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오탁번 시집, 시안, 2010(초판 발행)
함박눈
오늘 또 손을 데었다
장작 난로에 고구마를 굽다가
껍질이 까맣게 탄 걸 보고
맨손으로 집으려다가
앗! 뜨거! 소리쳤다
손가락이 욱신거리며
바로 물집이 부풀어 올랐다
어제는
라면 끓이던 냄배를
맨손으로 잡다가
앗! 뜨거! 내동댕이쳤다
끓는 물에 손가락과 발등이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나는 왜 이렇지?
뜨거운 것을 만질 때는
수건이나 장갑을 써야 한다는 것을
맨날 까먹는 나는
정말 왜 이렇지?
욱신거리는 아픔에 잠 못 이루는 밤
자정이 넘자 함박눈이 펄펄 내려
삽시간에 눈천지가 된다
혼자 지르는 悲鳴이
은하수 이랑까지 퍼져나갔는가
베 짜던 참한 계집이
불에 덴 손가락 호호 불어주려고
일회용 반창고마냥 가벼운
펄펄 함박눈 되어
백치가 된 나를 찾아오는 것일까
봄나들이
요요요
부르면
쪼르르 달려오다가
뒷다리 하나 들고
오줌 싸는
쌀강아지
한 다리 들고 선
논둑 위의
왜가리가
싱겁게 바라본다
안해
토박이말 사전에서 어원을 찾아보면
‘아내’는
집 안에 있는 해라서
‘안해’란다
과연 그럴까?
화장실에서 큰거하고 나서
화장지 다 떨어졌을 때
화장지 달라면서
소리쳐 부를 수 있는 사람
생일 선물 안 사줘도
그냥 지나가는
그냥 그런 사람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될
그런 사람인데
집 안에 있는 해라고?
천만의 말씀!
어쩌다 젊은 시절 떠올라
이불 속에서 슬쩍 건드리면
- 안 해!
하품 섞어 내뱉는 내 아내!
열쇠
미아리 삼양동 산비탈에서
삭월 셋방에 살던 신혼시절
주인여자는 대문으로 출입하고
내 가난한 아내는
담벼락에 낸 쪽문으로 드나들었다
쪽문을 열고 부엌을 지나
대여섯 평 좁은 방에서
신혼의 단꿈을 꾸며 살았다
뚱뚱한 주인여자의
짜랑짜랑하는 열쇠소리에 주눅이 들어
사랑을 나눌 때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몇 년 후 장위동에다
전세방 끼고 대출 받아서
스무 평 집을 장만했을 때
아내와 나의 꿈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열쇠고리에 달린
대문 열쇠. 현관 열쇠. 방 열쇠를 보면서
아내는 함박웃음을 웃었다
열쇠고리를 짜랑짜랑 흔들며
당당하게 대문을 따고
우리집을 맘 놓고 드나들었다
열쇠가 늘어날수록
아내의 허리도 굵어지고
아들 딸 낳아 살다가
10년 후에는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아파트를 분양받은 것이 아니라
열쇠 꾸러미를 분양받은 것 같았다
현관 열쇠, 방 열쇠, 장롱 열쇠, 싱크대 열쇠
화장실 열쇠, 다용도실 열쇠, 장식장 열쇠
그것도 각각 네 개씩이나 되는
묵직한 열쇠 꾸러미를 받아든 아내는
열쇠에 맺힌 한을 풀었다는 듯
한동안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토록 자랑스럽던 열쇠도
세월 따라 하나하나 사라지고
이제 아파트도 오피스텔도
디지털키와 카드키로 다 바뀌었다
제 집 문을 열 때는
열쇠를 구멍에 찔러 넣고
홱 돌려야 제 맛인데
손끝으로 번호를 톡톡 누르니까
꼭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는 것 같다
열쇠란 열쇠는
몽땅 다 사라져버렸기 때문일까
이순의 저녁나절도 아득히 흘러간 오늘
아내의 방을 여는
사랑의 열쇠를 어디다 뒀는지
통 생각나지 않는다
삭월 셋방 가난했던 그 시절엔
대문을 따는 열쇠는 없었지만
밤마다 사랑의 방을 여는
금빛 열쇠가 나에게 있었는데
이젠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다
自鳴鐘
젊은 시절
나를 깨우던 자명종을
이제는 내가 재운다
아침 약속이 있거나
지방에 내려가는 날이면
아침 여섯시에
자명종을 맞춰놓지만
언제나 내가 먼저 잠이 깨어
뒤늦게 울리는 자명종을 끈다
여행길에서
혼자 호텔에 묵을 때도
늘 모닝콜을 부탁해 놓지만
벨이 울리기도 전에
잠이 깨어
모닝콜 취소 버튼을 누른다
이 세상
다 잠들어 있는 이른 새벽에
나 홀로 잠이 깬다
오늘도 가볍고 쉬운 일만
생겼으면 좋겠다
울지 말고 잘 자라
자명종아
다 쓴 붓
맑은 물에 헹궈서 붓걸이에 걸 듯
붓에서 풀리는
흐려지는 먹물처럼
하루해 저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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