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의 잠

          정호승

 

 

누구나 잃어버린 시계 하나쯤 지니고 있을 것이다

누구나 잃어버린 시계를 우연히 다시 찾아

잠든 시계의 잠을 깨울까봐 조용히 밤의 TV를 끈 적이 있을 것이다

시계의 잠속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여 있는 것을 보고

그 눈물 속에 당신의 고단한 잠을 적셔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동안 나의 시계는 눈 덮인 지구 끝 먼 산맥에서부터 걸어왔다

폭설이 내린 보리밭 길과

외등이 깨어진 어두운 골목을 끝없이 지나

술 취한 시인이 방뇨를 하던 인사동 골목길을 사랑하고 돌아왔다

 

오늘 내 시계의 잠 속에는

아파트 현관 복도에 툭 떨어지는 조간신문 소리가 침묵처럼 들린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너의 폭탄테러에 죽었다가 살아났다

서울역 지하도에서 플라스틱 물병을 베고 잠든

노숙자의 잠도 다시 죽었다가 살아나고

 

내 시계의 잠 속에는 오늘

폭설이 내리는 불국사 새벽종 소리가 들린다

포탈라 궁에서 총에 맞아 쓰러진 젊은 라마승의 선혈 소리가 들린다

판문점 돌아오지 않는 다리 위를

부지런히 손을 잡고 걸어가는 젊은 애인들이 보인다

 

스스로 빛나는 눈부신 아침햇살처럼

내 가슴을 다정히 쓰다듬어주는 실패의 손길들처럼

 

 

 

 

 

머뭇하다

 

           김명인

 

뼈 다발들을 넣어두는

소리의 곳집이라도 지나는 듯

바람 건반을 밟고 가던 무리 새 한 마리

내 쪽으로 날아오면서

무엇인가 물으려다 말고

물으려다 말고

하늘, 시퍼런 깊이로 곤두박인다

 

수수만장 너울거리는

억새 무심한 언덕길로 내려서던 새끼 염소들

멈칫거리면서

내게 무엇인가 물으려다 말고

물으려다 말고

이쪽저쪽으로 흩어지며 매매거린다

 

늦가을 언저리

누가 머뭇하는지 자꾸만 놓치곤 한다

 

 

 

 

 

 

 

 

 

백목련

 

      박철

 

봄이다 봄이련만

사내의 흰머리카락이 보기 싫다고 멀어지는 길 위로

흰눈이 내린다

끝눈일 것이다

흰눈이 더듬거려 찾은 세상에

한 그루 나무가 물을 마시고 있다

늙어가는 몸이 무릎을 세우고 있다

언제쯤 당신에게도 닿았을 향기가

나무에 부딪히고

나무에 흰머리가 날린다

저녁이 되면 눈이 그치고

밤으로 꽃봉오리는 터진다고

머리카락이며 눈발이며 흐느끼다가

하얗게 흩어지며 사라져간다 나무는

하얗게 팔뚝을 걷어 올린 등대 그리고

등대에 불 피워놓고 기대앉은 흰머리카락의 사내

긴 겨울이 간 것이다

 

 

 

 

 

 

 

 

 

여지

 

    이병률

 

모르는 사람을 따라 숲에 갔었지요

모르는 사람과 남쪽 큰 숲에 있었어요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으려다 술병을 열었다고 적었습니다

 

씻으려다가

눈을 감고는 한참

 

겉옷이라도 벗으려다

눈을 감았다고 적었습니다

 

바람 많은 날들은 바람이 많이 불겠다는 예정 속에 닥치고

적요가 바닥나는 날들은

마음이 갈라질 거라는 예측 속에 그리 됩니다

 

숲에 몸을 부린 가시나무는

지금으로부터 온 먼 별이어서

진실이 마모될 때까지 그대로 있자는 여지를 비춥니다

 

그것이 숲이라는 감정이겠지요

당신을 따라 남쪽 큰 숲에 갔었어요

 

이 여지를 가져도 되느냐 물으려는 참에

숲이 출렁 가슴에서 넘쳤습니다

 

 

 

 

 

 

 

 

내 사랑은

 

                           김찬옥

 

한여름 불볕더위 속에서

먹구름이 왔다 먹구름을 타고

소나기가 왔다 소나기를 타고

천둥이 왔다 천둥을 타고 번개가 왔다

번개를 타고 숨이 탁 막힐 것처럼

손톱만한 우박이 쏟아졌다

 

불볕이었다가

먹구름이었다가

소나기이었다가

천둥이었다가

 

한여름날 쏟아지는 저 우박처럼 번개를 타고 왔다

 

내 사랑은 그렇게 왔다

 

나도 저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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