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드, 허영숙, 문학의 전당, 2010(초판발행)

 

 

 

 

 

이른 새벽

풀잎에 고이는 물방울은 강이 죽어서 온 것이다

 

<환생>

 

 

 

 

 

물별

 

어둠이 초승달을 꺼내들고

묻힌 별을 하나씩 파내고 있습니다

하늘은 저 많은 별을 어느 고랑쯤에 심어놓고

환하게 키우는지

눈에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수북합니다

별은 더러 강으로도 떨어져서

어둑한 물길을 불러냅니다

백목련이 하르르 지며 종일 문을 두드려도

물밑에 잠긴 듯 고요하게 있는 한 사람

늦게 닿은 기별인 듯

비로소 물결을 엽니다

물밑에 오래 쪼그리고 있던 별이

저린 발을 끌고 지류를 따라 흘러갑니다

말간 몸을 가진 물별이 되어

다시 하늘에 심어지는 중입니다

 

 

 

 

 

 

살아서 가진 그늘은 가볍다

그늘이 되어 바닥에 누워버린 할머니는 무거웠다

 

 

<사과나무 그늘>

 

 

 

 

 

 

 

사람이 풍경이다

 

꽃 시장에는 사람보다 꽃이 더 많다

사람이 꽃을 품은 것이 아니라

꽃이 사람을 품고 있다

자세히 보면 꽃도 사람을 살핀다

꽃 가까이서 향기를 맡으려 할 때는 조심하시라

사람이 꽃의 향기를 맡는 것이 아니라

꽃이 사람의 향기를 맡는 것이므로

꽃눈을 열어

안쪽까지 들여다 볼 수 있으므로

사람이 제 이야기에 맞는 얼굴로

꽃에게 꽃말을 부여하듯

꽃도 사람의 빛깔에 맞는 향기로 부르고 싶어 한다

아름다운 등을 가진 사람 두엇 꺾어다가

곁에 두고 싶어 한다

그래서 사람이 꽃을 들여다 볼 때

허리가 반쯤 꺾이는 것이다

 

 

 

 

 

 

 

과월호

 

갓 사춘기를 맞은 소녀의 살갗처럼

콩기름으로 오래 문질러놓은 마루처럼

겉표지가 반들반들한 새 잡지를 내밀며

미장원 주인이 잠시만 기다리란다

새것답게

막 말 트기 시작한 사이처럼 한 장 넘기기가 만만치 않다

아직도 버리지 못한 침엽의 냄새

페이지가 칼날처럼 도도해서

손가락이 아슬하다

 

여러 사내들이 침 발라 넘겨 본

선술집의 늙은 창녀처럼 오래된 과월호

많은 사람들의 손금을 읽어 귀퉁이가 불룩하다

젖은 생을 넘겨온 사람과는 말이 잘 통하듯

한 장 한 장 잘 넘어간다

누군가의 지문 위에 나의 지문을 맞댄다

젖지 않고 넘어가는 페이지는 없다는 듯

하늘이 가을을 넘기려고 비를 묻힌다

 

 

 

 

 

 

속눈썹 하나가

 

버드나무에서

잔가지 하나 뛰어내렸을 뿐인데

호수는 종일 결을 만든다

겹겹의 하늘이 호수 가장자리에 괸다

 

깜빡임보다 더 짧은 순간에 빠져나간

속눈썹 하나

슬며시 날아들어 왔을 뿐인데

세상의 반을 제대로 뜰 수 없다

종일 눈물이 괸다

 

까칠한 당신을 누군가 훅 불어줬으면 했다

 

 

 

 

 

 

 

푸른 답장

 

바람이 마당에 편지를 두고 간 줄 몰랐습니다

문을 닫고 겨울을 오래 앓고 있었지요

파릇할 때 열어봐야 했습니다. 그동안

산수유가 피었다 지며

겉봉에 쓰인 당신 이름 지우고

목련이 피었다 지며

내 이름이 지워진 수취인 불명의 편지를

꽃 지고 돋아난 잎이 푸르게 흔들고 있었지요

희미한 이름 자국만 당신이 내게로

내가 당신에게로 뜨거운 말, 젖은 말 동봉하여 보냈던

선명했던 지난날을 겨우 붙들고 있었지요

겉봉을 뜯자

모조리 말라 씨앗이 된 말들이 와르르 쏟아집니다

단단하게 굳는 줄 모르고 내 답장 기다리며

몇 번이고 우체통을 열어 보았을 당신

봄볕이 잘 드는 곳에 씨앗을 심었습니다

몇 차례 비가 내리더니

다시 싹을 틔우기 시작합니다

늦었지만

꽃 피는 대로 부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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