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청춘 2010 봄
물뫼의 집
김광규
오랜만에 찾아온 물뫼의 집
검은 색 현무암 화산석으로
얼기설기 쌓아 놓은 돌담
그대로 있네 제주도
바람 아무리 세차게 불어도
절대로 쓰러지지 않는 돌담
돌멩이 사이로 숭숭
구멍이 뚫려있기 때문이라네
주인과 손님도 이와 같아서
두고두고 반갑게 만나보네
부모 형제를 빼놓고는 인생이란 어차피 모두가 선택의 결과이다.
- 김광규 시인의 에세이 <문학의 청춘을 북돋우기 위하여> 중
감나무 바라보기
김광규
나뭇잎 모두 떨어지고
열매만 빨갛게 익어
아름답구나
맛있겠구나
그런 생각 다 버리고
멍청하니
오랫동안
감나무를 바라보면 어떨까
바쁘게 달려가다가
힐끗 한번 쳐다보고
재빨리 사진 한 장 찍은 다음
앞길 서두르지 말고
그 자리에 서서 또는 앉아서
홀린 듯
하염없이
감나무를 바라보면 어떨까
우리도 잠깐
가을 식구가 되어
멀리서 그리움에 몸이 달아
그들은 아마 뛰어왔을 것이다
- <달팽이의 사랑> 일부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전혀 관계 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었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혁명의 패기가 부끄러운 이유는 열띤 토론을 벌이던 청년과 혁명을 두려워하게 된 기성세대가 다른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 정재림 작품론 <내 마음의 폭설> 중
갈빗대 밑에서
뜨끔거리며 자라는 죽음
어버이를 잃거나
자식을 낳거나
먹고 마시고 즐기며
五十年을 어질러 놓은 자리
- 김광규 <오솔길> 일부
동안거冬安居
김종해
한겨울의 석달 동안은
세상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요리를 한다.
눈을 감으면, 눈 밑에 잠든 숲과 평원,
채찍을 든 매운 바람 속을 지나
눈덩이 속 이글루 안에 나 어느덧 혼자 있다.
모자를 벗고 언 손을 녹인 뒤
얼음 도마 위에서 칼질하는 요리사
어젯밤 눈 속에 파묻어 둔
상형문자가 된 짐승의 내장
한 획, 한 줄의 온기를 적출하라
그러나 나는 먹지도 못하는 시를 쓰는구나.
눈 덮인 한 장의 평원 위에
누구의 한 끼 보시도 못할 붓질을 하는구나.
눈 감으면 하늘 위에 얼어붙은 야밤의 오로라
눈을 가리지 않았음에도
한겨울의 극지極地는 어둡고
허기진 깨달음은 언제나 외롭고 목이 마르다
공기맛
조정권
계곡 소리 내지 않고
냇물 소리 감추고
굴뚝 곡기를 끊었다
마음 식음절폐 하고 있다
공복空腹의 산
아침공기가 달다
눈 헤치고 올라온 죽순들이
얼음뿌리를 빨아댄다
고요에 대하여
이하석
고즈넉한 데서, 다 접고서,
시경을 펴며 읽노라니
빗소리가 안의 마음을 밖으로 갉는다.
산골짜기에서 날아온 듯
종소리가 책 갈피 사이마다 우렁댄다.
- 이 소리들은 기실 너무나 조용한 게다.
끊임없이 치대며 붐비는 고요에 신경 세워
책장을 자주 뒤로 넘기다 보면,
창 밖의 꽃 피는 소리마저 천둥 같다.
가을 감꽃
정일근
봄엔 감꽃이 피고
가을엔 감이 꽃이다
감나무 잎 지고
가지마다 주렁주렁 핀
붉은 꽃을 달고 선
은현리 마당의 감꽃
젊은 아버지 슬픈 제삿날
늙은 어머니 잠들지 못하는데
이승에서 저승까지 환한
꽃 등불 밝힌 듯
감나무 한 그루
커다란 꽃나무인 듯
큰 꽃 한 송이 피었다
사랑
정일근
보이지 않는다고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루 종일 해를 따라 가며 피어 있었지만
해 지고 난 추운 밤에야 슬픈 눈을 보는
초사흗날 초승달 같은,
정글짐
전기철
손을 떼지 않고 새를 그리는 법을 가르쳐 준
친구가 자살한 후
어머니는 그 집구석에 다시는 발을 들여 놓지 못하게 했다. 친구네는 도시로 이사를 갔다. 내가 사랑한 연이를 데리고
새들은 소문을 잘 퍼뜨려요. 어머니가 새를 닮은 거겠죠. 도시는 소문으로 이루어졌어요. 도시로 가는 길목마다 소문이 있거든요. 임팔라와 사슴이 같은 건가요? 교통 체증인거죠.
잠결에 여동생을 강간한 날 새벽
자살한 열일곱 친구는
나에게 도깨비와 씨름해서 이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한 밤의 페이지에 갇힌
친구의 영혼을 담은 상자를 내 안에 묻었다.
31일 다음에 왜 32일이 없는 거죠.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시간 밖으로 굴러 떨어지는 거잖아요. 낯선 풍경화에서는 코로 세상을 봐요. 참, 불쌍하네요. 동생이. 오빠가 안됐어요. 아직 어린 ㅅ들인데…. 시를 쓰는 사람이 불쌍해요. 페이지를 어떻게 잘못 읽을 수 있죠? 밤이면 강들이 불협화음으로 울기 때문이에요. 강들도 교통체증인거죠.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잠자는 전단지처럼
폐 두 이파리가 가을도 되기 전에 노랗게 물들어 갈 때
나는 친구의 비명인지 연이의 비명인지를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동네 여자들은 긴 머리칼을 잘라 일본 상인에게 팔았고
설익을 별들이 떨어진 강물은 내내 덜덜 떨었다.
우리 아버지는 다리가 길어서 모든 세상과 관계하죠. 아무리 숨어도 모두 찾을 수 있어요. 나는 내 뼈들을 개들에게 던져줘요. 개들은 부족한 뼈마디를 채우려고 내 뼈를 제 몸속에 얼른 끼워 넣죠. 무덤을 파헤칠 필요 없어요. 세상에는 이름 없는 시체들이 널려 있거든요. 참, 우습죠. 항문으로 음악을 들어봐요. 베르디도 편곡이 되요. 나무는 못 들은 척 할 뿐이지 실종자들의 이름을 이파리 하나하나에 음표로 적어 놓지요. 나무들도 교통체증인거죠.
자살한 친구의 한밤의 페이지, 혹은 멀리 이사 간 연이의 페이지에 갇혀
나는 외톨이가 되었고
나무처럼 독백을 즐겼다.
강물이 내 입술에서 출렁이거나
내 눈에서 달이 떠오르고
세상 모든 곳으로 가는 통로가 있는 입속이나
혈관에서는 초조와 불안이 둥지를 틀어
나는 아직도 손을 떼지 않고 새 그림을 그릴 줄 모르고
도깨비를 넘어뜨리는 법을 알지 못한다.
눈에서 먼동이 떠오를 때 물고기들이 사람이 된답니다. 그래서 밤에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해요. 나무에 물고기가 열릴 수 있거든요. 실종자들의 이름이 바다에 모두 기록되어 있어요. 바다의 풍경화에 지구의 역사가 있어요. 허공은 별들이 깁고 땅은 강물이 기워요. 임팔라와 사슴은 같지요.
시간은 임팔라처럼 뛰어다녔고
내 두개골의 작은 언덕에서 떠나지 못하는 한밤의 페이지 속
독백은 멈추지 않아
나는 세상의 폐허가 되었다.
여자들이 긴 머리칼을 후회도 없이 잘라
일본 상인에게 팔아 버릴 때
물에서 나와 몸을 터는 개처럼 나는 점점 더 외로워져 가
한밤의 페이지에 갇혀 체증을 앓는다.
독백을 너무 많이 하면 고독해져요. 귀를 잃어버리게 되죠. 자살한 담배꽁초를 보세요. 독백 때문이에요. 백신을 맞아야지요. 숲속의 똥처럼 고독해지면 세상을 잃어 버려요. 세상의 끝에서 우주를 볼 줄 알아야 해요. 우주도 교통체증을 앓고 있어요.
소문들
- 流派
권혁웅
소림, 무당, 화산, 아미, 곤륜, 개방…… 따위는 물 건너온 허깨비 유파라, 그 세력이 다 한 지 이미 오래다 작금에 이르러 중원에 위명을 날리는 것은 새로운 9파 1방이니, 시사상식에 기록해두어 면접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1. 공중恐衆
최대 유파는 공중인데, 혹자는 이를 공인중개사의 약자라고도 한다 중원의 모든 현과 읍에 지부를 두었으며 집을 매매하는 자에게 구전을 뜯어 규모를 키웠다 기밀문서를 다루는 이런 곳을 일러 복덕방이라고도 하는데, 무예를 연마하는 기원, 심신을 수양하는 근린공원, 생활 터전인 노인정과 함께 공중의 4대 거점이다 최근 정리해고와 의술의 발달로 그 수가 더욱 늘어, 미래의 중원은 공중화 사회가 될 것이라는 참요까지 생겼다
2. 초징楚澄
초나라에서 유래한 청류파로 이름난 무사들이 많이 났으나 최근에는 세를 불리는 과정에서 교언영색을 일삼아 위명을 제법 잃었다 문필을 업으로 삼아 향교와 서당을 장악했는데 이런 배움터를 초등학교라 한다 학문에 뜻을 둔 자는 이들에게서 배움을 시작하는 것이 불문율이다 이들에게 찍혀 뜻을 꺾은 문사가 부지기수다 악플이라 부르는 암기를 쓰는데, 이를 맞으면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칠공에서 피를 쏟는다고 알려져 있다
3. 기독氣毒
무당파의 후예이며 십일조라는 조직체계를 내세워 크게 흥성했다 열한 명이 한 조를 이루는데 각 조의 우두머리를 십부장, 십부장 열의 우두머리를 백부장이라 하여 천부장, 만부장에 이른다 십만부장 이상이 되면 대목이라 하여 그 직위를 세습할 수 있다 신구약진경이란 비급을 귀히 여기나 꼭 거기에 얽매여 살지는 않는다 축도신공, 무소부재검, 전지전능권, 출입매시축복수, 불신지옥인, 박멸발갱이진 등의 절세무공을 쓴다
4. 덕후德侯
장강 이남에 자리를 잡아 오나라의 덕후[타쿠]라 불리지만 실은 둔자 무리[힛키]와 함께 열도에서 건너온 왜인들이다 둘을 묶어 폐인이라 손가락질하는 이도 있으나 문예부흥을 이끌었다고 칭송하는 이도 있다 비전절기를 전수받은 소규모 구성원들이 은밀히 모임을 갖기 때문에 그 수가 얼마인지는 알 수 없다 기문둔갑술, 변신술, 소환술에 능해 남자가 여자로, 노인이 학생으로, 사람이 로봇으로 변신한다
5. 파파
평소에 노파나 절뚝발이로 위장한다고 해서 이 이름이 붙었다 철저히 이익만을 쫓는 전문살수집단으로 만금을 주면 임금도 암살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이 펼치는 천라지망을 파파라라 하고 파파라에 걸려든 경우를 일러 파파라치라 한다 한 번 파파의 표정이 되면 집에서도 길에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청운답보라 불리는 경공의 대가들이어서 어디든 잠입과 매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6. 중마狆魔
중원 제일의 미녀 집단이 미수인데, 이들이 혼인을 통해서 미색을 잃고 삼 갑자의 내공을 얻으면 미세수가 되고, 육 갑자를 얻으면 중마가 된다 중마가 되기 위해서는 달리는 버스 통로에서 막춤이라 불리는 고난도의 무예를 시전해야 한다 십 갑자에 이른 으뜸 중마를 아중마라 하며 중원에서 당해낼 자가 없다 이들의 비밀결사모임이 계다 계에서는 돼지를 잡아 제사를 지내는데 이 돼지를 계돈이라 한다
7. 용역龍屰
용산에서 발흥했으며 우면산의 검경, 발치산의 공산과 함께 3대 조폭이었으나 육이오 때에 검경과 연합하여 공산을 궤멸시킴으로써 장안을 장악하였다 정직한 자를 잡아가고 가난한 자를 태워 죽이며 속이는 자에게 쌀을 주고 부유한 자의 곳간을 지켜, 그 악명이 자자하다 최루탄지공, 개발이익조, 아수라권, 물대포신장, 소요진압진 등의 연합무공을 쓴다
8. 성어
뭇 사람들을 강시로 만드는 비전절후한 무공을 소유한 유파다 이들은 사람들의 이배혈에 1촌이 채 못 되는 얇은 침을 찔러 넣는데, 이 침을 수편 혹은 핸드폰이라 부른다 수편에 맞으면 이들의 전음입밀에 지배되어 꼼짝없이 놀아나게 된다 목소리 하나로 사람을 낚시질 한다고 하여, 스스로도 사람을 낚는 어부라 칭한다 이들이 궁이 남해나 설산에 있어 이들을 벽안의 고수로 보는 이들이 있지만 실제로는 중원인들이다
9. 사군
충의를 으뜸가는 덕목으로 내세우는 유파지만 실제로는 고리대금을 업으로 삼는다 장문인이 장씨여서 세간에서는 이들을 장문세가 혹은 장사군이라 부른다 “떼인 돈 받아드립니다”에서 “고세안 잡아드립니다”에 이르기까지, 돈이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한다 우공이산이라, 멀쩡한 산을 옮기고 상전벽해라, 보기 좋은 바다를 메우는 게 이들의 일이다 임금의 보이지 않는 손을 믿어 탈세와 포탈이 이루 말할 수 없다
10. 고세
중원이 강역을 크게 넓히자, 살 곳을 잃은 사이의 민초들이 낙양 주변에 몰려들어 월하촌을 이루었는데, 여기서 태어난 이들을 고세인이라 한다 남만과 북적에서 인신매매로 잡혀온 아녀자들이 낳은 자식도 고세인이다 장강을 경계로 중원의 경제가 크게 나뉘었으니, 강남에 정규직인 장녀가 있다면 강북에 비정규직인 고세가 있다는 속담은 이런 현상을 이르는 말이다
염소
김륭
할아버지처럼 수염만 달면 뭐해요
태어날 때부터 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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