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책 1, 오르한 파묵, 민음사, 2010(15)

 

 

 

 제랄은 신문 칼럼에 기억은 정원이다.”라고 쓴 적이 있다.

 

 

 

 기억의 정원이 마르기 시작하면 마지막으로 남은 나무와 장미에 온 정성을 다 쏟아 붓지. 말라죽지 말라고 아침부터 밤까지 물을 주며 어루만지지. 나는 기억해, 잊지 않기 위해 기억해!”

 

 

 

 상상의 이야기 속으로 떨어진 현실의 모든 사람들처럼, 알라딘에게도 세상의 경계를 억지로 허물려 하는 비현실적인 부분과 그 규칙에 대항하는 꾸밈없는 이성이 있었다.

 

 

 

 한번은 그가 작가도 살인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추리소설이 있다면 읽을 수 있을 거라고 뤼야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그 시절 사임은 모든 정치 모임과 포럼에 참석했고, 대학과 구내 매점 사이를 뛰어다녔고, 모든 사람의 의견을 들었으며, ‘모든 관점, 모든 정치 견해를 추적했다. 많은 질문을 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복사한 성명서, 정치 선전 팸플릿, 광고지 등 모든 종류의 좌익 출판물을 어떻게 해서든지 구해서(“죄송합니다만, 혹시 어제 공과대학에서 불순분자 색출자들이 배포했던 전단지 있습니까?”) 미친 듯이 읽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읽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고 정치 노선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결론을 내리지 못했던 시기에, 읽지 못한 것들을 하나하나 모으기 시작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읽거나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중요성을 잃어 갔고, 갈수록 많아지는 자료의 홍수를 헛되이 흘려보내기 전에 어딘가에 모을 댐을 건설하는 것이(건축공학도인 사임이 한 말이었다.) 유일한 목표가 되었다. 그리하여 사임은 남은 인생을 이 목표를 위해 흔쾌히 바쳤다.

 

 

 

 왜냐하면 수백 년 동안 찾아 온 황금으로의 변성이 절대 성공할 수 없음을 연금술사들이 모르는 것은 불행이 아니라 존재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현대판 마술사는, 자신이 구경꾼에게 보여 준 것이 속임수라고들 해도 흥분하며 구경하는 관객들이 한 순간만이라도 그것을 속임수가 아니라 마술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하기에 행복하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인생의 어느 시기에 들었던 말 한마디나 이야기, 함께 읽었던 책의 영향으로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의 흥분으로 연인과 결혼을 하고, 남은 인생을 사랑의 배후에 있는 이 착각을 결코 알지 못한 채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의 아내가 아침을 차리기 위해 식탁 위에 있는 잡지를 치울 때, 사임은 현관문 밑으로 들어온 그날의 신문을 읽으며, 쓰여 있는 모든 것은 현실이 아니라 단어로 꾸며 놓은 꿈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고 해도 변하는 건 아무 것도 없다고 마지막으로 이야기했다.

 

 

 

 첫 문장을 어떻게 쓸지 결정하기 전에는 책상에 앉지 말라.

 

 

 

 여자가 우물에서 물을 기를 때,

 

 

 

 그녀를 안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그녀의 아름다움이나 자연스러움 혹은 그녀 자체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그녀와 같은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느끼는 데에서 기인한 깊은 믿음 때문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찍 내린 어둠 속에서 천천히 내리는 눈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이틀 후 그의 장례식에서,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쳐다보며 그가 무엇을 기억하고 싶었을지 계속 생각해 보았다. 지금도 궁금하다. 나이가 들수록, 많은 짐을 나르고 싶지 않은 까다로운 동물처럼, 우리가 가장 먼저 내던진 기억은 가장 좋아하지 않았던 것들일까, 아니면 가장 무거운 것들일까, 그도 아니면 가장 쉽게 내려놓을 수 있는 것들일까?

 

 

 

 우리가 세상이라고 하는 꿈의 세계가, 우리가 몽유병 환자처럼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문을 통해 들어가 버렸던 집이라면, 문학 역시 우리가 익숙해지고 싶어 했던 그 집의 방에 걸린 벽시계와 비슷하다.

 

 

 

 갈립은 자신의 집이 있는 골목을 먼 도시에서 온 엽서를 바라보듯이 돌아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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