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 전차, 손택수, 창비, 2010(초판7쇄)
강이 날아오른다
강이 휘어진다 乙, 乙, 乙 강이 휘어지는 아픔으로 등굽은 아낙 하나 아기를 업고 밭을 맨다
호밋날 끝에 돌 부딪는 소리, 강이 들을 껴안는다 한 굽이 두 굽이 살이 패는 아픔으로 저문 들을 품는다
乙, 乙, 乙 물새떼가 강을 들어올린다 천마리 만마리 천리 만리 소쿠라지는 울음소리-
까딱하면, 저 속으로 첨벙 뛰어들겠다
자음
밭일 하시던 할아버지가 땅에
지겟작대기로 ‘ㄱ’
이라고 썼다
그러곤 크게 따라 읽으라고
침방울을 튀기며 ‘ㄱ’
온몸으로
외쳐보라고 하셨다
내 최초의 받아쓰기
지겟작대기 끝에서 나온 자음
흙냄새 폴폴 묻어나던 소리
‘ㄱ’ 위에서
씨앗 꽉 문 고추와
입천장 데며 먹던 고구마 노란 속살이 태어났다
허리 구부정한 ‘ㄱ’
지게를 지고 저녁연기 오르는 마을을 향하여
돌아오시던 할아버지
허리가 펴지지 않은 채 땅에 묻히셨다
기름진 자음이 되셨다
추석달
스무 살 무렵 나 안마시술소에서 일할 때, 현관 보이로 어서 옵쇼, 손님들 구두닦이로 밥 먹고 살 때
맹인 안마사들도 아가씨들도 다 비번을 내서 고향에 가고, 그날은 나와 새로 온 김양 누나만 가게를 지키고 있었는데
이런 날도 손님이 있겠어 누나 간판불 끄고 탕수육이나 시켜먹자, 그렇게 재차 졸라대고만 있었는데
그 말이 무슨 화근이라도 되었던가 그날따라 웬 손님이 그렇게나 많았는지, 상한 구두코에 광을 내는 동안 퉤, 퉤 신세 한탄을 하며 구두를 닦는 동안
누나는 술 취한 사내들을 혼자서 다 받아내었습니다 전표에 찍힌 스물셋 어디로도 귀향하지 못한 철새들을 하룻밤에 혼자서 다 받아주었습니다
날이 샜을 무렵엔 비틀비틀 분화장 범벅이 된 얼굴로 내 어깨에 기대어 흐느껴 울던 추석달
앙큼한 꽃
이 골목에 부쩍
싸움이 는 건
평상이 사라지고 난 뒤부터다
평상 위에 지지배배 배를 깔고 누워
숙제를 하던 아이들과
부은 다리를 쉬어가곤 하던 보험 아줌마,
국수내기 민화투를 치던 할미들이 사라져버린 뒤부터다
평상이 있던 자리에 커다란 동백 화분이 꽃을 피웠다
평상 몰아내고 주차금지 앙큼한 꽃을 피웠다
청도산 무우
마을 골목에 채소 트럭이 들어왔다
청도산 김장 무우에 물씬한 청도산 사투리
청무우에 흙이 묻어 있고
수염뿌리 몇이 끊어져나갔다
무우가 뽑힐 때 땅이 저항한 흔적이다
품고 있던 무우를 순순히 뺏기지 않으려고 저항하다가
어느 순간 땅은 무우를 속시원하게 내주었을 것이다
옛다, 이만하면 됐다
무우를 품은 마음을 한사코
무우를 뽑으려드는 마음에게로 건네주었을 것이다
채소 트럭 앞에서 아내가 한참 가격 흥정을 한다
흙 묻은 무우가 마음처럼 쉬 뽑히지 않는다
아내의 이름은 천리향
세상에 천리향이 있다는 것은
세상 모든 곳에 천리나 먼
거리가 있다는 거지
한 지붕 한 이불을 덮고 사는
아내와 나 사이에도
천리는 있어,
등을 돌리고 잠든 아내의
고단한 숨소리를 듣는 밤
방구석에 처박혀 핀 천리향아
네가 서러운 것은
진하디진한 향기만큼
아득한 거리를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지
얼마나 아득했으면
이토록 진한 향기를 가졌겠는가
향기가 천리를 간다는 것은
살을 부비면서도
건너갈 수 없는 거리가
어디나 있다는 거지
허나 네가 갸륵한 것은
연애 적부터 궁지에 몰리면 하던 버릇
내 숱한 거짓말에 짐짓 손가락을 걸며
겨울을 건너가는 아내 때문이지
등을 맞댄 천리 너머
꽃망울 터지는 소리를 엿듣는 밤
너 서럽고 갸륵한 천리향아
연못 에밀레
연꽃잎 위에 비가 내리친다
에밀레 종신에 새겨진 연꽃을
당목이 치듯, 가라앉은
물결을 고랑고랑 일으켜세우며 간다
수심을 헤아릴 길 없는, 끔찍하게 고요한
저 연못도 일찍이 애 하나를 삼켜버렸다
애 하나를 삼키고선 단 한 번도
바닥을 드러낸 적이 없다
어린 내가 아침마다 밥 얻으러 오던
미친 여자에게 던지던 돌멩이처럼
비가 칠 때마다 연꽃
꾹 참은 아픔이 수면 위로 퍼져나간다
당목이 종신에 닿은 순간 종도
저처럼 연하게 풀어져 떨고 있었을까
에밀레 에밀레 산발한 바람이
수면에 닿았다 튀어오른
빗줄기를 뒤로 힘껏 잡아당겼다
자전거의 해안선
썰물이 지면 모래밭 위로 자전거가 씽씽 굴러갈 수 있다.
젖어 뭉쳐진 모래알들이
자전거 바퀴를 뽈끈 들어올려주는 것이다.
물속에 잠겼다 드러나는 자전거길은
굳지 않고도 딴딴하다.
일만 번의 파도가 일만 번의 다림질로
길 표면을 반듯하게 깔아놓은 것이다.
굴러가는 바퀴 밑에서 도르르 풀어져나오는 해안선,
치마끈처럼 풀어져내리는 해안선.
그 끝이 밀물에 들면, 길을 품고 뒤척이는 바다 위로 해가 뜬다.
금빛 바퀴살이 쨍쨍 경적을 울리며 바다 위를 굴러간다.
밀물 썰물 뚝딱 뚝딱 바다는 하루에 두 번씩 공사중이다.
싱싱한 해초 이파리를 물고 씽씽
떠오르는 자전거길.
장생포 우체국
지난밤 바다엔 폭풍주의보가 내렸었다
그 사나운 밤바다에서 등을 밝히고
누구에게 무슨 긴 편지를 썼다는 말인지
배에서 내린 사내가 우체국으로 들어온다
바다와 우체국 사이는 고작 몇미터가 될까 말까
사내를 따라 문을 힘껏 밀고 들어오는 갯내음,
고래회유해면 밖의 파도소리가
부풀어오른 봉투 속에서 두툼하게 만져진다
드센 파도가 아직 갑판을 때려대고 있다는 듯
봉두난발 흐트러진 저 글씨체,
속절없이 바다의 필체와 문법을 닮아 있다
저 글씨체만 보고도 성난 바다 기운을 점치고
가슴을 졸일 사람이 있겠구나
그러고 보면 바다에서 쓴 편지는 반은 바다가 쓴 편지
바다의 아귀힘을 절반쯤 따라간 편지
뭍에 올랐던 파도소리 성큼성큼 멀어져간다
뿌- 뱃고동소리에 깜짝 놀란 갈매기 한 마리
우표 속에서 마악 날개를 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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