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치민 평전, 윌리엄 J. 듀이커, 푸른숲, (첫판6쇄)
응우옌 아이 쿠옥은 다른 많은 마르크스주의 지도자들과는 달리 자신의 청중은 지식인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노동자, 농민, 병사, 사무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지적인 총명함으로 독자에게 감명을 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대신 그는 단순하지만 생생한 말로 그들을 설득하여 자신의 세계관과 변화를 성취하는 방식을 공유하고자 했다. 그의 글에서는 벌거벗은 힘이 느껴졌다.
아시아의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조국을 식민지로 착취하는 형태로 자본주의 체제를 처음 겪었다. 이 체제는 그의 동포 대부분의 삶을 잔인하게 짓밟았다.
“나는 대학에서 공부를 하는 행운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삶은 나에게 역사, 사회과학, 심지어 군사과학을 공부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무엇을 사랑할 것인가? 무엇을 경멸할 것인가? 우리 베트남인들에게는 독립, 노동, 조국을 사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의 글에는 공상적인 면이 없었다. 그는 가장 좋아하던 작가 레프 톨스토이를 읽어나가면서 단순하고 직접적인 글쓰기의 중요성을 배우게 되었다. 그의 글에는 미묘한 면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요점을 전달하기 위해 사실과 숫자를 많이 이용했기 때문에, 독자들의 눈에는 그가 식민지의 삶을 대변하는 걸어다니는 통계학 사전-상아 해안의 인두세 수준으로부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식민지 예산에 이르기까지-처럼 보였다.
당에는 군대도 없고, 전투기도 없다. 당은 오로지 대중이 자신의 해방을 추구하고,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투쟁하고, 자신을 조직하여 억압에 대항하도록 선동하는 것 외에 다른 수단은 가진 것이 없다.
쿠옥은 1931년 초에 쓴 ‘붉은 응에 틴(응에 틴은 봉기가 가장 크게 일어났던 인접한 두 성 응에 안과 하 틴을 가리킨다)’이라는 글에서 베트남 중부에서 노동자와 농민의 불만이 결합되어 폭발적인 힘이 터져나왔다고 지적하면서, 이 봉기는 진실로 ‘붉다’고 평할 만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감옥에서 죽을까 두렵소. 하지만 내 생각은 하늘에 박혀 사라지지 않을 것이오.”
이런 온건한 얼굴은 호치민 자신의 얼굴이었음이 분명하다. 호는 시골 아저씨 같은 인물, 낡은 카키색 양복에 파란 헝겊 샌들을 신은 ‘소박한 애국자’로 등장함으로써 수백만 베트남인의 마음을 얻었을 뿐 아니라, 찰스 펜이나 아커미디스 패티 같은 미국 장교, 장 생트니와 레클레르 장군 같은 프랑스측 협상자 등 가까운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물론 호치민의 포즈에는 계산적인 요소가 있었으며, 가까운 몇 사람에게는 자신이 이런 책략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음을 드러내곤 했다. 그러나 이 전술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며, 따라서 그가 평생 이것을 그의 전략적 무기고의 핵심 구성요소로 채택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호치민은 무엇보다도 실용주의자였다. 그는 1945년 가을 미국의 저널리스트 해럴드R. 아이작스와 인터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독립이 핵심입니다. 그 다음 일은 그 다음 일이지요. 어쨌든 그 다음 일이 생기려면, 먼저 독립부터 이루어야 합니다.”
군사력에서 정부의 가장 심각한 고민은 무기 부족이었다. 정부는 다양한 화기를 손에 넣을 수 있었는데, 그 가운데 일부는 19세기에 만든 것이었다. 또 항복하는 일본군으로부터 대전차 지뢰와 기관총 몇 정을 노획하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무대가 곤봉, 창, 또는 동네 대장장이가 만들어준 화승총 등으로 무장했다. 호치민은 새로운 무기를 얻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과정에서 내키지 않으면서도 무기 구입을 위해 주민으로부터 돈을 거두는 계획을 승인했다. 정부는9월 마지막 주를 ‘황금 주간’으로 정하고, 금붙이를 비롯한 귀중품을 기부하여 점령군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할 자금을 모으자는 운동을 벌였다.
아커미디스 패티에 따르면 호치민은 주민으로부터 기금을 모으는 계획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은 애국적인 의무감에서 희생을 할 것이고, 부자들은 그저 남들 눈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만 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우려는 적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북부의 부자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액수만 내놓았기 때문이다. 호는 ‘이런 소극笑劇‘이 벌어지도록 방기한 자신이 ‘반역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한 간부는 응우옌 하이 탄을 정부 요직에 앉힌다는 이야기를 듣고 호치민 앞에서 우려하는 이야기를 했다. 실제로 호치민과 응우옌 하이 탄의 관계는 1920년대부터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러나 호는 이렇게 말했다. “기름은 더럽지 않소? 그래도 벼에 좋다고 한다면 그것을 써야 하지 않겠소?” 일각에서는 베트민과 그 경쟁자들 사이가 물과 불 같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반대파에게 70석을 보장한다는 결정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자 호는 그렇다고 동의하면서도 (비유에 대해서라면 언제든지 상대해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만일 물을 불 위에 놓고 끓이면 물을 안전하게 마실 수 있지 않느냐고 응수했다.
“중국이 계속 주둔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요? 당신들은 우리 역사를 잊고 있소. 중국은 우리 나라에 한번 들어오면1천 년씩 떠나지 않았소. 하지만 프랑스는 단기간 있을 수밖에 없소. 결국 그들은 떠나야 할 거요.” 호는 훗날 프랑스의 역사가 폴 뮈에게 더 속된 말을 써가며 이렇게 말했다. “평생 중국인의 똥을 먹는 것보다는 프랑스인의 똥 냄새를 잠시 맡는 게 낫지요.”
호는 자신이 카를 마르크스의 제자이기는 하지만 공산주의는 산업과 농업의 발전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지는 것이며, 베트남은 이런 조건 어느 쪽도 갖추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호는 이렇게 덧붙였다. 카를 마르크스의 꿈이 언제 실현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2천 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쳤지만, 그것도 아직 꿈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는 농민 차림으로 지칠 줄 모르고 지지자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공동의 목표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라고 선동하고 격려했다. 해방구의 생활 조건은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몇 달 보다는 나았지만, 프랑스의 공습은 잦았으며, 호는 사흘이나 닷새에 한 번씩 체포를 피하기 위해 거처를 옮겨야 했다. 호는 이제 예순이 넘었지만 여전히 배낭을 지고 꼬불꼬불한 산길을 따라 하루에 50킬로미터를 걸을 수 있었다.
호가 자신의 적이나 경쟁자에게 야만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모습은 눈에 띈 적이 없지만, 자신의 부하들이 그런 행동을 할 경우에는 운동의 좀더 큰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너그럽게 봐주려 했다(어느 시대에나 이데올로기를 우선으로 하는 이론가들은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
호는 가끔 사건에 개입하기도 했지만 효과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피해를 본 어떤 지식인의 가족은 필자와 만난 자리에서 호가 수감된 사람의 처우를 좀 개선해주려 했다고 말했다. 어쨌든 영향력이 쇠퇴하던 호치민은 자신의 창조물의 포로, 호박 속의 파리가 되어, 전체적 계획의 ‘더 높은 도덕성’에 개인의 운명을 희생시키는 체제의 무자비한 논리에서 그 자신도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이야기까지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던 한 사람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 북베트남에서 받은 훈련 역시 힘들었다. 가끔 먹을 것 때문에 고생하기도 했다. 가끔은 너무 외로웠고, 집에 가서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외로움을 타지 않게 되었으며, 혁명 투쟁에서 힘을 얻게 되었다. 가족 생각도 별로 나지 않았다. 우리는 이제 가족을 그리워하지 않게 되었다 – 호치민처럼.
베트남 대표들 다수는 중국측 입장을 지지했지만, 호치민은 마오 쩌둥의 야심에 깊은 의심을 품고 있었으며, 마오가 “호랑이들이 싸우는 동안(모스크바와 워싱턴 사이의 관계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산꼭대기에 서 있으려 한다.”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호는 회의에서 중요한 대목에 이르면 소비에트의 입장을 지지했다. 레두안과 응우옌 치 타인은 호 아저씨의 의견을 존중하는 전통(“아저씨가 하시는 말씀은 모두 옳다”)에 따라 입을 다물고 있었다.
워싱턴은 이제 남베트남이 미국의 국가 안보에 중요하다고 확신하고 있었고, 동남아시아에서 치욕스러운 패배를 당할 경우 그것이 미칠 파장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당 지도자들은 1961년 10월의 정치국 회의에서 전략적 선택 방안들을 논의했다. 호치민은 미국이 군사력에서 프랑스-베트민 전쟁 당시의 프랑스보다 훨씬 강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따라서 힘 대 힘의 대결로는 승리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제국주의자들의 약점, 혁명군의 강점은 정치 영역에 있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시골로 소개하고 도시만이 아니라 자주 공격을 받는 농촌지역에도 방공호 건설을 명령했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5만 킬로미터 이상의 참호, 2천만 개의 방공호-방공호 대부분은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가 건설되었다.
베트남에서 미국인들은5만 5천명 이상 죽었지만, 전쟁 기간 베트남인은 남북을 합쳐 1백만 명 이상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호 아저씨의 동포들은 꿈을 실현하겠다는 그의 결의 때문에 상당한 대가를 치렀던 셈이다.
1960년대 말에 호치민은 유언을 자주 고쳤지만, 어느 유언장에나 화장을 해달라는 유언은 꼭 들어가 있었다. 마지막 유언장에는 유해를 화장한 다음 조국의 북부, 중부, 남부에 나누어 뿌리고 장소를 밝히지 말아달라는 조항을 넣었다. 평생을 조국 통일에 바쳐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동이었다.
호치민은 몸이 나아졌다고 말했다. 이틀 뒤 호치민은 그를 만나러 온 팜 반 동에게9월 2일로 예정된 독립기념일 행사 준비가 끝났느냐고 물었다. 호치민은 다음 날 일어나 죽 한 그릇을 먹고 참전 용샤들을 만났다. 그리고9월2일 오전9시45분, 베트남의 독립 25돌을 기념하는 날 호치민의 심장은 멈추었다.
호치민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전세계에서 논평이 쏟아졌다. 세계 주요 국가에서 조문을 했으며, 하노이는 121개국으로부터2만2천 통의 조문 메시지를 받았다.
위원회는 당 지도부에 보내는 최종 보고서에서 기념관이 현대적 양식에 전통적인 느낌을 가미할 것이라고 말했다. 주석의 성격과 맞도록 외양은 엄숙하면서도 소박할 것이며, 누구나 가기 편한 장소에 세울 예정이었다. 위원회는 건물 설계를 연구하면서 이집트의 피라미드, 로마의 비트리오 에마누엘레 기념과, 워싱턴의 링컨 기념관, 모스크바의 레닌 묘 등 수많은 기념관들을 살펴보았다. 그런 다음 정치국의 추가 제안들을 받아들이고 나서, 계획 중인 구조물의 모델을 전국에 전시하여 대중들의 평가를 들었다. 그 결과3만 건이 넘는 제안이 접수되었다.
기념관 부지로 선택한 곳은 베트남 혁명의 최고 성지 가운데 하나인 하노이 바 딘 광장으로, 이곳은 주석부와 호가 여생을 마친 작은 집 바로 옆이기도 했다. 1975년8월29일 기념관이 마침내 대중에게 공개되었을 때, 그 모습은 무엇보다도 ‘붉은 광장’의 레닌 기념관을 연상시켰다. 전면은 회색 대리석으로 덮었는데, 그 가운데 많은 부분은 다낭 남쪽의 대리석 산에서 캐온 것이었다. 베트콩 부대는 이 산속의 동굴에 들어가 미군 병사들이 이 지역의 유명한 휴양지인 차이나 해변에서 수영하는 것을 지켜보곤 했다.
전체적으로 이 기념관은 수많은 베트남인이 사랑하던 친근한 호 아저씨라기보다는 국제 공산주의 지도자 호치민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강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동포들이 이 기념관을 경원시한 것은 아니다. 지금도 매주1만5천 명이 이 기념관을 찾고 있다.
당 지도부는 호치민의 유해를 기념관에 보존하는 계획을 추진함으로써 소박한 장례식과 화장을 원했던 호의 요청을 분명하게 무시했다. 호는 고위직에 따르는 호사스러운 장식물들을 경멸하여, 1959년 자신이 유명한 혁명가 응우옌 아이 쿠옥임을 밝힌 뒤 킴 리엔 마을에 그의 삶을 기념하는 작은 기념관을 짓겠다는 제안조차 거절하면서 그 돈은 학교를 짓는 데 쓰는 것이 낫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당 지도부는 호의 요청에 위배되는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을 피하기 위하여 호의 유언장에서 시신 처리와 관련된 부분을 삭제해버렸다. 1969년에 발표된 유언장에는 농업세를 1년 간 감면하라는 제안과 남부에서 전쟁이 몇 년 더 계속될지도 모른다는 경고도 생략되어 있었다. 당에서는 또 독립 기념일-호치민이 바 딘 광장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날인 1945년9월 2일을 기념했다.-의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호가 실제보다 하루 늦은9월 3일에 서거했다고 발표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해석이 중요했던 것은 월남 파병의 정당화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베트남 상황과 한반도 상황이 여러모로 비슷해 보인다는 점이 문제였는데-사실 한반도와 베트남은 근대 이전 중국과의 관계에서 겪었던 고통에서부터 근대의 분단과 전쟁에 이르기까지 비슷한 점들이 금방 눈에 들어온다.-이 닮은꼴에 주목한 사람들에게는 한쪽의 상황 해석을 다른 쪽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고 싶은 유혹, 또는 한쪽의 상황 전개를 다른 쪽에서 이후에 전개될 상황에 대한 예시로 받아들이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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