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지 2010 가을
숲이 지은 연둣빛 신간
김찬욱
첫 새벽 혼자 읽는 숲으로 가는 책이 참 좋다
냉골에서 지은 글이 난해하지 않아서 참 좋다
목차가 없어 궁금증이 확대되어서 참 좋다
어제 저버린 해를 다시 퍼 올리는 나무들이 참 좋다
책갈피마다 피가 도는 푸른 맥박소리가 참 좋다
관념의 틀에서 벗어난 자연스런 활자들이 참 좋다
보글보글 발효되는 연둣빛 물방울이 참 좋다
제비꽃 그림자를 신고 앙증맞게 웃는 발이 참 좋다
아카시아 우듬지 아래 지은 다락방 줄거리가 참 좋다
딱따구리 뾰족한 부리가 대신 울어 주어서 참 좋다
나뭇잎들이 하는 말이 싱그럽게 퍼져나가서 참 좋다
앞서가는 자를 쫓지 않는 눈이 순한 운동화가 참 좋다
구멍을 밟아도 발뒤꿈치를 무는 쥐새끼가 없어 참 좋다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물의 발자국 소리가 참 좋다
발바닥도 미소 짓는 봄 속으로 혼자 떠나는 것이 너무 슬프다
길치
윤영숙
버들치 어름치는 잉어과, 나는 길치과에 속한다 내비게이션 없이는 꼼짝도 못하는 물고기다 길 위에서 길을 까먹는 길치다 머뭇거리는 내 곁을 쌩, 날아가는 저 차는 눈치다 쏘가리가 오른쪽 빽미러를 스치고 가물치가 파문을 일으키며 나를 따돌린다 날치들이 속도전을 펼치는 도로에 길들여지지 않는 길치,
나는 골목에 자주 갇힌다 너무 일찍 꺾었거나 너무 늦게 접어들어 낯선 골목에 빠진 발목은 제자리를 맴돌곤 한다 그 많은 미로를 빠져 나오기까지 만나는 뜻밖의 풍경들, 눈에 설은 사물들이 하나하나 제 이름을 찾는다 내 몸속 길치의 유전자가 늘 새로운 길을 가만가만 잡아채는 줄도 모르고 또 길을 잃었다고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나를 타박했던 것은 아닐까
천천히 커브 꺾는 저녁, 금강모치 한 마리가 길을 물어온다 눈이 너무 맑아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사창
김명인
앉은 자리가 희부옇게 지워질 때까지
하루 종일 바다만 바라보던 소년이 있었다
사창紗窓에 일렁이는 빛살처럼 석양
은은하게 번져들자 소년은
파도소리를 등지고 그 바다를 떠났다
세월이 흘렀다, 그가 비운 자리는
불멸의 파도가 와서 씻었겠지만
늙지 않는 파도야 소년을 기억하고 부서졌겠는가
소년은 파도 없는 거리를 떠돌았다, 나이가 들수록
가슴에 철썩거리던 수많은 포말들 가라앉고
마침내 추억조차 희미해졌을 때
떠나온 자리까지 밀고 가는 바람에 떠밀려
다시 그 바다 앞에 섰다
예전의 수평선은 그대로였다, 소년의 심중에는
겪어낸 것들의 안부 따윈 없었다, 아무 것도
적어놓지 않았는데 필생을 다한 기록인 듯
모래 위에 주름들 접히고
조석이 제 슬픔을 펼쳤다 다시 덮었다
새겨 놓은 것 영원이라도
사창에 어른거리는 물그림자 같았다
흥부뎐
윤관영
사자후獅子吼 초식 하나로 상대의 칠공에서 피 흘리게 하는 고수가 있는가 하면, 붓 가리는 명필이 있는가 하면, 노소미추 가리지 않는 흥부가 살았는가 하면, 사람 농사를 우선 했는가 하면, 밭에는 안 가고 그 밭에만 갔는가 하면 그 일만 했는가 하면, 후배위 같은 자세로 밥 푸는 형쉬 뒤에 서서 허리를 굽신대며 저 흥분-데요 길고 나직하게 빼자 주걱이 날아와 다음 관문이 열렸는가 하면, 심후지경한 내공의 그가 태연자약, 밥풀을 떼며 저 지금 섰는데요 하자 자동문처럼 다음 관문이 열렸는가 하면, 흥분한 형수가 다시 반대편 뺨을 대각으로 좌수검 휘두르듯 내리치자 그래도 사정할 데라곤 형수밖에 없는데요 하는 이 한 초식으로, 마지막 관문을 통과해 대형의 반열에 올랐는가 하면 초지일색이었는가 하면,
어디서 박이 열리는 지도 모르고 뻗어나가는 박 넝쿨처럼 사람 농사가 끝없었다는 얘기가 있었는가 하면, 주걱만 잡아도 애가 서는 경지였는가 하면, 박흥부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공전절후 전무후무-
기다림은 힘이 세다
최진화
길들은 만들어지느라 없어지고
종일 해는 구름에 가려 내려오지 못하네
서리 맞은 늦가을 배추들
등을 세우고 기침을 쏟아내는데
옆구리 깊숙이 잠들어 있던
당신이 달그락거리네
눈을 감고 귀를 막아도
따뜻했던 온기가 늑골을 타고 기어오르네
어디쯤엔가 버리고 가야 할 것 같은데
돌아오지 않을 이 길 위에 내려놓고 가야 할 것 같은데
꽃 지고 열매를 기다린 시간들 사라지고
다 내어 준 빈 들은 기억의 티끌을 태우고 있네
노을 속으로 날아오르며 흰 새떼가 되어
내 몸을 친친 감네
낯선 정류장마다 당신은 말없이 서 있네
저 무덤가, 저 억새밭, 저 느티나무를 지나
쟁기질
조영심
누가 이 산자락 된비알에
황토지 한 장 비스듬히 뉘여 놓았을까
깡마른 소나무, 허리 비틀어
문진삼아 양 끝을 누르고
먹물을 갈고 있네
묵 향 번지고
솔 향 깊어지네
이랑이랑 먹 가는 소리
고랑고랑 먹물 메기는 소리
한 노인 이마에 쟁기 줄을 메고
또 한 노인 뒤에서 쟁기잡이 되네
씨앗이 앉을 자리 바람길 내 줄 자리
먹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가볍게 붓끝 거슬러 중봉으로
힘을 나누되 머무르지 않고
가벼우나 게을러 보이지 않게
획의 마디마디를 꺾임으로 눌러 주네
가슴 복판까지 먹물 베이네
먹물 번질세라 햇살 밟아 다지면서
깊이로부터 생기를 불러내고 있네
기운 가득 찬 획을 긋고 있네
마음 밭을 갈고 있네
빵나무아래
권혁수
1.
인터넷 웹사이트에 빵나무아래가 울린 공고가 떴다
-1,700만원에 나를 팝니다
빵나무아래의 몸값은 그녀가 은행에서 융자받은 집값
은행융자 속에 빵나무아래의 집이 있고
집속에 빵나무아래가 있고
빵나무아래엔 그늘이 있어
그 그늘 지워줄 남자를 찾는 빵나무아래
몸의 집을 구하는 빵나무 아래
2.
인터넷 쇼핑물에 시인의 얼굴이 해처럼 떠 있다
- 시(詩)의 집, 정가7,000원(회원 10% 할인)
빵보다 값싼 시(詩) 쇼핑물 아래 앉아
시인이 장바구니에 담길 시를 쓰고 있다
뱃속에서 꺼낸 11월의 그늘
맨발 밑에 깔고
* 빵나무아래: 중국 사천성의 한 이혼녀 ID. 은행융자로 무리하게 구입한 집값1,700만 원을 갚아주는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인터넷에 공개
진동하는 사람
이병률
가끔 당신으로부터 사라지는 상상을 하는
나는 불편한 사람
불난 계절을 막 진입하고도
폭발을 멈추지 않는 사람
강의 좌안과 우안에 발을 걸치고 서서
그래도 앞으로 가야 할 이유를 더듬느라 그러는 사람
시간의 주름들을 둘러쓰고도
비를 맞으면 독이 생기는 나는 누군가에게 불편한 사람
달팽이의 소요에 불과한 진화의 모두를 타이르기엔 늦은 저녁
어쩌면 간절히 어느 멀리 멀리서 살기 위해
돌고돌다 나를 마주치더라도
나는 나여서 불편한 사람
가끔 당신으로부터 사라지려는 수작을 부리는
나는 당신 한 사람으로부터 진동을 배우려는 사람
그리하여 그 자장으로 지구의 벽 하나를 멍들이는 사람
택시는 벌써 먹이를 찾아 두더지처럼 불 꺼진 도시를 파고 들어가고,
-문정, 「심야할증요금」 중
내 시의 저작권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손택수
구름5%, 먼지3.5% 나무 20%, 논10%
강10%, 새5%, 바람8%, 나비2.55%
돌15%, 노을1.99%, 낮잠 11%, 달2%
(여기에 끼지 못한 당나귀에게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함)
(아차, 지렁이도 있음)
제게도 저작권을 묻는 일이 가끔 있습니다 작가의 저작권은 물론이고 출판사에 출판권까지 낼 용의가 있다고도 합니다. 시를 가지고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고한 어느 방송국 피디는 대놓고 사용료 흥정을 하기까지 했답니다 그때 제 가슴이 얼마나 벌렁거렸는지 모르실 겁니다. 불로소득이라도 생긴 냥 한참을 달떠있었지요 그럴 때마다 참 염치가 없습니다 사실 제 시에 가장 많이 나오는 게 나무와 새인데 그들에게 저는 한 번도 출연료를 지불한 적이 없습니다. 마땅히 공동저자라고 해야 할 구름과 바람과 노을의 동의를 한번도 구한 적 없이 매번 제 이름으로 뻔뻔스럽게 책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작자미상인 풀과 수많은 무명씨인 새들의 노래를 받아쓰면서 초청 강의도 다니고 시 낭송 같은 데도 빠지지 않고 다닙니다 오늘은 세 번째 시집 계약서를 쓰러 가는 날 악덕 기업주마냥 실컷 착취한 말들을 원고 속에 가두고 오랫동안 나를 먹여 살린 달과 강물 대신 싸인을 합니다. 표절에 관한 대목을 읽다 뜨끔해하면서도 초판은 몇부나 찍을 건가요, 묻는 걸 잊지 않습니다 알량한 인세를 챙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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