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청춘 2010 여름

 

 

 

 

 

 

보슬비의 속삭임

 

         강소천

 

나는 나는 갈 테야, 연못으로 갈 테야

동그라미 그리러 연못으로 갈 테야

 

나는 나는 갈 테야 꽃밭으로 갈 테야

꽃봉오리 만지러 꽃밭으로 갈 테야

 

나는 나는 갈 테야 풀밭으로 갈 테야

파란 손이 그리워 풀밭으로 갈 테야

 

 

 

 

 

 

 

그 사람

 

      김태준

 

중얼거리는 바다, 줄 밖에서 줄이 되기를 기다리는 그 사람, 낮 한때, 빈 리어카 위에 잠시 마음을 벗어놓고 낮잠을 빠는 그 사람, 꿈이 아마 덧거칠었는지 몰라, 저 가로수, 그늘 밖으로 리어카째 그 사람을 밀어내고 저 혼자 팔 벌리고 서울을 바라볼 때, 그 사람, 무엇보다도 서울을 보면 슬퍼지는지 도로 눈을 감는다

 

나도 잠깐 눈을 감고 싶다

 

 

 

 

 

 

 

 

 

낡아가는 그늘

 

            박분필

 

나무가 제 그늘을 들어 옮긴다

십초 이십초 간격으로, 그러느라

그늘이 조금씩 낡아가는 걸 나무는 알까

나무는 내일이면 당장

새 그늘을 갈아입을 것이다

 

세상의 귀퉁이에 버려진 낡은 옷

누군가의 몸 빠진 누덕누덕한,

주머니를 뒤지고 솔기를 까뒤집던

바람도 이제 피곤하다

 

같은 일 똑 같은 방법으로 반복하는 일

얼마나 마음지친 일인지, 낡아가는 일인지

이윽고 터진 실밥 하나 기어나와

구멍 난 세상의 모든 옆구리들, 상처들 잡아당겨

깁기 시작한다, 덧댈 구름 한 조각 없다

 

어둠은 바다 밑처럼 깊어지고

흔들리던 하루도 완전한 정지다

낡은 어깨, 낡은 날개, 부활의 시간

모든 것들 밤 속으로 뿌리를 내린다

그늘은 밤마다 터진 그늘을 꿰맨다

 

 

 

 

 

 

민원인 홍길동

 

            이동재

 

운전면허 갱신기간이 지난 아내를 따라

벌칙금을 납부하러 파주 경찰서에 간 날

거기서 다시 그를 만났다

고소고발인 홍길동

민원인 홍길동

분실신고자 홍길동

사백 년째 민원인으로 혹은 그 대리인으로

그는 서류에 이름을 남기고 있었다

대출을 받으러 농협에 간 날은

거기서도 그를 만났다

원래 근본이 없는 인간이라 그런가

그는 수백 년째 그렇게 민원인으로

대출자로 고소고발자로

온갖 민형사 사건의 주인공으로

부동산 금융 기관의 단골 대출고객으로 이름을 올려놓고 있었다

아직도 호부호형이 문제인지

빽 없고 돈 없고 힘 없는 사람들의 대명사로

그는 여전히 이름을 팔고 있었다

민원인 이름에 그를 지우고 잠시 여경의 눈치를 보다가

진시황, 이건희, 오바마, 전두환의 이름을 써본다, 써봤다.

상대가 놀란다. 그렇게 겁박해봤다. 마음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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