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런거리는 뒤란, 문태준, 창비, 2009(초판11쇄)
호두나무와의 사랑
내가 다시 호두나무에게 돌아온 날, 애기집을 들어낸 여자처럼 호두나무가 서 있어서 가슴속이 처연해졌다
철 지난 매미떼가 살갗에 붙어서 호두나무를 빨고 있었다
나는 지난 여름 내내 흐느끼는 호두나무의 哭을 들었다
그러나 귀가 얇아 호두나무의 중심으로 한번도 들어가보지 못했다
내가 다시 호두나무에게 돌아온 날, 불에 구운 흙처럼 내 마음이 뒤틀리는 걸 보니 나의 이 고백도 바람처럼 용서받지 못할 것을 알겠다
태화리 도둑골
딱따구리 한마리가 숲에서
목구멍을 치는 소리
먹는 입이 저처럼
활엽수를 쪼는 딱따구리만큼 맑아질 수 있을까
하도 맑아
상처를 잊은 듯
나무의 존재도 오롯하게
허공에 부풀어
처서處暑
얻어온 개가 울타리 아래 땅그늘을 파댔다
짐승이 집에 맞지 않는다 싶어 낮에 다른 집에 주었다
볕에 널어두었던 고추를 걷고 양철로 덮었는데
밤이 되니 이슬이 졌다 방충망으로는 여치와 풀벌레가
딱 붙어서 문설주처럼 꿈적대지 않는다
가을이 오는가, 삽짝까지 심어둔 옥수숫대엔 그림자가 깊다
갈색으로 말라가는 옥수수 수염을 타고 들어간 바람이
이빨을 꼭 깨물고 빠져나온다
가을이 오는가, 감나무는 감을 달고 이파리 까칠하다
나무에게도 제 몸 빚어 자식을 낳는 일 그런 성싶다
지게가 집 쪽으로 받쳐 있으면 집을 떠메고 간다기에
달 점점 차가워지는 밤 지게를 산 쪽으로 받친다
이름은 모르나 귀익은 산새소리 알은체 별처럼 시끄럽다
하짓날
제비집인데 제비 아닌 뭔 날 것 돌아온다
찬물 위 기름 돌 듯 매번 처마 아래 그 집 허물 생각
그을린 방구들 구름들 서쪽으로 갈아 내놓는 인부들
집터 한귀퉁이에 엉켜 살던 푸른 풀배암이
가시덤불 우거진 산속으로 소낙비처럼 내쳐간다
병 깊어져 오늘 산속으로 간 사람의 무정함
묻힌다는 것은 무엇인가, 초저녁녘 중얼거리는
날벌레떼거리, 저 살아 있는 무덤들!
나는 피우려던 쑥불 그만둔다
뜸부기는 별 하나씩 골짜기에 따 담아
하늘의 벌판에서 꽃들 별똥으로 지는데
하현달에 올라 낫을 갈며 나는 끊어지는 인연을 본다
섬에서 며칠
숫돌에 낫을 갈 듯 오가는 저 파도의 날은 넘어버렸다
파도야 종을 치듯 하지만 내 귀는 할망구 발톱만큼 두터워져
가끔 두 근어치의 구름만 눈 안에 얹힐 따름이다
섬, 거적문 안에 앉아 머리카락도 기르고 손톱도 길러
쓸쓸한 생각들이 삼신메를 먹고 생각을 낳아 기르는
그 태생胎生의 과정을 지켜보면 생각의 창도 관대해진다는 것
섬, 불탄 집에 들어가 불길을 지피던 예전의 바람을 보는 자는 섬에 닿지 못할 것이다
저 번잡한 새들은 밤새워 울어도 섬을 유혹하진 못할 것이다
忍冬
겨울 나무가 친필을 보내오니
그 文章이 물빛이다
생각과 생각 사이에
퇴고도 없고
가두는 것 없이
퀭한 이목구비도
그냥
그런 듯이
요양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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