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를 쉽지 않게 쓰면 안 되나?
내가 이 일을 6년째 해오면서
선배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얘기 중 하나는
쉽게 써라, 쉽게 써라, 쉽게 써라.
이다.
왜지? 왜 쉽게 써야 하지? 라는 궁금증이 늘 있어왔으나
한국 문화의 특성상 선배의 가르침에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은
거의 불문율처럼 지양하게 되어 있으며,
설사 왜 쉽게 써야 하죠? 라고 물어본들
소비자는 바쁜 사람들이며
광고는 스쳐 지나가듯 보는 것이기 때문에 1초 안에 이해가 되야 하며
심플 이즈 베스트가 정석이며
소비자들을 머리 쓰게 만들지 말라 등의
답변들이 들려올 게 뻔하고
그러면 그에 대한 반박이나
또는 그 답변들에 의해 새로 생길 질문들이 뻔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해한 것처럼 아 네 그렇군요
수긍하는 패턴이 벌어질 게 뻔해서 (그런 놀음이 지겨워서)
선배들에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소비자들은 바쁜 사람이고 머리 쓰기 싫어하는 사람일지 모르지만
그 바쁜 와중에 500페이지짜리 책을 사서 읽는 사람이기도 하며
두뇌를 써야 하는 스도쿠나 컴퓨터 게임에 빠져 사는 사람이기도 하며
심지어 술 취해 해롱거리면서도 뭔 단어 맞추는 게임 따위를 하는 사람이기도 한다.
다시 말해, 소비자들은 바쁘니까
무조건 1초 안에 이해되게 만들어야 된다는 건
광고 제작자들이 만든 허상이고
실제로는 흥미롭고 지적 자극을 줄 수 있는 카피라면
신문기사를 읽듯 잡지를 정기구독 하듯
호기심과 탐구심으로
읽을 수도 있는 것이 소비자가 아닌가 싶다.
아닌가?
또 하나 광고 선배들에게 카피를 보여주고 난 뒤,
소비자들을 너무 똑똑하게 보지 말라고
초등학생이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다시 쓰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었는데,
그냥 소비자들이 나보다 다 똑똑한 사람들이라고
겸손하게 생각하면 안 될까?
어쨌거나 죽을 때까지 내가 쓰는 모든 종류의 글들의
최초이자 최후의 독자는 나일 텐데
‘내가 썼기 때문에 나만 이해하기 쉬운’ 거라면 문제가 되겠지만
‘내가 쓰지 않았더라도 내가 봤을 땐 이해하기 쉬운’ 정도라면
써도 되는 것 아닌가?
내가 봤을 때 쉽고 편안한 수준의 문장을
억지로 내가 봤을 때 쉽고 편안하지만 다른 사람은 쉽지 않을 거야 라고 생각하며
내 안에 가상의 독자를 만들어
그 가상의 독자가 가상으로 느끼게 만들어
그 독자의 피드백을 받아
그래 이 정도면 되겠군, 하며 그 수위를 맞추는 작업은
쓸데 없는 짓이 아닐까?
그거야 말로 픽션이지.
광고의 내용이 학술서적이나 논문, 전문기술 관련 된 게 아니라
그저 보통 사람들이 들으면 충분히 알만한 그런 스펙을
보다 매력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카피라면,
시원찮은 시험 성적으로 지방대 국문학과에 간신히 진학하고
무려 8년이나 걸려 졸업한 나 같은 지진아보다
어지간한 소비자들은 훨씬 더 똑똑할 것이다 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나?
대학 진학률이 90%에 육박하는 초 학구적인 나라인데??
몇 년 전
어떤 분의 책에서 본 내용 중에는 이런 게 있었는데.
인터넷상의 지식 교류 형태가 외국과 한국이 어떻게 다른가. 허얍.
한 마디로 외국의 대박 아이템은 위키피디아.
한국의 대박 아이템은 네이버 지식인.
그 둘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은 몇 번 이용해 보면 알지.
한국에선 왜 그 서방세계를 휩쓴 위키피디아가 안 통하는가,
그 또한 네이버 지식인을 둘러보면 금방 알지.
한마디로 한국인들은 책 읽는 문화, 문자 문화와 아직도 너무 멀다.
소위 선비들만 글을 읽던 조선말기로부터 이제 한 세기도 되지 않았다.
한국의 어문 전통 문화들은 판소리 등 말로 전해 내려온 것이 대부분이다.
반면 외국은 일찍부터 문자 문화가 발달해왔다.
한마디로 외국의 지식 교류 사이트라면
000문헌을 보면 000라고 나와 있고, 000라고 생각된다 식으로 지식이 축적된다면.
대한민국 네이버 지식인에선
울 엄마가 000래요! 제 친구도 그런 적 있었는데요 000해서 해결 됐어요! 식으로
지식??이 축적된다는 내용이었다.
아마도 선배들의 조언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지난 6년간 가장 많이 한 것들 중 하나가
해외 유명 광고들을 찾아보며 공부한 것 아닌가? 그 시간들은 무엇이었나 싶고
광고가 언제나 모든 문화 전선의 최후방 주자(심지어 표절자)라지만,
그래도 차츰 어떤 변화를 이끌어가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라는 조금 더 이상적인 생각을 갖는 젊은이에게 있어서.
아래와 같은 카피를 볼 때마다
가슴이 울렁거리는 건
봄에 피는 꽃의 권리처럼
정당한 게 아닌가?
“우리는 물고기를 위해 브레이크를 밟습니다.“
<그레이스 앤 로스차일드, 뉴욕>에서 집행한 랜드로버 프린트 광고 카피다.
그림은 꽤 깊이가 있는 개울을 랜드로버가 힘차게 건너가고 있는 심플한 사진이다.
한국에서라면 보통,
더 이상 물이 무섭지 않다.
물에서도 강력한 파워.
물속에서 더욱 자유로운 드라이빙을 즐겨라!
등의 감흥 없는 카피가 선택될 가능성이 꽤 높다.
(솔직히 지난 3-4년 동안의 국내 자동차 인쇄광고 카피 중 유일하게 마음에 와 닿았던 건
인피니티 광고 “처음으로 내가 포기한 건 해적이 되는 것, 두 번째로 내가 포기한 건 남과 다른 속도로 사는 것, 세 번째로 내가 포기한 건….” 정도뿐인 것 같다.)
“우리는 물고기를 위해 브레이크를 밟습니다.”
이 묘한 뉘앙스, 위트, 예상(기대)을 배반하는 표현, 멀리 뛰어갔다 강아지처럼 꼬리 흔들며 돌아와 닿는 표현!!
내가 만약 이 카피를 그대로 써갔다… 과연… 집행이 될까?
“이 세상의 어떤 외과의사도 이 맹인이 앞을 볼 수 있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떤 개는 할 수 있습니다.”
<사치앤사치, 런던>에서 집행한 맹인 안내견 협회 광고.
비쥬얼은 한 노인의 얼굴에 눈 부분만 개의 눈으로 합성되어 있다.
이 두 줄짜리 헤드라인.
순전히 읽는 것만 1초를 넘어서는 분량.
사실 이런 류의 카피라면 한국에서도 종종 볼 수 있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이런 차분하고 고급스런 카피의 톤&무드는
쉽게 보기는 힘든 현실이다.
(앞면)
“죽기 위해 반드시 이 버스에 치일 필요는 없습니다.“
(뒷면)
“이 버스는 당신을 질식시킬 확률이 당신을 칠 확률보다 3배나 높습니다.”
<BBDO/게레로 오테가>에서 집행한 오염감지 그룹을 위한 버스 광고.
이런 아이디어 자체는 한국 에이전시에서도 얼마든지 낼 수 있다.
그러나
“죽기 위해” “버스에 치일” 등의 단어가 과격하다고, 세다고, 거칠다고
데스크에서 기피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심지어 버스광고는 거의 심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테면 자체심의인 거다.
아마도,
“이 버스에 치일 확률보다 매연으로 질식할 확률이 3배나 높다는 사실, 알고 계십니까?”
정도로 수정되어 집행 되겠지.
이 지나칠 정도의 얌전함. 고지식함.
그러니까 회사 내에서는 모범적으로 근퇴, 성실하게 일하고,
술자리, 회식자리에선 누군가 개망나니 놀이를 해주길 바라는
한국 특유의 ‘장애 문화’의 반영인지?
“당신의 눈이 예쁘다고 칭찬하는 사내는
아마도 당신의 가슴을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미소가 예쁘다고 칭찬하는 사내는
아마도 당신의 가슴을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신고 있는 하바이아나스 샌들이 예쁘다고 칭찬하는 사내는
아마도 여성의 소지품을 보면 흥분하는 변태거나
당신의 가슴을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알맙BBDO, 브라질>의 하바이아나스 샌들 광고.
헤드라인 없이 5줄의 바디카피마으로 이뤄져있다.
이 샌들 브랜드의 정신엔 패션과 솔직함 그리고 자유의 정신이 녹아있음이 카피만 봐도 느껴진다.
유머와 섹시함도 이 샌들 브랜드의 정신 중 일부인 듯 하다.
자유를 지향하는 브랜드가
‘여자의 가슴(남자의 시선에서 말하는 여자의 가슴이다)’
‘변태’라는 정도의 단어를 사용하는 건
그야말로 자유로워보인다.
한국에서 자유를 외치는 브랜드들의 카피.
마치 고등학교 교실 속 책상 앞에 반듯이 앉아
교복 입고 “자유”라는 단어를 외치는 듯한 단정함.
이곳에서 과연 ‘변태’란 단어의 자유를 허용 받을까?
더군다나 자기 브랜드(하바이아나스 샌들)가 예쁘다고 칭찬하는 사내는
여성의 소지품을 보면 흥분하는 변태라는 식의
표현 자체는 네가티브하지만 의미는 포지티브(유머를 즐기는)인
이런 표현의 자유라니…!
문제의 시작은 여기서부터인 듯 하다.
학교에서 광고홍보학과 복수전공을 하는데,
좋은 카피의 예로 “빨래~ 끝!”을 배웠다.
난 그때까지 한 번도 그게 좋다고 느낀 적이 없었는데
쉽고, 심플하고, 기억이 잘 되서 좋은 카피라고
교육 받았다.
심지어는 빨래를 다 한 뒤 느끼는 주부의 해방감이
빨래~끝!에서 통찰력 있게 잘 드러나며
끝이라는 표현에서 어떤 세제류 제품의 탁월한 성능이 표현된다는 설명이
끄덕끄덕 공유되는 걸 보며
여긴 어딘가, 나는 또 누군가,
라고 느꼈다.
내가 광고홍보 복수 전공을 하기 전에
광고라는 직업을 단 한 번도 머릿속에 떠올려 본 적도 없던
그야말로 그냥 순전히 소비자일 때 내가
가장 감동받은 카피는
TTL의 “넌 양 몇 마리 키워?” 였는데…
그 광고가 좋아서 당장 TTL카드 만들었는데…
뭐 어쨌거나
주부가 아닌, 세제에 대한 관여도가 거의 없는 내 입장에서
둘을 비교하는 것도
문화가 다른
해외 사례와 국내 사례를 비교하는 것도
별 의미가 있는 건 아닌 듯하고
다만,
아직까지도
한 줄의 카피 속에서 몇 십 킬로미터 혹은 1년 정도의 여행을 체감 할 수 있는,
한 줄의 첫 단어부터 끝 단어까지 읽어 내려가는 동안
‘뭔가가 툭 치고 저 멀리 다다다다다다 뛰어가다가
운동장 저 끝에서 휙 방향을 바꿔서는 다시 나에게로 다다다다다다
달려와 안기는 강아지’를 보는 것 같은
시간적 공간적 넓이의 체험을 일으키는
그런 카피에 대한 욕심은 버릴 수가 없다.
이건 일본 카피.
계속 같이는 있을 수 없으니까.
지금은 계속 같이 있자.
작은 네가 올해의 여름을 잊어버려도,
엄마가 계속 기억해둘게.
브랜드나 제품은 잘 모르겠지만, 육아 관련 브랜드 광고인 듯 하다.
(-<글리코> 광고다. 최근에 알았다.)
카피는 아니지만, 이런 것.
오늘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할 때, 별이? 바람? 지금 이 손끝에 느껴지는 바람? 그게 저 우주 속 별에? 어? 어어어어???? 하며 느껴지는 체감.
가지가 찢어질 듯 달이 밝다
라고 할 때
가지? 그래 나뭇가지. 달이 밝으니까 밤이겠네.
밤에 달이 떴고 아 나뭇가지가 달에 걸려있겠네
달이라는 조명 가운데 나뭇가지가 시커멓게 금처럼 죽죽 가있는 모습이
뭔가 세상이 온통 찢어질 듯한 그런 장면
있지 추석이나 명절 때 시골 내려갔다가
오줌 마려워서 마당 나왔을 때 올려다본 달이나 그 달을 가린 나뭇가지가 딱 그거네…
까지 연상 시키는 한 줄.
어쨌거나 이건 카피가 아니니까… 라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인간에 대한 어떤 인사이트
특히 정서나 감정에 관련된 부분,
외로움이라든지 고독감, 청춘, 사춘기, 엄마의 마음, 사랑, 믿음 등
다분히 주관적이며. 보편의. 공통 정서가 존재하지만 명확하진 않은.
그런 것들이
어떻게 쉽고 분명한 한 줄의 메시지로 정리가 가능할 수 있는지
아직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한창 위스키 관련 카피를 쓸 때
컨셉이 신뢰나 믿음 등과 관련된 것이었는데
신뢰는 00보다 강력하다,
신뢰로 지어진 000 비즈니스 현장,
신뢰를 따르다,
000와 000, 새벽 2시 서로의 신뢰를 주고받다,
등의 단언형의 카피가 주로 쓰여졌는데
난 이런 문장이
‘신뢰’란 무엇인지에 대해 전혀 조금도 전달해주지 못한다고 느꼈다.
여기서의 ‘신뢰’란 국어사전 속에 존재하는 신뢰지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고 느끼는 그 신뢰란 아니지 않는가?
이런 카피는 그야말로
소비자를 초등학교나 겨우 나온 존재로 보고 우롱하는 듯한
카피가 아닌가 싶었다.
어떤 감정이나 어떤 가치관은
그 감정이나 그 가치관을 표현하는 단어로는 표현이 되지 않는데
예를 들면, 신뢰, 사랑, 우정,
이런 죽은 단어는 헤드라인에 오르는 순간
신뢰나 사랑이나 우정을 설명해주지 못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해나 모호함이 두려워
신뢰는 신뢰로
우정은 우정으로 표현해야 될 경우가 많아서 답답하다.
투수가 보다 강력한 공을 던지기 위해선
그 공을 받아줄 수 있는 포수가 필수의 존재다.
공을 받아줄 수 있는 포수가 없다면
투수는 수준 높은 투구를 연습할 수도 개발할 수도
실전에 써먹을 수도 없다.
카피를 쓸 때,
내 가상의 독자를
좀 더 높게 잡고 싶다는 욕심
그게 단지 예술적 표현이나 문학적 기교를 위한 게 아니라
정신적인 면
삶에 대한 가치관
열린 오픈된 마인드에 있어서
오히려 나 자신보다 더 성숙한 사람,
그런 사람으로 잡으면…
안 되나?
우리 주변 사람들은
내 주변 사람들은
그런 존재이면 안 되나???
그리고 이건 덧대놓은 생각 한 조각.
대한민국 국민처럼 허영심 강한 국민들도 드무니까.
루이비통 짝퉁이 어느 나라보다 강력하게 유행했던 나라니까.
남들 가진 저것 정도는 나도 가져줘야 안심하고 외출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평생 뽕짝 듣고 부르며 즐겁게 살아오다가도,
땅값이 올라 벼락부자가 되고 나면 졸음 꾹꾹 참으며 오페라 보러 다니는 사람들이니까.
자기보다 잘난 친구들과 있을 때
자기보다 못난 친구가 아는 척 하면 왠지 부끄럽고 피하고 싶어지는 심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이렇게 허영심 강한 사람들이라면,
카피가 알 듯 말 듯 어려운 게 오히려
에헴, 나 이런 것 정도 이해하는 사람이야, 라며
괜히 더 좋아라 하지 않을까?
그리고 하나 더의 궁금증.
내가 아는 한 누나는
대학 졸업 즈음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등단을 했는데,
그 당시 제일기획에선 신춘문예 등단자들을 희망자에 한해
몽땅 신입사원으로 채용했다.
그래서 이 누나와 같은 동아리에 있던 난
오, 우리들 이런 회사에서 환영 받을 수 있는 거야?
라는 철딱서니 없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그런데 현실은 좀 달랐는데,
어쨌거나 의아한 건,
홈즈 흉내 내며 풀어보려 해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는,
굳이 등단한 시인들을 스카우트해가서는
쉽고 평범하게 쓰는 법을 새로 가르치는
이 무시무시한 생산과정은 뭐냐는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시 독자는 5만명이다.
5천만명 중에 5만명만이 시집을 사고, 시잡지를 구독하며
요즘의 시를 즐길 수 있다.
이 5만명의 독자를 위해 시를 쓰는 시인들의
언어 사고력은
쉽게 쓴다고 쉽게 썼지만 그게 쉬워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굳이 그들 붙잡아다가
쉽게 쉽게 쉽게 쓰라고 하는 건 뭐였을까?
아직도 궁금한게 많다.