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머지는 소음이다, 알렉스 로스, 21세기북스, 2010(11)

 

 

 

 

 음악 자체는 초월로 넘어가는 관문이었다. 그것은 허공에서 무게 없는 형태를 응결시키고 그것을 바위 같이 견고한 고체로 변형시킨 다음 다시 해체한다 여기서 시간이 공간으로 변한다.”

 

 

 

 무조주의는 운명적으로 관객들의 성질을 돋우게 되어 있었다. 예술을 애호하는 중산계급에게 당혹스러운 느낌을 주기 위해 그것만큼 완벽하게 계산된 것은 달리 없었다.

 

 

 

 베베른의 작품은 삶의 소음과 죽음의 정적 사이의 연옥에 매달려 있다. 그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중요한 철학적 통찰 가운데 하나는 양편 모두 상대편으로 쉽게 녹아들어간다는 점이다. Op.6의 장송행진곡에 나오는 크레셴도는 역사상 가장 큰 소리를 내는 음악 가운데 하나지만, 그 보다 더 큰 것이 그 뒤에 따라 나오는 침묵이다. 그것은 천둥처럼 귀를 두들긴다.

 

 

 

 작곡가이자 이론가인 로버트 코건이 입증했듯이, 이 단일한 음표의 기록은 음향의 광학적 상상spectrographic imaging of sounds을 통해 B장조 화음을 근원으로 하는 지극히 풍부한 배음 덩어리를 만들어낸다. 클라이맥스적인 불협화음과 소름끼치는 죽음의 리듬이 베이스 드럼으로 울려나온 뒤, 크레셴도가 다시 시작되는데, 이제는 타악기군이 추가되어 깨끗한 배음은 조성없는 소음의 물결에 휩쓸려 나간다. “이 클라이맥스적 패시지는 살인 장면처럼 인간적 한계에서의 궁극, 가청 영역의 극한에서 고통의 극한에까지 도달한다.”

 

 

 

 <제전> 1부는 <대지의 춤Danse de la Terre>이라는 제목으로 전체 오케스트라가 쿵쾅거리며 울리는 소리로 끝난다. 이는 대중 예술의 새로운 유형을 예고했다. 매우 감정적이지만 세련되었고, 영리하게 야만적이며, 스타일과 근육질이 뒤얽혀 있는 유형이었다. 이 곡은 클래식 작곡에서의 2의 아방가르드”, 드뷔시 이후 예술을 파우스트적인 고귀한 영역에서 물리적 세계로 끌어내리려 하던 추세를 요약했다.

 

 

 

 하나의 문화를 흡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곳 출신이 되는 것이다.

 

 

 

 작곡가이자 평론가인 버질 톰슨Virgil Thomson은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싱커페이션이나 폴리리듬(연주하는 한 곡 안에서 두드러지게 대조적인 리듬을 동시에 연주하는 방법-편집자주) 음악을 들으면 몸은 아래위로 움직이려는 성향을 보이는데, 이는 길을 잃은 강약이 지워버리려고 하는 주 박자를 몸은 강조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침묵의 강세가 모든 강세 중에서 가장 강하다. 그것은 몸에게 강세를 동작으로 대체하라고 강요한다고 그는 썼다.

 

 

 

 콕토는 드뷔시 및 더 이상 유행을 선도하지 못하는 라벨이 쓴 작품의 제목을 끼워 넣으면서 이렇게 신랄하게 지적했다. “우리는 지상의 음악, 일상을 위한 음악이 필요하다. 해먹, 화한, 곤돌라는 이제 충분하다고! 나는 누군가가 집에서 사는 것처럼 그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음악을 써주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일반론만 입심 좋게 떠들어대기는 했지만, 콕토는 그 순간의 정신을 조형해내는 데 성공했다. 전쟁의 긴긴밤이 지난 뒤 작곡가들은 니체가 바그너를 비판하며 말한 거창한 스타일의 거짓말에 이제는 신물이 났다.

 

 

 

 남부에서는 흑인에 대한 폭력적인 사적 린치가 사회적 스포츠로 취급되고, 한 해에 피크닉 열차가 텍사스 주의 파리로 1만 명의 승객을 싣고 가서 흑인 남자가 시내를 끌려다니며 고문당하고, 화형주에서 불태워지는 모습을 구경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때에 드보르작이 미국 흑인영가를 포용한 것은 주목할 만한 행동이었다.

 

 

 

 쿡은 소년 시절 룩아웃 산 정상에 섰을 때 품었던 야심을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아프리카의 태양으로 골수까지 타버린 흑인 베토벤을 꿈꾸었다.

 

 

 

 아이브스는 음악 대신에 생명보험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로 선택했는데, 이 분야에서 그는 아주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다그의 음악 철학은 그의 보험 철학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음악이 판매나 구매되는 일 없이 유통될 수 있는 그런 세계를 상상하고 싶어했다. “음악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피아노 걸작품인 <콩코드Concord> 소나타의 동반자격인 책 『소나타 앞의 에세이Essays before a Sonata』에서 이렇게 썼다. “아마 어떤 음악도 아직 씌어지지 않았거나 들려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마 예술의 탄생은 예술로 기꺼이 생계를 유지하겠다는 사람이 전부 없어지고 난 뒤, 그런 사람이 영원히 사라진 뒤에야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버질 톰슨은 그 자체가 하나의 운동이었다. 캔자스 시티 출신으로 하버드 대학을 나왔으며 성격이 까다로운 그는 현대음악의 다양한 영역 어느 곳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이리저리 옮겨다녔다. 1925년에서 1940년까지 그는 파리를 터전으로 삼고, 스트라빈스키, 6인조, 그 중에서도 에릭 사티로부터 배운 교훈을 흡수했다. 사티가 보이는 기만적 순진성의 미국판을 만들어내는 것이 나중에 톰슨의 운명이 된다.

 

 

 

 이런 논쟁은 20년대와 30년대의 뉴욕에서 벌어진 현실을 은폐한다. 거기서는 유대인, 흑인, 심지어 백인 작곡가들도 어깨를 맞대고 함께 일하면서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테마를 차용하고, 과거를 뒤지고, 현재를 먹어치우고 있었다.

 

 

 

 난 자주 소음의 한 복판에서 음악을 듣곤 한다.” 조지 거슈인은 <랩소디 인 블루Rhapsody in Blue>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전체 악보는 그런 복합성과 단순성의 융합을 둘러싸고 구축되어 있다. 하지만 끝에 가서는 단순성이 항상 승리한다. 거슈인은 공책에 베르크라면 절대로 만족하지 못했을 법칙 몇 가지를 적어놓았다. “멜로디가 있어야 한다. 이도저도 아닌 것은 쓰지 않는다. 철저한 단순성. 직설적일 것.”

 

 

 

 톰슨은 이렇게 결론지었다. “나는 그가 가벼운 작곡가여도 상관없고, 그가 진지한 작곡가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도 상관없다. 다만 그가 두 입장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있는 것은 싫다.” 하지만 두 입장 사이에 어정쩡하게 있는 것이 사실은 거슈인의 천재성의 본질이었다.

그는 항상 이중적 삶을 살았다. 음악극 전문가로서, 그리고 연주회 작곡가로서, 지식인 예술가로서, 그리고 하급의 흥행가로서, 순 미국적 소년으로서, 그리고 이민의 아들로서, 백인으로서, 그리고 흰 얼굴의 흑인으로서.

 

 

 

 비극적인 일이지만, 거슈인은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전에 죽었다. 1937년 뇌종양으로 갑자기 죽기 얼마 전, 그는 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어하는 것의 표면도 아직 제대로 긁어내지 못한 것 같아.”

 

 

 

 작곡이란 힘든 일이다. “지독하게 어렵다 <파우스트 박사>에 나오는 악마는 말한다. 그것은 상상 속의 지형을 근면하게 통과해야 하는 일이다. 거기서 출현하는 것은 암호화된 예술 작품으로, 다른 음악가들이 그것을 해독하도록 설득해야 한다. 소설이나 회화와는 달리 악보는 청중 앞에서 연주될 때에만 그 완전한 의미를 드러낸다.

 

 

 

 그는 작곡을 할 때는 창문을 열라고 동료들에게 가르쳤다. “거리의 소음이 그저 소음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것임을 기억하라. …… 인간을, 진짜 인간을 발견하고, 너의 예술을 위한 일상생활을 발견하고, 그런 다음에는 아마 너도 재발견될 것이다.”

 

 

 

 브레히트는 레냐가 그랬던 것 같은 전기 충격을 바일에게 주었다. 더 나아가서 작곡가의 이미지를 강화시켰고, 확고한 좌파 정치의 방향으로 그를 밀어보냈으며, 이빨과 턱을 가진 어휘를 주었다.

 

 

 

 시를 쓰는 데 따라오는 공포감은 비밀경찰 앞에서 겪는 공포감과 전혀 다르다. 존재 그 자체를 앞에 놓고 느끼던 우리의 수수께끼 같은 경외감은 항상 폭력과 파괴의 더 원시적인 공포감에 압도당한다.” 만델슈탐은 이렇게 썼다. 그녀의 남편인 오시프는 소비에트 시절에는 오로지 두 번째 종류의 공포만 남았다고 말하곤 했다.

 

 

 

 195210월 부드럽고 간절한 느낌의, 세상으로부터 물러나는 듯한 프로코피에프의 교향곡 7번의 초연이 있은 뒤, 쇼스타코비치는 보기 드물게 직설적이고 감동적인 축하 편지를 보냈다. “나는 당신이 100년은 더 살면서 작곡하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교향곡7번 같은 작품을 들으면 삶이 훨씬 더 쉽고 즐겁다고 느끼게 됩니다.” 다섯 달 뒤 프로코피에프의 시신 곁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이 사진에 찍혔다. 그의 얼굴은 해독할 길 없이 무표정했다.

 

 

 

 라디오 산업의 개척자인 데이비드 사노프는 조지 거슈인을 배출한 바로 그 뉴욕의 러시아계 유대인 공동체에서 성장했는데, 1915년에 이미 라디오 뮤직 박스가 가진 이점 하나는 농촌의 청중들이 화덕 곁에서 교향곡을 즐길 수 있다는 데 있다고 선언했다.

 

 

 

 1942년 가을, 코플랜드는 신시내티 심포니의 작품 주문을 받고 짧은 오케스트라 팡파르를 보내면서 <평범한 인간을 위한 팡파르Fanfare for the Common Man>라는 제목을 붙였다.

 

 

 

 19세기의 음악, 특히 독일 음악은 그 자체로 완결된, 일상 세계 한참 위쪽에 떠 있는 신성한 영역으로 여겨졌다. 니체의 신랄한 경구에 따르면, 음악은 초월계에서 걸려오는 전화였다.

 

 

 

 불레즈는 1948년에, “나는 음악이 폭력적으로 현대의 집단적 히스테리와 발작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썼다.

 

 

 

 1939년 케이지는 축음기를 악기로 삼는 작품을 썼다. 이것은 <상상의 풍경 No.1 Imaginary Landscape No.1>으로서, 소리를 죽인 피아노, , 속도 변화가 가능한 축음기를 위한 작품이었다. 3년 뒤에는 <우리에 대한 믿음Credo in Us>이 나왔는데, 여기에는 축음기 또는 라디오가 맡는 파트가 있었다.

 

 

 

 마지막의 돌파구는 뉴욕 주 북쪽의 우드스탁 마을에서829일 열린 소위 침묵의 작품이라는 <433>의 초연이었다.

 

 

 

 원래의 악보는 보통의 오선지에, 박자=60, 3악장으로 씌어졌다. 데이비드 튜더는 무대 위로 걸어나가 피아노 앞에 앉아서 뚜껑을 열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각 악장의 시작과 끝에 뚜껑을 열었다가 닫는 일 뿐이었다. 음악은 주변 공간의 소리였다. 그것은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철학적 선언인 동시에 선불교 같은 명상의 의례였다. 그것은 냉소적인 사람들이 항상 지적하듯이 아무나 쓸 수 있는 작품이었지만, 케이지 또한 항상 대답하듯이 다른 누구도 쓰지 않은 작품이었다.

 

 

 

 청중은 붙잡혀야 한다…”

 

 

 

 성자는 대개 악마만큼 흥미롭지 않다.

 

 

 

 음악은 그냥 나온다. 아무런 논쟁도 없다. 거기에 그저 있다. 이것은 내게 인간적인, 거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기까지 한 선택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베토벤에 대한 케이지의 단호한 거부는 서사시의 형태로, 에릭 사티의 피아노 작품인 <분노>를 하루 종일 연주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사티의 원래 악보는 고작 한 페이지에 불과하며, 연주하는 데1, 2분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페이지 위쪽에는 다음과 같은 지시가 있다. “이 모티프를 840번 연주하려면 먼저, 그리고 극도로 조용하게, 심각하게 부동자세로 준비 자세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케이지는 이 문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19639 9일과 10, 뉴욕의 포켓 씨어터에서 <노여움>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열두 명의 피아니스트가 팀을 이루어 오후 여섯 시부터 다음날 12 40분까지 연주했다. 이에 대해 ≪뉴욕타임스≫지는 여덟 명의 평론가 팀을 보내어 행사를 취재하도록 했는데, 그 중의 한 명은 나중에 연주자로 참여했다.

 

 

 

 음악학자 크리스토퍼 스몰의 신조어를 차용하면서 핑크는 이렇게 쓴다. “’반복적 음악하기는 존재하지도 않는 진정한 관계에 대한 갈망을 거의 표현하지 않는다. 이런 방식으로 더 전통적인 아방가르드 음악에 흔히 결여되어 있던 정직성이라는 장점을 갖게 된다. 대개 반복적 음악은 우리가 끝없이(계속 또다시……) 대면해야 하는 후기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무수히 반복적인 관계 앞에서 인정, 경고, 방어, 혹은 미적인 전율까지도 제공한다. 우리는 이 문화 속으로 우리 자신을 반복해 들어왔다. 우리는 반복하다가 끝나게 될지도 모른다.”

 

 

 

 이것은 20세기에 작곡이 겪은 운명에 관한 책이다.

 

 

 

 슈톡하우젠은 20세기의 마지막 23-그리고 21세기의 첫3-을 오페라 일곱 편으로 이루어진 메타바그너적 연작 <리히트Licht>를 쓰는 데 쏟았다. 오페라 한 편마다 요일 하나가 이름으로 붙여졌다….

 이 책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 어떤 오페라하우스도 <수요일>을 공연하지 못했다. 그 곡의 3악장에서는 현악 주자 네 명을 헬리콥터에 태워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금요일>에는 작곡가의 구상에 따르면, “날아가는 로켓, 달에 있는 여자, 여자를 향해 움직이는 거대한 주사기, 4m높이의 거대한 연필깎이와 스스로 연필이 되어 그 연필깎이로 자신을 밀어넣는 여자와 남자 하나씩, 여자 둥지 주위를 날아다니는 거대한 수까마귀등 각각 전혀 다른 물건 열두 가지가 필요하다.

 

 

 

 드뷔시는 말했다.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것에서부터 음악이 시작된다. 나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위해 음악을 작곡한다. 그것은 그림자로부터 나왔다가 이따금씩 그림자 속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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