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청춘 2010년 가을
이창동 감독과 집담회
잘 알다시피 사람들이 영화를 볼 때 현실을 잊기 위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볼 때 영화는 그런 오락적인 측면과 더불어 현실 반영 reflexion 의 기능이 있다. 나는 그러한 영화의 리플렉션 기능을 주목하되, 일반인들의 꿈을 허위적으로 충족시켜주기보다는 현실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주고자 한다. 이와 반대로 많은 영화들의 경우 현실과 닮아 있으나 결코 현실이 아닌 것을 조작하기 위해 여러 가지 기법과 방법들을 동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훌륭한 작가는 이야기를 위해 일하고, 변변찮은 작가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위해 일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니까 플롯plot 구성을 잘하는 능력, 강한 인상을 주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대사나 성격묘사보다 더 중요한 글쓰기의 자질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동천
미당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은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바위와 난초꽃
미당
바위가 저렇게 몇 천 년씩을
침묵으로만 웅크리고 앉아 있으니
난초는 답답해서 꽃 피는거라.
답답해서라기보단도
이도령을 골랐던 춘향이 같이
그리루 시집이라도 가고파 꽃 피는거라.
역사 표면의 시장 같은 행위들
귀 시끄런 언어들의 공해에서 멀리 멀리
고요하고 영원한 참목숨의 강은 흘러
바위는 그 깊이를 시늉해 앉았지만
난초는 아무래도 그대로는 못 있고
“야” 한마디 내뱉는거라.
속으로 말해 나직이 내뱉는거라.
진눈깨비
이승훈
겨울 오전 주방에서 그릇 닦는다. 창밖엔 진눈깨비 진눈깨비 두리번거리며 내리는 진눈깨비. “나도 밥 좀 주시오.” 얼굴을 유리창에 대고 중얼대는 진눈깨비. “조금만 기다려요.” 그러나 진눈깨비 기다리지 않고 떠나네.
묵묵부답
정끝별
죽을 때 죽는다는 걸 알 수 있어?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거야?
죽을 때 모습 그대로 죽는 거야?
죽어서도 엄마는 내 엄마야?
때를 가늠하는 나무의 말로
여섯 살 딸이 묻다가 울었다
입맞춤이 싫증나도 사랑은 사랑일까
반성하지 않는 죄도 죄일까
깨지 않아도 아침은 아침일까
나는 나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까
흐름을 가늠하는 물의 말로
마흔 넷의 나는 시에게 묻고 했다
덜 망가진 채로 가고 싶다
더 이상 빚도 없고 이자도 없다
죽어서야 기억되는 법이다
이젠 너희들이 나를 사는 거다
어둠을 가늠하는 속 깊은 흙의 말로
여든 다섯에 아버지는 그리 묻히셨다
공평한 세상
이만식
지진으로 수도가 붕괴되고 행정체계가 마비된 아이티는 아비규환일 텐데
나는 잠이 안 와서 따뜻한 우유를 마시고 있다.
내가 나중에 죽을 병에 걸려서 나름대로 아비규환일 때
아이티여, 너는 심심한 오후에 따뜻한 차를 마셔라.
어느날, 봉평
김창균
메밀꽃 흐드러진 초가을
봉평의 어느 보신탕집에 들었는데
아버지 생각이 나더군
고기 가득 담긴 양은 냄비는
자신의 가벼운 뚜껑을 들썩여
김을 연신 밖으로 내보내는데
보신탕집 밖에서는
일찍 단풍든 싸리나무를 때리며
비 쏟아지더군
갈 길은 먼데 물 밀리듯 밀려오는
가장들의 행렬이 비를 맞으며 처마에 서고
병아리들의 총총걸음처럼
리드미컬하게 비들이 가지런해
거기서 잠시 뼈와 살을 고스란히 벗어 놓고
개다리소반 두드리며 노래 한 곡 하고 싶은데
자꾸만 죽음을 줄선 개들이
내 이마에 담뱃불을 비벼 끄더군
홧홧 개새끼들이
상형문자 같은 인간의 발자국을 따라 오더군.
늦가을
박혜선
고추 고랑
참깨 고랑
덮어주더니
가을 일 다 끝내고
관광버스 타고 놀러가는
우리 할머니처럼
붕붕붕
하얀 비닐
까만 비닐
펄럭펄럭
바람타고
여행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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