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타 뮐러에게 다가가기, 문학동네
나는 절대로 무단결근해선 안 되었지만, 일할 공간도 없었고 친구의 사무실에서도 더는 머무를 수 없었기 때문에, 층계참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습니다. 층계를 몇 번 오르락내리락하다보니, 불현듯 다시 어머니의 아이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내게 ‘손수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손수건을 2층과3층 사이의 계단 위에 놓고 매끄럽게 폈습니다. 반듯하게 펴놓은 손수건 위에 앉아서, 두꺼운 사전들을 무릎에 올려놓은 채 수압기계에 대한 설명을 번역했습니다. 나는 층계의 위트*였고, 내 사무실은 손수건이었습니다.
* 원래는 ‘방을 나선 뒤, 층계에서 뒤늦게 떠오른 생각‘을 뜻하지만, 현재는 운명의 아이러니나 우스꽝스러운 태도 등을 가리키기도 한다.
층계의 위트로 지내던 시절, 나는 사전에서 층계라는 낱말의 요모조모를 찾아보았습니다. 층계의 첫 계단은 ANTRITT(취임, 시작)이고, 마지막 계단은 AUSTRITT(탈퇴, 퇴장)입니다. 발을 디딜 수 있는 수평의 평평한 부분은 양옆의 TREPPENWANGE(층계 측면 받침대)에 끼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계단 사이의 빈 공간은 TREPPENAUGE라고 부릅니다. 나는 기름 묻은 수압기계의 부품들을 통해 제비꼬리(SCHWALBENSCHWANZ*)나 백조의 목(SCHWANENHALS**) 같은 아름다운 단어들도 알게 되었습니다. 나사 받침은 암나사(SCHRAUBENMUTTER)라고 합니다. 나는 층계 각 부위의 시적인 명칭과 기계공학 언어의 아름다움에 새삼 놀랐습니다.
층계 뺨(TREPPENWANGE), 층계 눈(TREPPENAUGE), 그렇다면 층계에도 얼굴이 있는 것입니다.
* 제비꼬리 모양의 나무 이음새.
* 뻣뻣하면서도 구부릴 수 있을 정도로 탄성이 있는 고무호스 모양의 금속 관.
트럼펫이든 아코디언이든 손수건이든, 바로 이런 아주 작은 물건들이 삶의 극히 이질적인 것들을 하나로 묶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물들은 순환하면서 이따금 그 궤도에서 벗어납니다. 여기에는 반복하는, 악순환하는 뭔가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알지만, 말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글로 쓸 수는 있습니다. 글을 쓰는 것은 무언의 행위, 머리에서 손으로 직행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입을 거치지 않습니다.
사물은 자신을 이루는 물질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몸짓은 자신의 감정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낱말은 자신을 말하는 입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현존을 확신하기 위해서는 사물과 몸짓과 낱말이 필요합니다. 그것들을 해석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한동안은 수상해 보이는 걸 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을 이용해 굴욕을, 잠시나마 수상해 보이지 않는 품위로 바꿀 수 있습니다.
내가 망명하기 직전, 어머니는 아침 일찍 마을 경찰관에게 소환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대문간에 이르러서야 “손수건 있니?”라는 물음을 떠올렸습니다. 그 순간 어머니에게는 손수건이 없었습니다. 경찰관이 채근하는데도, 어머니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 손수건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경찰관은 파출소에서 미친 듯이 날뛰었습니다. 어머니는 루마니아 말을 잘하지 못해 경찰관의 울부짖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경찰관은 방을 나가면서 문을 잠갔고, 어머니는 하루 종일 그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처음 몇 시간 동안 어머니는 책상 앞에 앉아 울었습니다. 그다음에는 방 안을 서성거리다가, 눈물 젖은 손수건으로 가구의 먼지를 닦기 시작했습니다. 그다음에는 방구석의 물 양동이와 벽에 걸린 수건을 가져다 바닥을 닦았습니다. 어머니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경악했습니다. “뭣 때문에 파출소를 닦아줘요?” 내 질문에 어머니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시간을 보낼 일거리가 필요했거든. 그런데 사무실이 너무 지저분하더구나. 큼지막한 남자용 손수건을 하나 가져갔더라면 좋았을 것을.”
어머니께서 자발적으로 자신을 더욱 낮춤으로써 구류 상태에서 품위를 만들어내었다는 것을 나는 지금에야 이해합니다.
나에게도 언어가 있으며 그리고 이 세계에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기 위하여, 그것이 그녀의 글쓰기의 입구였다고 그녀는 말한다.
가톨릭 교리에서는 신이 ‘도처에 편재한다’고 말한다. 사실 그는 최초의 독재자나 다름없다. 그는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눈에는 거의 모든 것이 죄였으리라.
문학에서 진실은 철저하게 ‘만들어진다.’ 우리를 그 진실의 자취로 이끄는 것이 바로 픽션이다. 글을 쓸 때는 살면서 겪지 못한 것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진실이 된다. 글쓰기 안에는 그것만의 내재된 법칙이 있다. 그렇지만 삶은 그것을 조롱한다. 글을 쓰기 위해 살아갈 필요는 없다. 그것은 일종의 판토마임과도 같다. 우리는 하나의 현실을 축조한다. 그리고 거기서 우연히 전혀 예상치 못한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역설은, 픽션의 진실이 실제의 진실에 가장 잘 부합한다는 것이다. 기이하지만 아름다운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글쓰기를 버텨내게 한다. 사실, 나는 글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언어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내면의 평화가 필요치 않다. 그게 뭔지도 모른다. 내면의 평화라는 걸 가진 사람이 정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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