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 2010 가을

 

 

 

 

 

 

 

우물에 뜬 달

-       이규보

 

산승이 달빛을 탐내

물병에 함께 길었네.

절에 이르러서야 깨닫겠지,

물병 따르면 달도 비는 것.

 

 

 

 

 

 

자기를 조문하다

 

-       이양연

 

일생이 시름 속에 지나갔고

명월은 모아도 늘 모자랐네.

만 년을 길이 마주할 테니

이 길도 나쁘지 않구나.

 

 

 

 

 

 

 

달 아래 술을 마시다

-       이진망

 

술잔 속 밝은 달을 들이켜니

술잔 비면 달도 또한 비누나.

술잔을 언제나 가득케 한다면

달도 또한 끝없이 생겨나리라

 

 

 

 

 

 

 

추석달

 

     손택수

 

스무 살 무렵 나 안마시술소에서 일할 때, 현관보이로 어서 옵쇼, 손님들 구두닦이로 밥 먹고 살 때

 

맹인 안마사들도 아가씨들도 다 비번을 내서 고향에 가고, 그날은 나와 새로 온 김양 누나만 가게를 지키고 있었는데

 

이런 날도 손님이 있겠어 누나 간판불 끄고 탕수육이나 시켜 먹자, 그렇게 재차 졸라대고만 있었는데

 

그 말이 무슨 화근이 되었던가 그날따라 웬 손님이 그렇게나 많았던지, 상항 구두코에 광을 내는 동안 테, 퉤 신세한탄을 하며 구두를 닦는 동안

 

누나는 술 취한 사내들을 혼자서 다 받아내었습니다. 전표에 찍힌 스물 셋 어디로도 귀향하지 못한 철새들을 하룻밤에 혼자서 다 받아주었습니다.

 

날이 샜을 무렵엔 비틀비틀 분화장 범벅이 된 얼굴로 내 어깨에 기대어 흐느껴 울던 추석달

 

 

 

 

 

 

 

낮달의 비유

 

         문태준

 

내 목숨이 서서히 무너지고 싶은 곳

 

멀리서 온 물컹물컹한 소포

엷은 창호문과 성글은 울

찬물 한 그릇이 있는 마루

꽃도 새도 사람도

물보다 물렁하게 쥐었다 놓는,

식었던 아궁이가 잠깐만 환한,

 

내 귓속에 맑게 흐르는 이별의 말

자루에서 겨처럼 쏟아져 내리다 흰빛이 된 말

 

 

 

 

 

 

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

 

              문인수

 

지리산 앉고

섬진강은 참 긴 소리다

 

저녁노을 시뻘건 것 물에 씻고 나서

저 달, 소리북 하나 또 중천 높이 걸린다

산이 무겁게, 발원의 사내가 다시 어둑어둑

고쳐 눌러 앉는다

 

이 미친 향기의 북채는 어디 숨어 춤추나

 

매화 폭발 자욱한 그 아래를 봐라

, , 뚝 듣는 동백의 대가리들

 

선혈의 천둥

난타가 지나간다

 

 

 

 

구두 닦기

 

        김원국

 

한밤에

새벽 한 시에

자위를 한 뒤

구두를 닦는다

밤의 한 복판을 푹

찔러

희멀건한 어둠으로

빛 나간 검정으로

18 5천원어치 곡선을 채운

소가죽에 기도하듯

검정을 문질러댄다

검정 검정

검정 감정이

검은 소를 때리고

- 푹 파여

스러진다

내일도 빛 뒤에

사생아처럼 숨어

돌아다닐 준비를 하는

이제 좀 반질거리는 밤은 낮의 뿌리

지난 천 년이 내일 하루의 뿌리다

언제쯤 사정없이 잠들지 모르겠으나

빈 정낭으로 구두를 닦는다

밤을 닦는다

뿌리를 캐내어

뒤집어 말리고 싶다

 

 

 

 

 

 

너의 무릎

 

          김원국

 

나는 이 세상의 그림자

부서진 꿈들의 인수분해

연주된 지25년 지난 바이올린의 감퇴된 식욕

지하철에 두고 내린 김치

죽고 난 뒤 나오는 보험금

죽고 난 뒤 나오는 보험금 계약서에 싸인하는 중년인의 무기력한 힘줄

하품하는 여자의

자신은 맡을 수 없는 썩은 내

집 나가서 여섯 달째 소식 없는 이력서

범고래 아가리에 체크무늬 수놓는

철그물의 존재와

매일 소젖을 먹는 남자

자 이제 누군가 내게 말해다오

내가 왜 열심히 살아야 하는가

라고 물어본 일 없는 입술

복사기에 끼어있는

이면지 같은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막 밖으로 내내 튀어나와 있는

그녀의 무릎

조약돌처럼, 가슴을 흐르는 강에 놓인 무릎

내려다보면 내가 물새가 되는

찰랑이고 물고기 같은

너의 무릎

 

 

 

 

 

 

세르파, 소파

 

            안정혜

 

세르파, 그는 오늘도 만년설이 쌓인 카트만두로 간다

 

아프리카 물소 한 마리

제 잔등에 엎드려 낮 꿈에 빠진 사내의 잠꼬대를 받아주느라

검붉은 가죽은 색이 바래고 뱃구레는 우묵해졌다

 

물소는 일생토록 강물에 잠긴 별과 달을 건졌으나

이 집에 와서부터는 네팔의 들소처럼

짐짝 같은 사내의 하루를 업고 살게 되었다

 

사내는 하릴없이 그 등짝에 엎드려 설산을 올라보자 하고

뼛속까지 얼리는 빙하계곡도 함께 가자고 한다

두통을 앓고 고산증에 시달려 끙끙거릴 때면

코가 이파리 한 줌을 어금니에 물린다

 

잉여의 햇살이 넘치는 실내, 샤갈의 시계는 늘어져 있고

청년백수, 사내의 무료한 오후는 아득한 몽유의 길에 든다

곳곳에 눈사태와 트레바스, 아찔한 트레킹을 하며

물소는 입가에 침버케를 묻힌다

 

늙은 물소 한 마리가 엎드려 있다

잔등에 올라탄 사내는 온종일 시간을 짓뭉갠다

백일몽에 빠진 사내의 셰르파, 물고가죽 소파

길 밖의 꿈을 찾아 서툴게 등짐을 지고 간다

 

 

 

 

 

 

대왕오징어

 

        안정혜

 

버스정류장 앞 전봇대에

오징어 한 마리가 매달려있다

무담보 대출, 즉시 가능

갑오징어 등 위에 바다체로 찍혀 있다

가위질로 가랑이진 다리에

빨판처럼 붙어 있는 휴대폰 번호

불량한 신용도 다 떠맡아주겠다고

꾸덕꾸덕 말라가는 피데기에서

난바다 파고를 헤치던 숨소리가 들린다

담보물 없어도 즉시 수혈해

명줄을 이어주겠다는 대왕오징어

허울만 좋은 대왕의 말에 속아

저 다리 덥석 찢어 질근질근 씹다가

송곳니 잃어버린 사람이 많다던데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대왕오징어

저 검은 흡반으로

사정없이 피를 빨아댈 텐데

대왕오징어의 낚시질에 코가 걸렸나?

파랑지는 물살 헤쳐 오느라

흠뻑 젖은 바짓가랑이 하나가

대왕의 다리를 찢고 있다

 

 

 

 

 

용의자

 

          오은

 

테이블 위에 우유를 엎질렀습니다. 허공을 찌르는 몇 개의 방울들을 지켜보는 동안, 컵에서 주르르 잉여가 흘렀습니다. 최후의 관객이 되고 싶었습니다. 동공이 하얘질 때까지 현장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테이블의 다리는 네 개. 우유가 쏟아질 때 네 다리는 한꺼번에 떨었습니다. 네 다리는 통째로 생각합니다. 맞은편에 있는 네게 다가갈 수 있을까. 그러기엔 서로의 마음이 맞지 않습니다. 옆에 있는 네게 넌지시 고백해볼까. 그러기엔 몸뚱이가 너무 튼튼합니다. 이럴 때 그림자라도 하나씩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커튼이 열리면 테이블은 본때를 보여줄 겁니다. 자신의 결이 얼마나 보드라운지, 태양을 마주하는 데 얼마나 거리낌 없는지, 광합성에 대한 기억이 얼마나 또렷한지. 네 다리는 테이블을 한껏 받들어줍니다. 그림자는 한 방향으로 잘 뻗어 있습니다. 테이블의 얼굴에 나이테가 하나 더 그려집니다.

 

햇빛이 테이블 위로 왈카닥 쏟아집니다. 얼굴이 아름다워집니다. 그림자가 짙어집니다. 테이블은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단단히 붙잡을 용의가 있습니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네 다리는 알고 있습니다. 빛을 뿜는 데보다는 품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한다는 것.

 

네 다리는 자신을 쓰다듬어줄 사람이 없다는 게 문득 쓸쓸합니다.

 

누가 우유를 엎질렀을까요. 누가 우유를 사다놓았을까요. 누가 젖소를 독려했을까요. 누가 테이블의 몸뚱이에 대못을 쾅쾅 박았을까요. 테이블은 원래 네발짐승이었을지도 모르는데.

 

한 명의 나와 세 명의 너는 두 발로 서서 생각하는 겁니다. 우유의 유통기한을, 젖소의 혐의를, 햇빛의 따사로움을. 정작 아래 있어서 자기 자신의 얼굴도, 엎질러진 우유도 보지 못했으면서. 다리는, 다리는, 네 다리는, 너의 다리는…….

 

 

 

 

 

 

 

 

 

 

 

 

 

 

 

 

 

 

 

 

 

 

 

'other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헤르타 뮐러에게 다가가기 - 문학동네  (0) 2010.09.26
경계에 선 아이들 - 페터 회  (0) 2010.09.25
애지 2010 가을  (0) 2010.09.25
우리 동네 - 오탁번 시집  (0) 2010.09.22
문학청춘 2010 여름  (0) 2010.09.2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