품는다.
10. 어떤 일에도 들뜨지 않는다.
“사람들은 베푼다는 뜻은 좋아하지만, 실제로 베푸는 행동은 좋아하지 않자.”
집센의 눈을 보며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어른들의 감정은 아주 오래, 사건이 끝나고 나서도 아주 오래, 카드를 보내고 사과를 하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이사하고 나서도 아주 오래, 오랫동안 그대로 간직될 수 있다고. 어른들은 낡고 쓸모없는 감정의 꾸러미였다.
“머릿속 어디에 우주의 모든 게 다 들어 있는 기분을 느낀 적 없나요? 대뇌피질 주름 속에 이미 이 세상의 완벽한 지도를 지니고 태어났고, 그 지도에 접근하는 법을 찾느라 평생을 보내고 있다는 기분을 느낀 적 없으세요?”
“… 제가 어떤 것을 두고, 그것이 그려져야 할 모습을 정확히 그릴 때면, 그 도해가 이미 존재해 있고, 저는 단지 존재하는 도해를 베낄 뿐이라는 기분이 들어요. 거기서 출발해서, 도해가 이미 존재한다면 세상도 이미 존재하고, 미래도 이미 존재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죠. 그게 사실일까요?”
차창에 부딪어 퍼지는 빗방울들을 바라보았다. 물방울은 놀랍다. 늘 가장 저항이 적은 길을 택한다.
“… 스미시는 뭐든 이용해서 사람들 눈길을 끌려고 혈안이 되어 있어요. 어느 시점에서인가, 스미시는 과학이 대중에게 아부하는 것이 아니라, 한계 너머까지 밀어붙이는 것,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죠.”
누나가 십대 소녀 팝과 독백과 매니큐어 고치에서 나와서 수화기를 들기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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